바벨의 도서관 #2. 특혜와 무위도식

바벨의 도서관 #2. 특혜와 무위도식

2021-09-28 0 By 커피사유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사유 #29. 바벨의 도서관」에서 영감을 받아 마련한 공간으로,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읽거나 접한 책, 글귀 중 일부를 인용, 개인적인 생각을 담은 주석을 덧붙여가며 세상을 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시도하는 공간입니다.

최근 들어 대선판을 둘러싸고 대한민국 주요 양대정당의 치열한 공방 속에, 유독 하나의 논란이 눈길을 끄는 것 같다. ‘화천대유’라는 조직에서 모 정당 의원의 자녀가 조금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액수의 퇴직금을 수령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산업재해위로금의 지급, 치밀하게 설계된 오징어 게임 속 ‘말’이라는 등의 당사자들의 해명이 나왔지만, 여론은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고, 실제로 나 또한 약간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나는 이것들을 모두 굳이 풀어서 쓸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저 지난 7월부터 계속 읽어오고 개인적으로 주석을 달고 있던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한인섭 역, 박영사)의 두 개 장과 그 부분에 대하여 내가 달아놓은 주석을 병기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인 듯하다.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에서

제21장. 귀족에 대한 처벌1(커피사유 주) 베카리아가 살던 사회 당시에는 귀족 등의 신분제가 유지되고 있었음을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다. 신분제는 폐지된 오늘날, 이 장은 어떤 측면에서 이의가 있을까?

귀족의 특권은 각국의 법에서 커다란 부분을 점하고 있다. 그러면 귀족의 범죄에 대해서는 어떠한 형이 적용되어야 하는가?

여기서 귀족과 평민간의 세습적 구분이 어느 정부에나 유용한가, 혹은 어떤 군주정에서 필요불가결한가 하는 점을 검토하지는 않겠다. 귀족이 국왕과 평민이라는 양극단의 두 계급의 권력남용을 제어하는 중간세력을 구성한다는 것이 사실인가, 아니면 귀족은 실제로 특별한 한 계급이 아니라 귀족 자신과 여타 계급의 노예로써, 아라비아의 사막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풍요한 오아시스 같이, 근면에 대한 평판과 희망을 극히 협소한 범위 내에 한정시키는 계급을 말하는 것인가?2(원문 주) 이 문장은 특권을 누리는 세습귀족층이 군주정에서 불가결하며, 주권자와 평민 사이에서 완충역을 귀족이 담당한다는 몽테스키외의 주장을 확실히 반박하고 있다. 베카리아를 둘러싼 그룹들은 신분제의 귀족주의적 관행, 예컨대 토지를 영구 불가분 · 불가양으로 하는 관행 등에 대해 특히 적대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같은 관행은 경제 발전과 부의 유통을 저해한다고 주장하였다. 사회에서 불평등이 불가피하고 또 유용하다고 하더라도, 개인적 능력과 공적에 따른 불평등이 아니라 계급 간의 불평등을 유지시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그러한 불평등을 국가의 모든 부문에 순환시키지 않고 한 구역에 한정시키는 것이 타당한가, 그러한 불평등을 끊임없이 파괴 · 갱신하지 않고 그대로 영속시키는 것은 타당한가?

