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2. 2025. 1. 12. ~ 2025. 1. 3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2. 2025. 1. 12. ~ 2025. 1. 31.

2025-02-01 0 By 커피사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짧게 노트에 휘갈긴 것을 그대로 옮겨두는 공간입니다.


#1.

“주이상스(Jouissance).”

어제부터 하루종일 라캉의 〈주이상스(Jouissance)〉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김석 교수는 《프로이트 & 라캉: 무의식으로의 초대》에서 이 〈주이상스〉를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과 연계하고 있다. 라캉의 용례상 〈주이상스〉란 쾌락 원리를 ‘넘어서는’ 쾌락이라는 점, 그리고 고통 · 싫음의 감정을 최대한 자신의 안에 적게 두려고 하기에 방출하게 되는 원리라고 할 수 있을 쾌락 원리를 ‘넘어선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삶의 지각 가능한 세계의 법칙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기에 교수의 해석은 그럭저럭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분명히 주지하였듯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은 모든 감각 · 정동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 상태 즉 생물학적 사망이라는 형태로써 쾌락 원리의 극단을 추구하는 한편, 라캉의 〈주이상스〉는 영원히 채울 수 없을 결여를 향하는, 즉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하는 과정의 고통을 즐기는 마조히즘적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니체는 이 마조히즘적 광경,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모습을 금욕주의적 이상에 사로잡힌 것 즉 우상의 황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로 보겠지만, 니체를 적극적으로 추종해왔음에도 《시지프 신화》에서 결국 굴러떨어져 원점으로 돌아올라갈 바위를 밀어올리는 시지프스를, 타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불 속으로 날아 들어가는 봉황의 설화를 나는 계속 생각하게 된다.

《괴델, 에셔, 바흐》를 통해 나는 20세기에 수학의 완전성은 끝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충분히 강력하며 무모순인 형식체계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까. 위험함을 알면서도 한 가지 유추를 하자면, 이 정리의 의미를 만약 우리가 ‘자기 지시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구조 · 체계로는 포착할 수 없는, 또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로 해석할 수 있다면, 어쩌면 라캉이 말한 실재계 – 상징계를 가르는 영원한 단절도 바로 이 정리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심연을 들여다본다.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 아래로, 점점 더 아래로 가라앉음에 따라, 정신 구조의 가닿기 힘든 바닥을 향해 애처롭게 헤엄침에 따라, 나는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 즉 인간의 정신으로 우리의 내면으로 포착할 수 없는, 그리하여 결여된 〈무언가〉에 더욱 가까워지는 듯 하며, 곳곳에서 그러나 동시에 아른거리듯 먼 바로 그 〈무언가〉를 향한 불꽃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만 같다.

여기서 나는 부득이 니체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반대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물론 여기서 내가 피안을 상정하려는 것, 즉 나 자신의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재단하고 내려치는 공간을 상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니체가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그 신대륙의 대지 위에서 오직 스스로의 주관에 의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며 호적수들과 대적하는 즐거움을 말할 때, 그는 말 그대로 인간의 한계를 믿지 않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라캉에 의한다면 언어의 구조에 사로잡힌 주체는 상징계의 서로 미끄러지는 시니피앙-시니피에 위를 걷는 존재이기에, 그리고 바로 그 언어야말로 대상을 재단하는 본성적 원리를 가지기에, 나의 이 위험하고 야릇한 유추처럼 그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며 그 영역에 대한 향수를 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인간을 원래부터 기다리던 〈무언가〉가 아닐까.

그러나 불가능을 향하는 인간,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한 번 더 기꺼이 밀어올리는 이 인간의 정신, 끝없이 되풀이되는 의미와의 싸움, 잃어버린 대상을 향한 포효와 그 허망함을 채우기 위한 필사의 생(生). 삶을 산다는 것은 그렇기에 본질적으로 〈주이상스〉에 따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들, 그런 위험한 단언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썼다. 시지프스를 나는 다시 생각한다. 결국 굴러떨어져 원점으로 돌아 올라갈 바위를 계속해서 밀어올리는 시지프스. 이제 나 역시 그가 행복할 것임을 마음 속에 그려본다.

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지프스.


#2.

관련하여 이미 든 생각들을 망라하여 블로그에 오랜만에 긴 글을 써서 내 생각을 잘 개진해두었으나, 그 전후 맥락을 남기지 않을 수 없는 역사의 한 순간인지라 부득이 여기에도 짧게 남긴다.

