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1. 2024. 12. 21. ~ 2025. 1. 1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짧게 노트에 휘갈긴 것을 그대로 옮겨두는 공간입니다.
#1.
… 한 학기가 지나가 버리고서야 이제 비로소 펜을 들어 쓴다. 내가 게으른 탓일 게다. 의욕이 없었거나, 아니면 생각이 너무 많았거나. … 변명이라도 좀 남겨두기로 할까. 학기는 그럭저럭 잘 마무리했지만 외적인 결과와는 별개로 내적 갈등은 여전했다. 여기가 아닌 다른 나의 기록 창구에 기록해둔 바와 같이, 지난 여름방학 기간에 격렬하게 악화되어 마치 목에 올가미라도 걸린 듯한 갑갑함과 숨막힘을 동반하는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못 견디고 결국 상담사의 도움을 ‘또’ 구했다. 결과적으로는 장 · 단점이 모두 있었다. 장점이라면 적어도 올가미가 걸린 듯한 그 격렬한 공포 그리고 고통의 원인은 찾아내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 근본적인 해결은 나 자신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는 점일 게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스스로의 내면을 나 자신이 아니라면 그 누가 해부하고 처치할 수 있겠는가?)
… 여튼, 거두절미하자면 연구실이 문제였다. 그동안 지독하게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연구실에서의 연구 활동이 장기간 한계에 봉착하며 나 스스로가 진퇴양난의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2년을 끌어온 연구, 그래, ‘기술적 문제’. 즉 계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스크립트와 정확성 사이를 오가는 싸움……. 지극히 고독한, 따라서 정말 시리도록 추웠던 싸움. 교수는 선행 연구자가 있는데 왜 논문 재현조차 제대로 하나 못 하냐면서 압박을 주고 이제는 관심도 없는 듯하다. 필시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이겠지만 (내면은 절대 아니라고 절규하고 있지만 이렇게 말하는 페르소나1심리학적 용어로서의 ‘페르소나’이지만, 동명의 게임 시리즈 중 《페르소나 5》의 이미지를 떠올려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가 필요한 현실의 비애를 이제 나는 이해한다.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그 선배와의 단 한 번 뿐이었던 만남은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래, 솔직히 이해할 수 있긴 했다. 같은 자리에 오래 있다 보면 환상이 깨지고 냉혹한 현실이 보이는 법이니까. 교수는 냉혹했고 (물론 스파르타식 강행군, 최고를 염두하는 사람이며 그 이상만큼은 존경해마지 않으나 인간적으로는…….) 연구실 선배들은 친절했으나 침묵했으니 (안다. 그 선배들도 자기 연구 이외에는 잘 모르고 내 하소연을 그렇다고 모두 들어줄 시간도 없다. 대학원생은 교수의 온갖 잡다한 부탁부터 행정 업무에 이르기까지 연구 외적 영역에 속하는 수많은 자질구레한 것들도 감당해야 함을 알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따라서 이런 연구실에 질식한 그 선배가 왜 교수와 다투고 뛰쳐나갔는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 선배와 교수 둘 사이의 암묵적인 앙금이 남았으니 나였어도 연구의 핵심 자료는 줄 리가 없었다……. (교수는 그 뛰쳐나가 옆 연구실로 간 선배를 배신자로 취급했다)
모두가 죄가 없음을 알기에, 단지 뒤틀린 운명과 부족한 내 능력만이 있음을 알기에 나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성과를 내지 못하는 학부연구생, 4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결과를 뽑아낼 수 있기를 기대할 것이냐, 아니면 이제 모든 것을 끝낼 때인가, 그 양자택일의 선택.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그러나 애써 부정해왔던 극명하고 추악하며 고통스럽고 그렇기에 가장 인간적인 현실 앞에서 선택해야 한다. 나는 겨우 지금에서야 직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선택하기를 주저한다. 당장 23일에 본가로 내려감에도 아직 교수와 연락을 시도하지도 못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오해는 더 쌓인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어려운 선택이 내 앞에 장엄하게 놓여 있으며, 여전히 나는 내 능력의 부족함을 탓하고 있다.