이상의 문제 역시 여기서는 검토하지 않기로 한다.3(커피사유 주)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미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이상의 문제들에 대한 시각이 드러나버린 것 같다. 다만 여기서는 귀족에게 어떠한 형이 적용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점만 고찰하기로 한다. 나의 주장은 최상급의 시민 – 귀족 – 은 최하급의 시민과 동등하게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명예나 부에 따른 모든 구별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법에 의거한 인간의 원초적인 평등을 먼저 상정해야 한다. 법은 모든 인간들에게 똑같이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개개인은 자연 상태에서의 전제주의적 경향을 포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추론될 수 있다. 즉 “인간은 근면할수록 더 큰 명예를 얻으며 그 명예는 자손들에게 상속된다. 보다 축복받고 명예로운 자는 타인보다 더 큰 것을 희망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를 타인보다 상위에 서게 한 그 계약을 위반하는 데 대한 공포감을 타인과 똑같이 느끼도록 해야 한다.”4(커피사유 주) 그러나 자손들에게 상속되는 명예가 불평등을 심화시켜 경쟁 자체를 개인이 포기하도록 하는 결과를 낳아서는 안 된다. 개인의 능력과 공적에 따른 불평등의 허용에 관한 주요 근거는 바로 그러한 불평등이 인간의 욕심을 자극하여 일의 능률과 사회적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유용하다는 점에 있는데, 경쟁 자체를 개인이 포기하면 불평등의 유용성이 사라지므로 더는 불평등이 변호될 수 없기 때문이다.5(원문 주) 여기에서 표명되고 있는 평등주의적 개인주의 사상은 루소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참조. 베카리아의 많은 비판자들은 쥬네브인(루소)의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파치나이는 베카리아를 ‘이탈리아의 루소’라고 칭하였다. 물론 이러한 명칭은 찬사가 아니라 비난의 뜻으로 붙인 것이었는데, 역설적으로 베카리아의 평판을 높이는 데 기여한 셈이다.

물론 그러한 법령이 세계의 어떤 의회에서도 공포된 바 없음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법령은 명백히 사물의 불변적 관계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귀족에 속해 있다고 주장되는 바의 특권을 침해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특권의 부작용을 예방하자는 것이다. 형벌을 회피할 수 있는 모든 길을 차단함으로써, 법을 존중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반론도 제기될 수 있다. 즉 귀족과 평민에게 동등한 형을 과한다 하더라도 그 효과가 실제로 같을 수는 없다. 교육의 차이가 있으며 이름 있는 가문일수록 형벌의 수치심은 더욱 널리 퍼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이렇다. 형벌은 범죄에 의해 사회에 야기된 손해에 의해 양정(量定)되어야지 범죄자의 감수성에 비례하여 내려저서는 안 된다. 범죄의 공적 피해는 범죄자의 신분이 높을수록 더욱 커진다. 형벌이 각 개인에게 미치는 효과는 다양하기 때문에 형벌상의 평등이란 단지 외재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 가문이 입는 수치심은 군주가 범죄자 이외의 다른 가족성원들을 위한 온정(溫情)의 공적 확인을 행함으로써 완화될 수 있다.6(원문 주) 1791년 오스트리아를 위하여 준비된 비망록에서 베카리아는, 귀족들은 명예를 각별히 중시하기 때문에 명예형(pene inframante)을 면제해야 함을 주장함으로써 평등한 형벌에 대한 종전의 주장과 다른 입장을 표명하였다. 자신의 견해를 현실적으로 반영하는 데의 어려움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베카리아와 그의 동료들이 원했던 형법개혁(및 그 한계)과 경제 · 정치 개혁 간의 관계에 대하여는 Drew Humphries and David F. Greenberg. “The Dialetics of Crime Control,” in David F. Greenberg, ed., Crime and Capitalism(Palto Alto, Cal., 1981) 참조. 쉽게 믿고 감탄하는 경향이 있는 대중들에게는 이성보다 그러한 공적 형식이 언제나 더욱 큰 영향을 발휘하리라는 점을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한인섭 역, 『체사레 벡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박영사. 2006. 中