아침에 지난 12월 3 · 4일, 가장 위협적이었던 실존적 위기로 스스로를 몰아넣었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 영장이 집행되었다. 헌정사 초유의 매우 불행한 일이기는 하나 1960 ~ 80년대 서울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알고 있으며 또한 문제의 밤,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헬기 소리 그리고 사당 부근을 지나다닌 군용 차량의 소식에 육체적 생명에 대한 위협을 무릅쓸 것인가, 아니면 침묵 속에서 철학적으로 자살할 것인가하는 극심한 갈등에 시달린 것이 사실인지라 감정적으로 약간의 통쾌함이 드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글에서 주지한 바 있듯 드는 감정과 별개로, 한남동 관저 앞 극렬한 체포 찬/반 집회의 일촉즉발 대치를 보면서 나는 우리 사회의 위기, 특히 민주주의 ― 숙의 ·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전통이자 정신이라 할 타협과 포용이 상실된 위기가 목도에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운이 좋게도 나는 대학에서 접한 니체 철학으로부터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상대적으로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세력 · 힘의 균형에 따라 가치 · 시비 판단이 달라진다는 ‘도덕의 계보’를 보게 되었다. 밀란 쿤데라의 ‘키치’ 개념을 접한 지난해 9월 이후 나는 니체가 말하는 ‘금욕주의적 이상’ 내지는 ‘우상’이 결국 ‘키치’이며 동시에 인간이 공허 속 무의미함을 견뎌내기 위해 운명적으로 함께하게 되는 것임을 주지했고, 나아가 모든 것이 믿음이라는 생각 위에서 확신하는 것, 그 확신을 기반으로 타(他)에 귀를 닫고 그를 축출하고자 하는 것의 위험성을 깨닫게 되었다. 스스로가 확신에 가득 차 있던 지난 날을 결국 배신하게 된 것이나, 나는 이제 어제의 나 자신을 살해하고 그 피 위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 내가 지향해야 할 방향임을 알며 그것이 시지프스의 운명 속에서도 행복한 그를 생각할 수 있는 원동력임을 안다. 이제 최근의 사태로 나는 이 자세가 ‘우상의 황혼’이 내려앉은 우리의 시대에서 내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수호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임도 깨닫게 되었다.

… 이제는 더 들어보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할 뿐이다.


#3.

작금의 때가 무슨 때인지를 묻는다면, 나는 ‘우리 사회가 극심한 분열 속에 있는 모습 속에서 극심한 위기를 느끼는 때’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어떻게 민주공화정 체제의 기본 원리라 할 다당제와 권력 균형 · 견제 등이 무너지고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게 권력을 넘겨주며 자살했는지를 기억하는 나 자신이라 아마 더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극단주의에는 더 소리높게 부르짖는 다양성으로써, “당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당신이 아는 것보다 더 넓은 세계와 다양한 의견들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대항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도처에서 내가 목격하는 바란 자신만의 신화에 너무 깊게 빠져서 대화를 거부하고, 나아가 자신이 속한 집단이 밑는 키치가 적으로 규정하는 모든 것을 축출 대상으로 인식해 결국 공격하는, 광신도로 구성된 군대와 다를 바 없게 돌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이 중앙 정치 세력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여기에 동조하는 정치인들이 늘어나면서 증폭되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질서의 최소 기둥이 무너지려는 전조를 본다. 나치가 집권을 위해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에 대해 거짓된 정보로 사람들을 홀리고 연쇄적인 폭동을 주도하며 수권법을 위한 목소리를 키워왔음을 상기한다. 그리고 바로 이 기억 위에서 나는 전광훈 목사와 극우 유튜브로 대표되는 우익의 키치, 김어준 씨와 극좌 유튜브로 대표되는 좌익의 키치 사이에서 자신이 빠진 키치의 우상에는 열렬히 환호하고 그 반대를 향해서는 열렬히 저주를 퍼붓고 증오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사회가 인간을 문명으로 억압하는 대가로 보장해왔던 최소한의 안전마저 위협하려 달아오른 사람들을 본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완전히 예측할 수 없으며 나 스스로가 육체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는 경우 치명상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과거로의 회귀, 그것을 나는 두려워하고 있다. 독일은 나치의 패망 이후 극단 정치 세력이 기본적인 믿음을 흔들 때 체제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인 〈위헌 정당 해산 제도〉를 도입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3헌다1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으로 이 수단을 발휘한 역사가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마주하는 것은 그보다도 더 위험해보이는 정당이다.1‘지하에서 국가기관의 마비를 기도하는 세력’보다 더 위험한 것은, ‘지상에서, 국가기관을 지지하는 최후의 기둥, 민주사회 시민들의 최소한의 공유된 믿음을 흔드는 세력’이다. 그래서 철학자와 사상가들은 시험에 든다. 다양성이 그들의 닫힌 문을 결국 열어주리라는 희미한 빛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는가? 아니면 너무 늦기 전에,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 전에 행동해야 하나?