… 니체 사상에서 내가 ‘죄와 죄책감’에 주목했던 것, 그리고 게임 《OMORI》에서 주인공의 전반적인 서사에 그렇게나 이입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이러한 아슬아슬한 배경 위에 서 있다. 대학에서 심리 상담은 물론이거니와 철학, 그리고 수많은 사색을 통해 나는 고등학교 시스템에 치명적인 트라우마를 가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주지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정의 위기와 조기졸업을 둘러싼 시기와 암투, 그 속에서 여러 가치관의 충돌 그 모든 것들을 겪고 떠밀려오듯 쫓겨난 듯 졸업한 공간이 고등학교였으니 말이다. (COVID-19 덕에 졸업식도 대충 했다. 당시 TV를 통해 각 학급에 찢어져 있던 학생들 앞에서 흘러나오던 교장의 연설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게 나에게는 오히려 매우 다행이었다.) 고등학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깊게 상처받은 정신은 적게 알기를, 덮어두기를, 그리고 페르소나 위에서 기꺼이 거짓 웃음을 가식적으로 짓는 편을 선택했다. 그래, 환상 속에 사는 써니2Sunny. 게임 《OMORI》의 주인공 이름이다.와 현실을 여전히, 가장 중요한 현실을 거부하는 나는 그렇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죄책감, 한(恨), 영혼 깊은 곳까지 새겨진 이 아픔, 시리도록 추운 이 계절의 한 가운데서 소리 높여 울부짖되 듣는 이 하나 없는 그 공허한 외마디 비명. 그래서 여전히 나는 철학과 정신분석학에 정신을 집중할 뿐이지 여전히 ‘문을 열고 나갈’ 용기를 못 내고 있다.
…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미련함이 있다면 그것은 내 능력의 부족일 것이요, 탓할 것이 있다면 이 비루한 운명지천(運命之天)을 탓할 뿐이다. (전적으로 니체적 의미에서) 이것이 나를 견디기 힘들게 한다. 알베르 카뮈가 말한 부조리를 나는 절실히 느끼니,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내게 있기를 바라니. 이제 카뮈 당신이 어떤 심정으로 《시지프 신화》의 그 대목을3이 모든 정신을 서로 이어 주는 깊은 혈연을 어떻게 느끼지 못하겠는가! 그 정신들이 어떤 특별하고 쓰라린 한 곳으로, 더 이상 희망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한 곳으로 무리 지어 모인다는 것을 어떻게 모르겠는가? 나는 모든 것이 내게 설명되기를, 만약 그러지 못하다면 무(無)를 원한다. 그런데 마음속의 절규 앞에서 이성은 무력하다. 이 요청에 깨어난 이성은 답을 찾지만 발견하게 되는 것은 모순과 억설(臆說)뿐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세계는 이러한 비합리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이 세계의 유일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이 세계는 그것 자체만으로는 엄청난 비합리 덩어리에 불과하다. 단 한 번이라도 “이건 분명하다.”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구원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열망뿐인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아무것도 분명한 것이 없고 모두가 혼돈이며 인간이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그의 통찰력과 그를 에워싸고 있는 벽에 대한 명확한 인식뿐임을 공언한다.
이 모든 경험이 서로 부합하고 일치한다. 궁극적 한계점에 도달한 정신은 판단을 내리고 결론을 택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자살과 대답이 자리 잡는다. 그러나 나는 탐구의 순서를 뒤집어서 지적 모험에서 출발해 일상적인 동작으로 되돌아오고자 한다. 여기 열거한 경험들은 사막에서 태어난 것이므로 우리는 그 사막을 떠나서는 안 된다. 적어도 이 경험들이 과연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노력이 그 정도에 이르면 인간은 비합리와 마주하게 된다. 그는 자신 속에서 행복과 합리에의 욕구를 느낀다.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바로 이것에 매달려야 한다. 생의 결론이 송두리째 그것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합리와 인간의 향수 그리고 그 두 가지 대면에서 솟아나는 부조리, 이것이 바로 한 실존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논리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끝나게 되어 있는 드라마의 세 등장인물이다.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48-49. 썼는지 그 이해가 조금은 깊어진 듯 한데……. 아, 검은 개.4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보수당 출신의 총리로서 영국을 승전으로 이끈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자신의 우울증을 ‘검은 개(Black Dog)’이라고 부르면서 이미지화하곤 했다. 나는 이 시가를 좋아했으며 키가 조금 작았던, 그러나 그 정신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컸던 이 사람이 평생 동안 절망과 싸움을 벌여왔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망설이고 있다.