제24장. 무위도식에 대하여

공안을 해하는 자, 법률 – 인간이 서로를 지원하고 방위하는 조건 – 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사회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다. 즉 그는 추방당해야 한다. 노동과 산업의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현명한 정부는 무위도식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7(커피사유 주) 두 가지 관점에서 베카리아의 추방형의 견해에 대하여서는 반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베카리아의 ‘추방형’의 주 근거는 범법자가 사회계약을 위반하였다는 것에 있다. 그런데 사회계약론에서, 각 개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사회계약을 체결하였을 리가 만무하고, 오로지 자신의 최소한의 자유만을 위탁하였으므로, 그 자신이 보호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사회로부터의 추방에 합의하였을 리가 없다. 따라서 사회계약의 위반자에게 대하여 사회계약에 따라 사회에서 추방할 수 있다는 주장은, 없는 계약의 내용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폭력 행위와 다름없다는 점에서 합당한 주장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둘째. 범법자의 명확한 사유나 사연도 들어보지 않고 그 범법자를 추방함으로써 그에게 제공되던 사회의 보호를 빼앗는 행위는 범법자를 공연한 사회의 적으로 영구히 돌리는 행위이다. 공연한 사회의 적이 많아지면 사회에 도움이 될 리가 없으므로, 범법자를 영구히 사회의 적으로 돌리기보다는 그가 사회에 미친 피해를 사회 안에서 배상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완고한 도덕군자들은 이러한 사회에 유해한 무위도식을 근로를 통해 모은 재산을 갖고 누리는 여가와 혼동해왔다. 사실 후자는 사회가 발전하고 행정이 집권화되는 데 따라 필요하고도 유용한 것이다.8(커피사유 주) 그러한 여가 즉, 사치의 경우는 물질적 쾌락과 풍요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근로와 사회 발전의 주요한 동기적 원천이 되므로, 유용하기는 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주된 목적이 되는 것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어떤 사회든지 그 돌아가는 방식이 도덕을 주로 따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사회적 무위도식이라 함은 노동 혹은 재산 중 어느 방법을 통해서도 사회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나태함, 달리 말해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는 종류의 무위를 말한다.9(커피사유 주) 기업의 경영 활동에 참여하는 부자 등은 그 재산을 통하여 사회에 고용을 창출하고 재화 및 용역을 생산하는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 사치가 합리화되지만, 불로소득(부동산 등)을 통하여 사치를 누리는 경우는 이러한 관점에서 마땅히 비난할 만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나태와 무위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천박한 대중들은 어리석은 선망을 갖고 우러러 보지만, 현명한 자라면 경멸감으로 대한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자극제가 되는, 생활 필요물을 보존하고 증진시킬 필요를 갖지 못함으로써, 그들은 강력한 여론의 격정에 자신의 모든 정력을 내맡기게 한다.10(원문 주) 이 장이 (무위도식하는) 정관적 수도원 질서에 반대하는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요셉 2세의 재임 중에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에서 모든 정관적 질서를 폐지하였다. 이 장이 수도사 파치나이의 분노를 특히 자극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자기 조상들의 덕이나 악덕의 과실을 향수하는 자, 근로빈민에게 빵과 생활필수품을 제공하고 그것과 교환하여 현재적 쾌락을 누리는 자는 사회적 의미에서 나태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불확실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폭력을 자행하는 대신 조용한 산업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부를 사용하는 것이다.11(원문 주) 여기서 베카리아는 특히 피에트로 베리에 의해 주창된 계몽주의적 관점, 즉 사치는 바람직하며 경제적 경쟁은 전쟁에 대한 훌륭한 대안이라는 관점을 지지하고 있다. 한편 베카리아의 비판자(예컨대 파치나이)는 이러한 경제적 덕목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으며, 종교적 · 군사적 덕목을 찬미하였다. 후자의 덕목에 대한 찬미는 전통적 엘리트의 특색이기도 하다.12(커피사유 주) 그러나 조상의 불로소득을 그대로 계승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그 사치가 과연 그 사치를 누리는 자의 노동산물이나 사회적, 경제적 기여 효과에 의하여 합리화되는지의 여부는 의문이다. 어떤 종류의 나태함을 처벌할 것인가를 법제화할 것인가하는 점은 소수의 풍속검찰관의 완고하고 속 좁은 도덕 관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률에 의하여 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추방형이 과해져야 할 자는 다음과 같다. 즉 흉악한 범죄로 고발된 자 중에서 범행의 개연성은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는 피의자에 대하여는 추방형을 가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것으로 생각된다.13(커피사유 주) 무죄 추정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내용이라 생각된다. 베카리아도 앞서서 유럽 형법의 폐단을 지적함에 있어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칼같이 적용한 바 있는데, 유독 이 추방형에 관련해서는 허술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 같다. 후속 내용을 통하여 자신의 주장을 비록 합리화하고 있음에도, 유죄의 여부가 확실히 증명되지 않은 사람에 대하여 ‘추방형’이라는 형벌을 부과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적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서도 법률은 필요하다. 그 법률은 가능한 자의성의 여지가 없고 정확할 것이 요구된다. 피의자를 방치함으로써 공포감을 갖고 살아가야하든가 아니면 확증도 없는 상태인데 그를 처벌하는 부정의를 저지르든가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는 경우에, 그 피의자에 대하여 추방형을 과하게 된다.14(커피사유 주) 문장이 이율배반적인 것 같다. 피의자의 방치로 인한 공포감과 유죄가 확정되지 않는 피의자에 대한 처벌을 둘 다 저지를 수 없으므로, 피의자에 대한 처벌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추방형’도 일종의 처벌 내지 형벌임을, 즉 피의자에 의사에 반하는 어떤 사회의 강제 행위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가장 적절한 방법은 추방이 아닌, 공포감 발생을 막기 위하여 피의자의 인신을 일시 구속하되, 그가 무죄로 밝혀진 경우는 상응하는 보상을 지급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법은 피의자에게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신성한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그 증거는 외국인보다는 자국민의 경우에 훨씬 납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며, 상습범보다는 초범의 경우에 훨씬 납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한인섭 역, 『체사레 벡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박영사. 2006.