… 철학은 늘 치명적 물음을 던진다. ‘모든 것’에 대해!


#4.

명절을 맞이하여 본가로 내려왔다. 여전히 눈보라 속에서 비틀거리며 나아가고 있지만 전보다는 낫다.

물론 상황만큼은 더 악화되고 있다. 당초 연구실도 잘 나가지 못했고 진척도 별로 없다. 한 달(정확히는 2주) 지났음에도. 그러나 익숙해졌다. 그리고 설령 내가 지금의 연구실에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믿는다. 게다가 나는 지난 4년의 시리도록 외로운 대학의 여정을 통해 무엇과도 바꾸기 싫은 삶의 귀중한 그리고 희귀한 지혜를 얻었으니까. (솔직히 남들은 모르는, 나만이 가진 것이라는 생각 위에 나는 철학적 우위를 차지했다는, 경우에 따라 오만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교묘한 기쁨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내가 항상 조심하고 또한 이것을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알린다면 그렇게까지 나쁠 것 같지는 않다. 도덕은 오래 전에 폐기되었고, 신중함이 미덕이라는 이 교훈을 위배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어렵게 얻은 교훈은 예전에 쓴 문장대로 대학 모토의 전면 부정, 〈Veritas Morbus Mea〉 즉 ‘진리는 나의 병(甁)’이다. 니체에서부터 시작한 여정이 들뢰즈와 쿤데라를 거치며 ‘키치를 전면 거부하는 인간 대 키치와 더불어 사는 인간’으로 발전된 이후, 나는 이제 스스로가 니체의 ‘사자의 시기’를 넘어 ‘아이의 시기’로 나아간다는 희미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이제 내가 비판과 부정이라는 철학의 귀중한 가치를 적극 내면화시킴에 따라 수많은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음을, 나아가 지금 나 자신이 처한 이 눈폭풍이 더욱 세게, 죽일 듯 몰아칠 것임을 안다. 나는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도전을 받게 될 것이나 나는 이제 웃어보인다. 이 웃음은 전적으로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가 말하는 ‘시지프스의 웃음’이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바위, 무의미로 다시 돌아올 선 긋기. 의미 찾기에도 그 장엄한 운명을 반복하는 인간, 나 자신에 대한 긍정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 모토를 향해, 사회와 대학 및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나는 마음껏 웃어보이며 그들의 처지에 동정과 연민을 표한다. (비웃는 것이 아님에 주의! 어차피 그들과 나 모두 키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조리를 직시하는 인간에 점차 가까워지는 나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된 듯하다. 정신분석학을 접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살아있음을 생생히 느끼는 이 순간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나아간다. 불어치는 바람이 더 거세어지더라도 나는 내 운명을 사랑한다.


Appendix.

JANE POP – 백야 ― ‘어둠이 내려오지 않는 밤’은 하얀 공간이다. 이 공간은 인간 정신의 ‘우연을 가장했던 운명이 막다른 벽에 닿을 때’ 맞닥뜨리게 되는 그런 공간이다.2그렇다. 여기서 나는 또 2월 독서 모임의 주제, 《OMORI》를 생각하고 있다. 물론 삶의 굴곡 속에서 힘겹게 나아가는 인간은 주저앉아 자신이 비겁하게 속인 스스로를 생각하게 되곤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될수록 인간은 바로 그 거짓말을 맴돌게 된다. 그 회귀는 영원하다… 그러므로 ‘영원회귀’라 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 여기서 나는 ‘최후의 긍정’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위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처음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인간, 그런 인간들이 모인 사회, 이 모든 운명 바로 이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을 직감하는 것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지하에서 국가기관의 마비를 기도하는 세력’보다 더 위험한 것은, ‘지상에서, 국가기관을 지지하는 최후의 기둥, 민주사회 시민들의 최소한의 공유된 믿음을 흔드는 세력’이다.
  • 2
    그렇다. 여기서 나는 또 2월 독서 모임의 주제, 《OMORI》를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