#2.
본가에 2주 내려간 동안 많은 생각들을 했다. 나는 두 가지 계기가 스스로를 바꾸어놓았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하나는 이 을사년 연초까지 이어지고 있는 12 · 3 비상계엄 사태의 여파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인간이 공유하는 최소한의 분모였다. 괴짜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대외적 관계보다는 스스로의 호기심과 내적 모순을 직시하는 것을 중시하는 나 자신이 자연히 비관적으로 바라보던 세계, 암묵적으로 〈거리의 파토스〉5니체는 ‘다른 것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새로이 확대하고자 하는 열망, 보다 높고 보다 희귀한 상태로 가려는 열망’을 〈거리의 파토스〉라 정의했다:
무엇이 ‘좋음’인가에 대한 판단은 ‘호의’를 받은 사람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판단은 ‘좋은(탁월한)’ 인간들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즉 모든 저급한 자, 열등한 자, 범속한 자, 천민적인 자들에 비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좋은(탁월한) 것’으로서, 즉 최상의 것으로 느끼고 평가하는 고귀한 자, 강한 자, 드높은 자, 고매한 자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거리의 파토스에서 가치를 창조하고 그것의 이름을 새길 권리를 비로소 획득하게 되었다.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박찬국 역, 아카넷, 2021. pp. 33-34.
‘인간’이라는 유형을 향상시키는 모든 일은 지금까지 귀족적인 사회의 일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그렇게 반복될 것이다 : 이와 같은 사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위계질서나 가치 차이의 긴 단계를 믿어왔고 어떤 의미에서 노예제도를 필요로 했다. 마치 혈육화된 신분 차이에서, 지배 계급이 예속자나 도구를 끊임없이 바라다보고 내려다보는 데서, 그리고 복종과 명령, 억압과 거리의 끊임없는 연습에서 생겨나는 거리의 파토스(das Pathos def Distanz)가 없다면, 저 다른 더욱 신비한 파토스, 즉 영혼 자체의 내부에서 점점 더 새로운 거리를 확대하고자 하는 요구는 전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점점 더 높고 점점 드물고 좀더 멀리 좀더 폭넓게 긴장시키는 좀더 광범위한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간단히 말해 ‘인간’이라는 유형의 향상이자 도덕적 형식을 초도덕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지속적인 ‘인간의 자기 극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 김정현 역, 책세상, 2002. p. 271.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격, 계층과 계층 사이의 간격, 유형의 다수성,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고자 하는 의지, 내가 거리를 두는 파토스(Pathos def Distanz)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강한 시대의 특성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우상의 황혼(Götzen-Dämmerung)》. 백승영 역, 책세상, 2002. p. 176.를 도입하여 다른 부류의 것으로 외부와 자신을 분리, 따라서 스스로를 방어하려던 심리 기제의 가운데에서도, 그 비관성 사이에서도 다른 이들과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감각이 매우 따뜻했던 것이다. 둘째는 지난 여름에 플레이하고 이제 2월 독서 모임에서 곧 다루게 될 《OMORI》였다. 이미 작년 말에 고백했듯 주인공의 서사에 나를 동일시하는 묘한 경험을 한 이래로, 이들 경험 모두가 기존에 나 자신이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해왔던 논리적 · 합리적 사유 방식으로는 온전히 포착될 수 없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한 ― 달리 표현하자면 스스로의 내적 모순을 직시하려는 것에서 도망치지 않기 위한 ― 다른 방식의 접근을 신년부터 시도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나의 방식은 모두 바깥을 통해 나 자신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이었다. 내가 외부 사물 · 사람 · 사상들과 상호작용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반대 · 투쟁 · 비판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 찬동 · 옹호 · 동의하기도 하는 모습으로부터 나는 스스로의 호오(好惡)가 무엇이며 세계를 내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고 어떤 것들을 귀중하게 여기는지 이해하려는 쪽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오랜 고독하고 힘겨운 (그러나 후회는 없다) 대학 생활, 정신적 위기와 코너에 몰린 느낌을 받는 일상이 반복됨에 따라 나는 암암리에 이상화된 나 자신이 아닌, 실재하는 나 자신을 파악하는데 집중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인상을 품게 되었고 ― 따라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해 방향을 반대로 바꾸어, 스스로의 안을 즉 외부 사물과 나 자신 간의 상호작용이 아닌, 정신분석학이 드러내고자 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해보고자 한다. 그러니 나는 지금 나 자신에 대해 의식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는 셈이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이 질문에 온전히 대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졸업과 대학 이후의 진로 계획을 생각하는 나 자신에게 있어서 이 시도는 운명이라고 할 만 하겠다.
