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7. 2025. 6. 19. ~ 2025. 6. 22.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짧게 노트에 휘갈긴 것을 그대로 옮겨두는 공간입니다.
#1.
기말까지 어찌저찌 끝내고 마지막 수업까지 마친 오늘, 방학을 맞이한 나는 연구실에 나가는 생활로 돌아가기 전 중단되었던 독서를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6월 독서 모임의 선정 도서인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이 그 첫 타자(他者)였는데, 읽기 시작한 지 대략 일주일이 지난 지금, 3월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을 때 발휘된 날카로운 정신이 다시금 돌아오는 것 같다. 오랜만에 문학 작품을 읽으니 학기 중의 과제와 강의 정리 속에서 누적된 피로로 인해 몽롱해졌던 정신이 다시금 조각(雕刻)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정신의 뿌리에 자리한 저 문장들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톨스토이가 던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부터, “인간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삶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부조리〉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와 같은. 나는 지난 한 학기 동안 졸업을 위해 들어야 했던 컴퓨터공학 전공 강의 외에도 교양 강의로써 〈불교 철학의 이해〉도 수강했는데, 청강으로 들었음에도 나에게 또 하나의 철학적 이정표로 기억될 이 기념비적인 강좌를 회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니체와 부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더욱 정교하게 보고 싶어서, 《도덕의 계보》 등을 옮긴 박찬국 교수가 왜 불교철학과 니체의 철학을 한데 묶어 논문을 썼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듣게 된 강의였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당초의 목적보다도 더욱 귀중하고 많은 것들을 배운 것 같다. 부처와 니체는 모두 삶의 〈공허함〉, 그러니까 고정된 것이 없기에 의지할 것 하나 없는 세계를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그 철학이 모두 출발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토양 위에서도 주체적이고 의욕적인 삶과 철학함을 논한 니체와는 달리 부처는 삶 자체에 적대적이었다는 차이점을 가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외에도, 교수자와의 문답을 통해 삶 자체를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매 강의 이후 한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텅 비어버린 강의실에서 교수자에게 강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불교 철학의 서양 철학과의 연결점, 계보적 연구 방법 등에 관해 정말 수많은 질문을 했다. 특히 교수자가 전공한 분야가 아직 국내에는 제대로 개척되지도 않았으며 이제 태동하기 시작한 분야 ― 인도의 논리학 지성 전통인 〈쁘라마나(Pramāṇa) 전통〉 쪽이라는 사실이 나 자신의 특유한 호기심을 격렬하게 자극했고 그 결과 내 질문은 어느덧 수업 내용을 넘어 인식론과 언어 철학, 삶과 세계의 본질 쪽으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교수자는 내가 청강생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면서까지 아직 풋풋하고 경험이 적은 학생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학술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던 시절의 고통, 독일 유학에서 견뎌야 했던 차별과 무시의 경험들을 담담하게, 숨기지 않고 풀어내는 그의 모습. 나는 교수자와의 문답에서 하나의 태도를, 그가 고백한 삶의 수많은 고통과 후회에도 불구하고 불꽃에 이끌려 영화 《어라이벌(Arrival)》의 주인공 언어학자처럼 기꺼이 다시 한 번 똑같이 같은 삶을 살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진담어린 태도로부터 니체의 연장선을 보았다. 국내에서 인정받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분야에 최선을 다함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관해서는 솔직하게 고백하는 열정어린 선생님과의 즐거운 14회짜리 대화편. 비트겐슈타인부터 헤겔, 칸트, 라캉, 프로이트, 쇼펜하우어 그리고 니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간의 영역을 가로지른, 솔직하고도 열린 어스름한 저녁의 대화는 내가 던져왔던 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눈 앞에서 실천으로 펼쳐진 삶의 한 장(場)이었다.
이공계열의 두 분야(대기과학, 컴퓨터공학)를 전공하면서도 철학과 문학 등 인문계열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버리지 않는 나, 욕심많은 인간인 나는 이 지점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사회의 통념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인문학의 시대는 저물었으며 우리의 역량은 과학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제는 학생들에게 수과학적 소양을 배양하여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 과제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철이 없는 나는 이러한 모토 아래에서 가려지는 것을 보고 만다. 어떻게 하면 기술을 발빠르게 습득하고 그것을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응용하는 자를 길러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구도가, 존재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삶에 대한 질문들을 열린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과 논의할 수 있는 자 위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모르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것, 이 〈부조리〉를 나는 피하지 않고자 한다. 그렇기에 나는 낮에는 수치모델 연구실에서 두 전공에 대한 두 개의 졸업 연구들을 수행해야 한다는 시간적 압박에 시달리더라도 밤마다 독서와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을 심산이다. 내가 여전히 인문학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간명하다. 단 한 번 뿐인 내 삶에 있어 저 질문들, 인간의 뿌리를 묻는 저 물음들에 대답하지 않고 죽기에는 살아가는 날들이 너무나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는 것. 나는 바로 이 불꽃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내 안에서 꿈틀대는 철학이 속삭이는 바, 끝까지 포기하지 말지어다는 저 문장을 따라가고 있다.