주석 및 참고문헌

  • 1
    (커피사유 주) 베카리아가 살던 사회 당시에는 귀족 등의 신분제가 유지되고 있었음을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다. 신분제는 폐지된 오늘날, 이 장은 어떤 측면에서 이의가 있을까?
  • 2
    (원문 주) 이 문장은 특권을 누리는 세습귀족층이 군주정에서 불가결하며, 주권자와 평민 사이에서 완충역을 귀족이 담당한다는 몽테스키외의 주장을 확실히 반박하고 있다. 베카리아를 둘러싼 그룹들은 신분제의 귀족주의적 관행, 예컨대 토지를 영구 불가분 · 불가양으로 하는 관행 등에 대해 특히 적대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같은 관행은 경제 발전과 부의 유통을 저해한다고 주장하였다.
  • 3
    (커피사유 주)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미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이상의 문제들에 대한 시각이 드러나버린 것 같다.
  • 4
    (커피사유 주) 그러나 자손들에게 상속되는 명예가 불평등을 심화시켜 경쟁 자체를 개인이 포기하도록 하는 결과를 낳아서는 안 된다. 개인의 능력과 공적에 따른 불평등의 허용에 관한 주요 근거는 바로 그러한 불평등이 인간의 욕심을 자극하여 일의 능률과 사회적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유용하다는 점에 있는데, 경쟁 자체를 개인이 포기하면 불평등의 유용성이 사라지므로 더는 불평등이 변호될 수 없기 때문이다.
  • 5
    (원문 주) 여기에서 표명되고 있는 평등주의적 개인주의 사상은 루소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참조. 베카리아의 많은 비판자들은 쥬네브인(루소)의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파치나이는 베카리아를 ‘이탈리아의 루소’라고 칭하였다. 물론 이러한 명칭은 찬사가 아니라 비난의 뜻으로 붙인 것이었는데, 역설적으로 베카리아의 평판을 높이는 데 기여한 셈이다.
  • 6
    (원문 주) 1791년 오스트리아를 위하여 준비된 비망록에서 베카리아는, 귀족들은 명예를 각별히 중시하기 때문에 명예형(pene inframante)을 면제해야 함을 주장함으로써 평등한 형벌에 대한 종전의 주장과 다른 입장을 표명하였다. 자신의 견해를 현실적으로 반영하는 데의 어려움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베카리아와 그의 동료들이 원했던 형법개혁(및 그 한계)과 경제 · 정치 개혁 간의 관계에 대하여는 Drew Humphries and David F. Greenberg. “The Dialetics of Crime Control,” in David F. Greenberg, ed., Crime and Capitalism(Palto Alto, Cal., 1981) 참조.
  • 7
    (커피사유 주) 두 가지 관점에서 베카리아의 추방형의 견해에 대하여서는 반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베카리아의 ‘추방형’의 주 근거는 범법자가 사회계약을 위반하였다는 것에 있다. 그런데 사회계약론에서, 각 개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사회계약을 체결하였을 리가 만무하고, 오로지 자신의 최소한의 자유만을 위탁하였으므로, 그 자신이 보호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사회로부터의 추방에 합의하였을 리가 없다. 따라서 사회계약의 위반자에게 대하여 사회계약에 따라 사회에서 추방할 수 있다는 주장은, 없는 계약의 내용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폭력 행위와 다름없다는 점에서 합당한 주장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둘째. 범법자의 명확한 사유나 사연도 들어보지 않고 그 범법자를 추방함으로써 그에게 제공되던 사회의 보호를 빼앗는 행위는 범법자를 공연한 사회의 적으로 영구히 돌리는 행위이다. 공연한 사회의 적이 많아지면 사회에 도움이 될 리가 없으므로, 범법자를 영구히 사회의 적으로 돌리기보다는 그가 사회에 미친 피해를 사회 안에서 배상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 8