추신: 프로이트, 그리고 라캉을 공부할수록 조금씩 ‘나’의 존재가 서 있는 위태로운 기둥이 점차 선명해지는 듯하다. ―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인간 정신의 심연으로 내려감에 따라 나는 보다 생생히 목도하는 셈이다.
#3.
“심연으로 내려가기.”
하루 전의 두서없는 일기에 써둔 바와 같이 (2주일 째 이어지는 코감기로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한 몽롱한 상태에서의 결과물이었다) 2025년에 내가 스스로 주요하게 목표하는 바 중 하나는 정신분석학을 이용해 스스로의 내면 구조를 깊게 파악하는 것이다.
이 일은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2차 정신 모델을 빌려 말한다면 이드(id)를, 라캉을 빌린다면 실재계를(물론 그의 견해대로 아마 나는 상징계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실재의 회귀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여전히 내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OMORI》를 빌려 말한다면 〈Black World〉를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사회 통념과 도덕이 용납하지 않을 원초적 욕망을 직시해야 할 수도 있으며, 트라우마의 잔혹한 진실을 알게 되는 《OMORI》의 주인공처럼 나 자신이 스스로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즉 위태로운 의식 · 믿음의 기둥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음을 안다.
그러나 어제 저녁 상담사에게도 이야기했으며 2024년 연말정산 독서 모임에서도 논의하였듯 나는 인간은 모순 속에서 사는 존재이며 그 부조리를 직시하는 것의 중요성을 마지막까지 논한 알베르 카뮈의 문장을 기억한다.6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살아가는 나날 동안 줄곧 끊이지 않고 따라다니며 둔탁하게 울리는 이 소리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 이 소리는 꼭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니체는 “하늘에서 그리고 땅 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같은 방향으로 복종하는 일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결과 마침내는 카령 덕, 예술, 음악, 무용, 이성, 정신과 같은, 이 땅에서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 모습을 바꾸어 놓는 그 무엇, 무엇인가 세련되고 광적인 혹은 신성한 그 무엇이 생겨난다.”라고 썼는데, 그는 그 말로써 위대한 풍모의 모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부조리한 인간이 가는 길을 보여 준다. 불꽃에 복종한다는 것, 그것은 가장 쉬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따금 어려움에 맞서서 겨루어 봄으로써 자신을 판단하는 일은 유익하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기도는 생각 위로 밤이 올 때 하는 것이다.”라고 알랭은 말한다. 이에 대하여 신비주의자들과 실존주의자들은 대답한다. “그러나 정신은 밤을 만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감은 눈 밑에서 오직 인간의 의지에 의해 생겨나는 밤, 정신이 그 속으로 빠져들기 위해 불러일으키는 캄캄하고 닫힌 밤은 아니다. 만약 정신이 밤을 만나야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맑은 정신을 간직한 절망의 밤, 극지(極地)의 밤, 정신이 깨어 있는 밤, 하나하나의 대상이 지성의 불빛 속에서 또렷이 보이는 희고도 때 묻지 않은 광명이 비쳐 올 밤이어야 한다. 이 정도에 이르면 등가성은 열정적인 이해와 만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실존적 비약을 비판하는 것 따위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세기에 걸친 인간적 태도들을 보여 주는 벽화 속 제자리로 되돌아갈 것이다. 관객이 볼 때 ― 그 관객의 의식이 또렷하다면 ― 이 비약 또한 부조리하다. 비약은, 그것이 역설을 해소시킨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바로 역설을 고스란히 되살려 놓는다. 이 점에서 비약은 감동적이다. 