#2.
어제 절반까지 다 읽은 김애란의 《비행운》에 대한 서평을 거의 하루종일, 사실상 연구실에 나가 졸업연구 준비를 진행한 저녁 동안만을 제외한 모든 시간동안 작성했다.
학기 중에는 글을 쓰고 읽기를 게을리하다가 지난 3월에 읽은 《노르웨이의 숲》 이후 3개월만의 서평 쓰기인지라 필력이 녹슬어 글이 잘 써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하루가 모두 가기 전에는 완성할 수 있었다. 특히 걱정했던 것은 담담하면서도 날카로운 해부칼처럼 예리하게 구조를 해체하는 문장들을 쓰는 문제였다. 글 전체를 궤뚫는 주제를 망치지 않으면서도 문학 특유의 감정선이 묻어나오는 문체를, 나아가서는 아예 밀란 쿤데라나 알베르 카뮈처럼 주제 의식과 문체 자체가 완전히 일치하는 글쓰기가 퇴보했을까 노심초사했다. 4월에 그랬던 것처럼 문장들을 몇 적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아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해야 할 것 같다는 직감, 그러니까 며칠을 넘겨가며 수정을 거듭해야 완성할 것 같다는 당초의 직감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을 때 천만다행이라 느낀 것은 이러한 배경 위에 있다. 아무래도 다른 문제에 집중했다고 생각한 지난 몇 개월이, 오히려 내부의 문장들을 갈고 닦아 준 느낌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독서 노트에서 이야기하겠지만《비행운》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보자. 총 8개의 단편이 실렸으니 절반 읽은 지금은 앞의 4편: 〈너의 여름은 어떠니〉, 〈벌레들〉, 〈물속 골리앗〉,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까지 읽은 것이다. 현 시점의 판단으로는 맨 처음에 실린 〈너의 여름은 어떠니〉를 제외한다면 괜찮은 편이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처럼 인생에 깊이 남을 정도의 명작까지는 솔직히 못 되지만 읽고 분석해서 좋은 교휸 내지는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수작이라 평하고 싶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를 박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구성에서 치밀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단편소설은 소설집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혼재되어 있는 죽음과 삶’, 그리고 ‘그 혼재된 삶과 죽음이 명확히 구분된다고 생각하고 죽음으로부터 비상(飛上)하려는 인간’을 담아내고 있긴 하다. 그러나 장면 전환의 타이밍에 대해서는 시의적절하다기보다는 애매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소재의 경우 너무 식상한 대학 커플이라던가 어릴 때의 추억 회상 등등이었기에 별로 흥미롭지 못했다. 전개 또한 극적이라거나 독창적이라기보다는 다른 소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평이한 정도여서, 다음 단편소설로 넘어갈 때 기억나는 문장이나 대목이 하나도 없었다. 졸작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는, 그래도 어느 정도 잘 쓰인 소설임은 틀림없지만 소설집에 함께 실려서 내가 읽게 된 나머지 세 편에 비하면 상당히 부족하지 않은가 싶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세 편: 〈벌레들〉, 〈물속 골리앗〉,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는 소설에 대해 내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겪어온 삶과 철학들의 궤적 위에서 던지게 했다. 여전히 내가 이 의문을 곱씹어보며 그 대답을 갈구하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적어도 이 소설이 인간의 본질을 궤뚫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소설은 삶의 다양한 측면을 보는 것인가, 아니면 여러 삶의 측면들을 보는 것인가?”
#3.
