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8. 2025. 7. 3. ~ 2025. 7. 1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8. 2025. 7. 3. ~ 2025. 7. 13.

2025-07-27 0 By 커피사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짧게 노트에 휘갈긴 것을 그대로 옮겨두는 공간입니다.


#1.

졸업 연구를 위해 연구실에 나가면서도 틈틈이 이번 7월의 독서 모임, 내가 책임지게 된 《시지프 신화》에 대한 모임 계획서를 쓰고 있다. 가장 많은 주석과 설명을 붙여야 하는 작가 설명과, 가장 많은 공을 들여야 마땅한 서문 즉 도서 소개 부분은 오늘 그 초안을 완성했다. 이제는 도서 내용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모임의 주차별 계획 두 부분만을 남겨두고 있다. (물론, 알베르 카뮈와 실존주의 철학 관련 논문들을 찾아보고, 참고 문헌으로 보충하는 일도 남아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까지 오래 걸릴 일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글을 쓰는 일이지, 목록을 작성하는 일이 아니다.) 초안이 만약 며칠 내로 완성된다고 한다면 그 뒤의 고된 탈고를 거쳐, 아마도 목표한 대로 이번 주말 안까지 글을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고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직감과는 별개로 계획서를 쓰는 일은 전혀 쉽지 않은 작업이었음을 고백해두어야겠다. 물론 지난 2월의 총 50페이지에 달하는 《OMORI》 모임의 계획서보다는 분량이 적지만, 글쓰기에 대한 내적 기준이 엄격해진데다 모임에 여전히 철학적 텍스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 주된 고민거리로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정말로 문제가 된 것은 이러한 가독성과 문체를 고려한 글쓰기가 아니었다. 내가 마주한 가장 큰 문제의 정체란 바로 단 하나의 직감, 즉 대학 생활 동안 내가 비틀거리며 걸어온 저 철학적 여정 일체가 귀결되는 지점이 알베르 카뮈인 것 같다는 바로 저 직감이니까.

카뮈를 처음 접했던 때를 떠올려본다. 니체 철학에게 한 대 얻어맞고 조금 비틀거리고 있던 나는 대학 2학년 차에 그의 소설 《이방인》을 읽었다. 블로그에 남아 있는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와 스스로를 거의 동일시했다. 주된 사유는 〈단절과 고립〉이라는 아우라였다. 2년 반 전의 그 때는 니체로 인해 내가 믿어왔던 키치(Kitsch)들, 이를테면 과학의 진보성부터 더 ‘괜찮은’ 대학에는 더 ‘괜찮은’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모조리 무너져버린 시점이었다. 성실성 · 정직성 등 내가 믿어왔던 도덕적 준거들이 붕 떠버리고, 내 앎들의 깊이가 그닥 깊지도 않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체감함에 따라 무지의 공포가 스스로를 덮쳐와 모든 것에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던 때였다.

하지만 이러한 혼돈 가운데서도 가장 타격이 컸던, 즉 스스로의 정신을 가장 깊은 우물 속으로 밀어버렸던 사실은 따로 있었다. 여러 번 과거 글에 언급되었듯, 그것은 이 삶과 지식 앞에 펼쳐진 이 광활한 바다, 저 지평선을 보고도 입을 쩍 벌리며 충격에 빠지는 사람들이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는 바로 그 관찰, 아예 강의실에서 그런 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잔인한 체득이 바로 그것이었다. 지식 공동체로 조직을 규정짓는 총장의 연설과 실제의 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아득한 거리를 본 나는 이런 모순으로 점철된 공동체 속에 내가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그 인식의 순간 이후로 나는 입학의 두 글자 아래에서 신선해 보였던 대학의 공기가 어느 순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숨막히는 무언가로 바뀌었음을 여실히 느끼게 된 것이다.