이 점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되찾고 부조리의 세계는 휘황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그러나 가던 걸음을 멈추고 정지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단 한 가지 보는 방법에 만족한 채 모든 정신적 힘들 중에서 가장 미묘한 힘인 모순 없이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것은 다만 어떤 사고 방식을 정의한 데 불과하다. 이제부터는 실제로 사는 문제가 남아 있다.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97-98. 그렇다. 나는 스스로가 외부 · 내부와 대면하면서 얻어지는 긴장을 회피하고 싶지는 않다. 도덕성 그리고 사회적 명성 ― 즉, 비겁하다는 평가가 두렵다기보다는, 스스로가 인정한 인간의 본래적 성질(또는 아마도, 운명?)로부터 도피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이것은 일종의 저주이자 사랑으로, 위험한 불꽃의 밝은 빛에 매료되어 죽음으로 걸어들어가는 자의 행보일 것임을 안다. 그러나 내가 인간의 바로 이러한 점을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흥미로운 인간 정신의 구조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달리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 최근 읽고 있는 (2월 ‘날적이’ 독서 모임을 준비하기 위해서 말이다) 김석 교수의 《무의식으로의 초대》의 내용에 따르면, 앞으로 나는 억압되었던 표상들과 그것이 결부된 기억이나 정동(이렇게 말하면 프로이트식이다), 또는 상징계의 본성으로 인해 운명적으로 발생하는 주체의 실재에 대한 소외의 구체적인 양태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경우는 라캉 식이다)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의식이 접근하지 못하는 영역, 일반적인 사유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이 영역을 호기롭게도 나는 탐구의 대상으로 올려두긴 했지만 그 구체적인 방법은 지금까지 내가 해 오던 방법과는 분명히 다르다. 여태껏 나는 이공학도로서 외부 사물들의 표상 – 표상 간 관계들을 파악하고 조직화하는 연습들을 해 왔다면 (과학은 근본적으로 상징계 상의 것일테다) 이제는 외부 사물들이 스스로에게 어떻게 반영되는 것이며 나 자신이 인식할 수 없는 영역에서의 일들을 확인하고 분석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주목한 꿈에 어쩌면 나도 주목해서 그의 《꿈의 해석》에서의 작업과 유사한 작업들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라캉과 호프스태터7《괴델, 에서, 바흐》의 저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를 말한다.가 주목한 말실수에 주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껏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나도 모르게’의 작용들을 이제는 그저 그대로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거대한 우물 저 아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나는 기꺼이 뛰어들려고 하기에, 숨을 충분히 골라야 한다. 《OMORI》에서의 〈검은 문〉들과 그 내부의 〈무언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끔찍한 기억들을 다시 한 번 고통스럽게 다시 내 앞에 두고서 해부해야 할 지도 모른다. 분명히 나는 수많은 오류를 범할 것이며 종종 착각에 빠질 것이다. 이것들 모두가 내가 사랑하는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러나 제대로 한 번 스스로의 ‘빙산의 일각’을 살펴보는 경험에는 죽기 전에 해 볼 가치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살아가는가? 또, (라캉에 의하면)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은 얼마나 아이러니하게도 위대하면서 비참한 존재인가? 그 동안 무시해왔거나 중요치 않다고 여겼던 ‘마음의 영역’에 나의 시선이 가 닿음에 따라, 이제 나는 졸업 논문 및 대학 이후의 진로 설계와 더불어 나 자신의 삶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 위에 서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 그래, 카뮈의 말대로, “이제부터는 실제로 사는 문제가 남아 있다.”
#4.
“정신분석학 · 페미니즘 · 예술.”