탱고(Tango).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뱃사람들과 항구 노동자들이 모여들던 가난한 바닷가 도시에서 탄생한 음악. 노동자 계층의 음악으로 시작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지구 반대편의 나 자신도 알고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세계화된 장르. 탱고 음악의 이 같은 보편화 내지는 전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필시 아스트로 피아졸라(Astor Piazzolla)일 것이다. 클래식의 부드러움 · 섬세함과 탱고의 예측불허성 · 정열을 오가는데 능수능란했던, 〈누에보 탱고(Nuevo Tango)〉의 개척자 말이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인물, 용감히 나선 첫 항해에서 지도에 아직 없는 지평선을 열어젖히는 인물. 기성의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는 인물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후배가 며칠 전에 제안한 피아졸라 연주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곡이 그려내는 정경과 시나브로 파고드는 긴장감 덕에 가장 좋아하는 곡인 ‘Estaciones Porteñas: Invierno Porteño’가 셋리스트에 들어가 있었고, 그 외에도 나 자신의 음악적 세계를 확장시켜 준 피아졸라의 곡들이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 씨의 선율로 현현하는 것이었으니까.
오늘 저녁에 두 시간 동안 피아졸라의 곡들에 푹 빠지고 났더니, 나는 탱고가 어떤 음악인지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니, 탱고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음악적 특징들을 가지는지와 같은 일반적 논의 말고. 내가 집중하고 싶은 것은 내가 생각하는 탱고의 미덕, 그러니까 탱고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다.
개인적으로 나는 탱고가 우리 자신의 삶에 가장 가까운, 삶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예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장 큰 연유는 여타의 장르와는 다르게 탱고 음악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란 그것이 거칠고 불규칙적으로 굴러 떨어질 때라는 점에 있다. 부드럽게 음계를 하강시켜 내려앉는 클래식이나 재즈 등과는 달리, 탱고는 특유한 당김박과 강세에서 선율이 이리 튀고 저리 튀면서 추락한다. 거칠게 떨어지는 선율은 보통 연주에서 미적 흠결로 간주되곤 하지만, 탱고의 경우 그 추락이 음악의 진가를 구성하는 것만 같다.
선율의 하강의 측면에서 본 탱고의 이같은 특성은 또 하나의 시각에서 새롭게 고찰해볼 수 있다. 탱고 연주에 빠지면 섭섭한 주요 악기라 할 반도네온을 어떻게 연주하는지를 고려한다면, 탱고의 추락은 우리의 삶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아코디언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한쪽에 건반 대신 버튼들이, 양쪽 도합 총 71개의 버튼들이 달려 있는 반도네온. 반도네온으로 곡을 제대로 연주하려면 이 수많은 양쪽의 버튼들을 알맞은 타이밍에 정확하게 눌러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도 그 미묘한 소리를 내기 위해 몸 전체를 비틀어가며 악기를 뒤틀어 소리를 내야 한다. 반도네오니스트는 강세를 조절하기 위해 때로는 급작스럽게, 때로는 부드럽게 몸을 접거나 펼쳐서 음조를 흩뿌린다. 긴장과 완화를 매우 격렬하게 오가는 신들린 듯한 연주, 그리고 악기가 뿜어내는 특유의 구슬픈 사운드를 회상하면, 나는 선율이 추락하는 장면 속에서 마치 반도네온이 비탄에 잠겨 온몸을 뒤트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 인상에 잠기노라면 나는 마치 〈부조리〉한 세상 앞에서 괴로워하는 인간이 울부짖는 장면을 떠올리고, 이 인간이란 다름 아닌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썼던 대로 ‘합리를 바라지만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고서 닥쳐오는 세계의 비합리성’ 속에 끊임없이 잠겨 들어가는 한 인간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 겹쳐지는 장면들이 탱고가 가장 삶의 뿌리를 건드리는 음악이라 주장할 수 있는 핵심 근거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탱고가 추락만이 아름다운 음악이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다. 탱고는 다시 한 번 상승한다. 하강 이후 상승은 오르내리는 선율로 무장한 음악에서 기본적인 것이긴 하지만, 탱고의 추락이 위 같은 인상을 주는 이상 나에게 탱고의 상승은 다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인간 찬가로 느껴진다. 반도네온은 추락의 여명 이후에도 다시 한 번 비행(飛行)을 꿈꾼다. 비행(非幸) 속에서도, 곧이어 또 다른 추락이 있음을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또 한 번의 도약을 시도한다. 나는 《시지프 신화》의 말미를 장식하는 시지프스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떠올린다. 카뮈는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썼다. 처음으로 굴러떨어진 돌을 다시 한 번 밀어올리는 시지프스, 우상이 무너진 세계에서 주체성을 의욕하는 니체의 초인. 나는 이 모든 철학들을 이어주는 아교로써 탱고가, 탱고의 추락이, 가장 인간적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