    (커피사유 주) 그러한 여가 즉, 사치의 경우는 물질적 쾌락과 풍요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근로와 사회 발전의 주요한 동기적 원천이 되므로, 유용하기는 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주된 목적이 되는 것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어떤 사회든지 그 돌아가는 방식이 도덕을 주로 따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 9
    (커피사유 주) 기업의 경영 활동에 참여하는 부자 등은 그 재산을 통하여 사회에 고용을 창출하고 재화 및 용역을 생산하는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 사치가 합리화되지만, 불로소득(부동산 등)을 통하여 사치를 누리는 경우는 이러한 관점에서 마땅히 비난할 만하다고 할 것이다.
  • 10
    (원문 주) 이 장이 (무위도식하는) 정관적 수도원 질서에 반대하는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요셉 2세의 재임 중에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에서 모든 정관적 질서를 폐지하였다. 이 장이 수도사 파치나이의 분노를 특히 자극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 11
    (원문 주) 여기서 베카리아는 특히 피에트로 베리에 의해 주창된 계몽주의적 관점, 즉 사치는 바람직하며 경제적 경쟁은 전쟁에 대한 훌륭한 대안이라는 관점을 지지하고 있다. 한편 베카리아의 비판자(예컨대 파치나이)는 이러한 경제적 덕목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으며, 종교적 · 군사적 덕목을 찬미하였다. 후자의 덕목에 대한 찬미는 전통적 엘리트의 특색이기도 하다.
  • 12
    (커피사유 주) 그러나 조상의 불로소득을 그대로 계승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그 사치가 과연 그 사치를 누리는 자의 노동산물이나 사회적, 경제적 기여 효과에 의하여 합리화되는지의 여부는 의문이다.
  • 13
    (커피사유 주) 무죄 추정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내용이라 생각된다. 베카리아도 앞서서 유럽 형법의 폐단을 지적함에 있어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칼같이 적용한 바 있는데, 유독 이 추방형에 관련해서는 허술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 같다. 후속 내용을 통하여 자신의 주장을 비록 합리화하고 있음에도, 유죄의 여부가 확실히 증명되지 않은 사람에 대하여 ‘추방형’이라는 형벌을 부과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적이라고 생각된다.
  • 14
    (커피사유 주) 문장이 이율배반적인 것 같다. 피의자의 방치로 인한 공포감과 유죄가 확정되지 않는 피의자에 대한 처벌을 둘 다 저지를 수 없으므로, 피의자에 대한 처벌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추방형’도 일종의 처벌 내지 형벌임을, 즉 피의자에 의사에 반하는 어떤 사회의 강제 행위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가장 적절한 방법은 추방이 아닌, 공포감 발생을 막기 위하여 피의자의 인신을 일시 구속하되, 그가 무죄로 밝혀진 경우는 상응하는 보상을 지급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