조금 전 동시에 읽어내리고 있던 책 세 권 중 한 권을 다 읽었다. 김석 교수 저, 《프로이트 & 라캉 ― 무의식으로의 초대》가 바로 그 다 읽은 도서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동시에 내가 읽은 다른 두 권의 책 ― 데버라 캐머런 저, 《페미니즘》 그리고 4년 내내 읽어오고 있는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와 일종의 운명적인 연결성을, 나아가 반년 전 여름방학 당시 내가 플레이한 바 있으며 다음 달의 독서 모임 주제이기도 한 게임 《OMORI》, 9월에 읽었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지난 대학의 3년 동안 나 자신이 간간히 살펴본 니체의 여러 철학적 산물들과의 기이한 연상의 존재를 직감했다.
… 지난 8월의 독서모임에서 니체를 다시 읽은 경험이 하나의 기폭제가 되어 스스로의 사상적 성장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2월의 모임에서 게임 《OMORI》의 주제의식과 예술성을 프로이트 · 라캉 등의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으로 살펴보는 것이 중대한 사유의 전환점 내지는 변곡점이 될 것만 같다. 나는 마치 지금까지의, 즉 대학이라는 이 토양 위에서의 나의 모험이 여기로 모두 이어지는 듯한 야릇한 느낌을 받는다.
부분적으로 이 기시감은 정신분석학에서 특히 라캉의 주요 개념들이, 이전까지 내가 접한 사상 개념들 중 무엇들에 대응되는 것 같다는 직감에 기대고 있다. 이를테면 라캉의 〈죽음 충동〉은 주체가 언어의 구조에 의하여 상징계로부터 분리되었기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결여를 적극적으로 채우고자 하는 충동이라는 점에서 카뮈가 쓴 《시지프 신화》에서 언급되는 〈부조리를 직시하는 인간〉의 충동 그리고 니체가 《도덕의 계보》 세 번째 논문에서 지적한 인간의 〈마조히즘적인 금욕주의 성향〉(달성할 수 없는 것, 본성에 반하는 것을 우상으로 · 이상으로 삼고서 스스로가 도달하지 · 이르지 못함을 힐책하며 이 과정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는…….)을 떠올리게 했고, 특히 라캉이 지적하는 상징계 – 실재계의 격리(또는, 분리)는 밀란 쿤데라의 〈키치〉가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경험을 선사했다. 프로이트 · 라캉 모두 인간 정신을 다층 · 다원적 구조 · 계층을 가져와서 설명한다는 점은 호프스태터의 ‘인간 정신의 계층적 구조’ 주장은 물론이거니와 《OMORI》에서 등장하는 네 개의 공간: 현실(써니의 세계, 그러나 작중 연출에서 문이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그에게 문이 ‘보이지 않듯’ 시니피앙(signifiant) 위에서 재구성된 세계), 꿈 속 세계(오모리가 친구들과 모험하는, 실재로부터는 분리된 기호와 심상의 세계), 하얀 방(휴지, 검은 전구, 괴상망측한 그림들 ― 실은 실재가 튀어나온 것이지만), 그리고 실재하는 검은 세계(Black World)를 떠올리게 했다. 여러 층위 사이에서 반복되는 이 구조들은 어느 층위에서 보느냐에 따라 결부되는 시니피에(signifié)가 달라짐에 따라 예술적 표현 · 연출들을 다시금 불러와 앞에 세웠다. 그러한 연상과 체험을 통해 주체로부터 소외된 실재계와 접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라캉의 정신 그리고 예술에 대한 담론 일체가, 지난 8월 나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과 그 과정에서 동반되었던 정서 · 정동들을 생각나게 했던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통념적인 도덕 관념에서는 민망하거나 금기시되는 남 · 여성의 성적 신체 구조라던가 성적 취향들을 기꺼이 논의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는 점, 특히 그 과정에서 성(Sexuality)의 후천적 결정에 대해 논의하는 부분은 캐머런의 《페미니즘》에서 읽은, 차이란 무엇이며 평등 · 차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고민해보게 하는 대목들, 그리고 성별차에 따른 (주로 여성이 겪는) 차별을 폐지하고자 하며 구체적 · 실질적인 일상 부분에서의 개혁을 통해 이를 달성하고자 하는 페미니즘 사조와 관련해서 수많은 생각거리들을 제공해주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당초 전혀 독서 모임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성의 형성, 즉 성적 정체성이 결정되는 과정이 선천적 / 후천적인지의 여부도 논의의 대상으로 올릴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은 셈이다.
결과적으로, 신년 주요 목표로 세운 〈정신분석학을 이해하기〉라는 목표는 착수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벌써 그 시초부터 내 정신이 가닿을 수 있는 영역을 크게 넓혀주고 있는 듯하다. 이제 입문서를 다 읽었을 뿐 구체적으로 각각의 정신분석학자들의 주장 · 이론들을 살펴보지는 않은 상태이나,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야기가, 그리고 그들이 가졌던 문제 의식이 나에게 새로운 〈식인의 욕구〉를 강력하게 불러 일으키고 있음은 확실해 보인다.
Appendix.
#1.
#2.
주석 및 참고문헌
- 1심리학적 용어로서의 ‘페르소나’이지만, 동명의 게임 시리즈 중 《페르소나 5》의 이미지를 떠올려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 2Sunny. 게임 《OMORI》의 주인공 이름이다.
- 3이 모든 정신을 서로 이어 주는 깊은 혈연을 어떻게 느끼지 못하겠는가! 그 정신들이 어떤 특별하고 쓰라린 한 곳으로, 더 이상 희망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한 곳으로 무리 지어 모인다는 것을 어떻게 모르겠는가? 나는 모든 것이 내게 설명되기를, 만약 그러지 못하다면 무(無)를 원한다. 그런데 마음속의 절규 앞에서 이성은 무력하다. 이 요청에 깨어난 이성은 답을 찾지만 발견하게 되는 것은 모순과 억설(臆說)뿐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세계는 이러한 비합리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이 세계의 유일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이 세계는 그것 자체만으로는 엄청난 비합리 덩어리에 불과하다. 단 한 번이라도 “이건 분명하다.”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구원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열망뿐인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아무것도 분명한 것이 없고 모두가 혼돈이며 인간이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그의 통찰력과 그를 에워싸고 있는 벽에 대한 명확한 인식뿐임을 공언한다.
이 모든 경험이 서로 부합하고 일치한다. 궁극적 한계점에 도달한 정신은 판단을 내리고 결론을 택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자살과 대답이 자리 잡는다. 그러나 나는 탐구의 순서를 뒤집어서 지적 모험에서 출발해 일상적인 동작으로 되돌아오고자 한다. 여기 열거한 경험들은 사막에서 태어난 것이므로 우리는 그 사막을 떠나서는 안 된다. 적어도 이 경험들이 과연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노력이 그 정도에 이르면 인간은 비합리와 마주하게 된다. 그는 자신 속에서 행복과 합리에의 욕구를 느낀다.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바로 이것에 매달려야 한다. 생의 결론이 송두리째 그것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합리와 인간의 향수 그리고 그 두 가지 대면에서 솟아나는 부조리, 이것이 바로 한 실존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논리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끝나게 되어 있는 드라마의 세 등장인물이다.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48-49. - 4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보수당 출신의 총리로서 영국을 승전으로 이끈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자신의 우울증을 ‘검은 개(Black Dog)’이라고 부르면서 이미지화하곤 했다. 나는 이 시가를 좋아했으며 키가 조금 작았던, 그러나 그 정신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컸던 이 사람이 평생 동안 절망과 싸움을 벌여왔음을 짐작하게 된다.
- 5니체는 ‘다른 것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새로이 확대하고자 하는 열망, 보다 높고 보다 희귀한 상태로 가려는 열망’을 〈거리의 파토스〉라 정의했다:
무엇이 ‘좋음’인가에 대한 판단은 ‘호의’를 받은 사람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판단은 ‘좋은(탁월한)’ 인간들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즉 모든 저급한 자, 열등한 자, 범속한 자, 천민적인 자들에 비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좋은(탁월한) 것’으로서, 즉 최상의 것으로 느끼고 평가하는 고귀한 자, 강한 자, 드높은 자, 고매한 자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거리의 파토스에서 가치를 창조하고 그것의 이름을 새길 권리를 비로소 획득하게 되었다.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박찬국 역, 아카넷, 2021. pp. 33-34.
‘인간’이라는 유형을 향상시키는 모든 일은 지금까지 귀족적인 사회의 일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그렇게 반복될 것이다 : 이와 같은 사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위계질서나 가치 차이의 긴 단계를 믿어왔고 어떤 의미에서 노예제도를 필요로 했다. 마치 혈육화된 신분 차이에서, 지배 계급이 예속자나 도구를 끊임없이 바라다보고 내려다보는 데서, 그리고 복종과 명령, 억압과 거리의 끊임없는 연습에서 생겨나는 거리의 파토스(das Pathos def Distanz)가 없다면, 저 다른 더욱 신비한 파토스, 즉 영혼 자체의 내부에서 점점 더 새로운 거리를 확대하고자 하는 요구는 전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점점 더 높고 점점 드물고 좀더 멀리 좀더 폭넓게 긴장시키는 좀더 광범위한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간단히 말해 ‘인간’이라는 유형의 향상이자 도덕적 형식을 초도덕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지속적인 ‘인간의 자기 극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 김정현 역, 책세상, 2002. p. 271.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격, 계층과 계층 사이의 간격, 유형의 다수성,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고자 하는 의지, 내가 거리를 두는 파토스(Pathos def Distanz)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강한 시대의 특성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우상의 황혼(Götzen-Dämmerung)》. 백승영 역, 책세상, 2002. p. 176. - 6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살아가는 나날 동안 줄곧 끊이지 않고 따라다니며 둔탁하게 울리는 이 소리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 이 소리는 꼭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니체는 “하늘에서 그리고 땅 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같은 방향으로 복종하는 일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결과 마침내는 카령 덕, 예술, 음악, 무용, 이성, 정신과 같은, 이 땅에서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 모습을 바꾸어 놓는 그 무엇, 무엇인가 세련되고 광적인 혹은 신성한 그 무엇이 생겨난다.”라고 썼는데, 그는 그 말로써 위대한 풍모의 모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부조리한 인간이 가는 길을 보여 준다. 불꽃에 복종한다는 것, 그것은 가장 쉬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따금 어려움에 맞서서 겨루어 봄으로써 자신을 판단하는 일은 유익하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기도는 생각 위로 밤이 올 때 하는 것이다.”라고 알랭은 말한다. 이에 대하여 신비주의자들과 실존주의자들은 대답한다. “그러나 정신은 밤을 만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감은 눈 밑에서 오직 인간의 의지에 의해 생겨나는 밤, 정신이 그 속으로 빠져들기 위해 불러일으키는 캄캄하고 닫힌 밤은 아니다. 만약 정신이 밤을 만나야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맑은 정신을 간직한 절망의 밤, 극지(極地)의 밤, 정신이 깨어 있는 밤, 하나하나의 대상이 지성의 불빛 속에서 또렷이 보이는 희고도 때 묻지 않은 광명이 비쳐 올 밤이어야 한다. 이 정도에 이르면 등가성은 열정적인 이해와 만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실존적 비약을 비판하는 것 따위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세기에 걸친 인간적 태도들을 보여 주는 벽화 속 제자리로 되돌아갈 것이다. 관객이 볼 때 ― 그 관객의 의식이 또렷하다면 ― 이 비약 또한 부조리하다. 비약은, 그것이 역설을 해소시킨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바로 역설을 고스란히 되살려 놓는다. 이 점에서 비약은 감동적이다. 이 점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되찾고 부조리의 세계는 휘황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그러나 가던 걸음을 멈추고 정지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단 한 가지 보는 방법에 만족한 채 모든 정신적 힘들 중에서 가장 미묘한 힘인 모순 없이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것은 다만 어떤 사고 방식을 정의한 데 불과하다. 이제부터는 실제로 사는 문제가 남아 있다.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97-98. - 7《괴델, 에서, 바흐》의 저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