절정은 여름방학의 학부 MT였다. 낭만이라는 구호 아래에서 애써 괜찮다며 불안을 덮는 것을 일종의 도망이자 비겁함으로 본 나는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을 미친 짓으로 간주해왔고, 그리하여 알코올에 끔찍할 정도의 ‘정신적 알러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야심한 시각 내가 경기도의 어느 펜션에서 목도한 광경이란 술과 음료를 양푼에 섞어먹는 저질스러운 문화였고, 음주는 선택이라는 구호와 은근한 강권의 분위기 사이의 끔찍한 모순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집안력으로 음주가 불가하다는 거짓말로 현장을 뛰쳐나왔고, 그 뒤로 학과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는 편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 그러니까 정신적 고독과 실질적인 사회 속 고독으로 의지할 것을 모두 상실해버린 내가 만난 것이 뫼르소 그리고 그를 창조한 카뮈였던 셈이다. 그 어느 때보다 죽음에 정신적으로 가장 가까웠던 해, 나는 왜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지를, 세상이 한 사람에게 선사하는 그 모든 거지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자살하지 않는지를 물었던 80년 전의 문호를 만난 것이다. 그의 문제 의식과 정확히 일치하는 생각들에 시달렸던 당시에, 정신적으로 가장 끝자락에 몰렸던 그 때에 알베르 카뮈와의 조우는 참으로 시의적절했다. 때문에 그의 문제 의식이 나 자신의 경험과 결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이 만남 이후 나의 주된 관심사는 “왜 인간은 자살하지 않는가?”라는 저 불편하고도 위험한 문장이 되었다.

아마도 이 모든 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맥락, 이 맥락을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 그 모든 구성 요소들 사이에 채워 넣고 싶었기 때문에 모임 계획서의 문장은 그토록 잘 쓰이지 않았으리라. 행간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문장들만을 쓰고 싶었기에, 카뮈가 그러했던 것처럼 문제 의식이 문체에도 그대로 묻어나오는 글이 필요했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망설였으리라. 다시 한 번 저 이중적인 불꽃 ― 삶을 태워 버릴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역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단 하나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는 바로 저 불꽃 ― 에 이끌려 어느 항 하나도 폐기하지 않고 모든 것을 기꺼이 끌어안는 용기를 발휘해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나는 카뮈의 문장들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인간이 이따금 어려움에 맞서서 겨루어 봄으로써 자신을 판단하는 일은 유익하다.”고 그는 썼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은 그 다음의 문장이다. 그가 내게 남긴 저 문장, 바로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는 문장 말이다.


#2.

동생이 졸라 먹으러 간 프랑스 정통 가정식이 소화되던 지난 토요일 저녁, 나는 자정에 이르기까지 문장들을 쓰고 지운 끝에 마침내 독서 모임의 7월 《시지프 신화》 계획서까지 소화해냈다. 이틀이 지난 지금, 내 마음에서 목소리를 내는 주체란 탈고의 쾌감이라기보다는 걱정이라고 해야 겠다. 계획서를 공개하며 달아둔 첨언에도 썼지만 세 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다루는 문제가 삶에서 가장 절박한 의문인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이며 여기서 귀결되는 후속 문제 또한 〈자살〉이라는 진지한 문제라는 점. 둘째, 이 문제 때문에 모임 구성원들에게 요청되는 것이란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솔직한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잔인할 수도 있을) 자기 직시와 고백이라는 점. 마지막 셋째,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내가 상당한 문장들을 할애하여 독백한 바 있는 저 〈우물〉, 대학 생활의 상당 기간 동안 내가 허우적거렸던 저 깊은 정신적 수렁에 빠뜨리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이 세 가지 문제가 어떻게 이번 한 달 동안 모임을 풀어나갈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를 휘감는 것만 같다.

물론 타인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원칙적이고도 본성적인 저 ‘거리’, 즉 타인이 결코 될 수 없는 인간은 다른 이의 생각과 내면을 오로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나는 내가 겪었던 (해석이 바뀌기는 했지만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겪게 될) 저 실존적 갈등의 발단 · 단계 등이 그들에게도 유사하게 작동하리라는 합리적인 가정을 출발점으로, 그 위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유를 인도할 것인지를 고민하려 한다. 여전히 길은 모호하기만 하다. 균형을 잃고서 어느 한 쪽으로 굴러 넘어지면 저 아래로 끝없이 떨어지는 위험한 외줄타기. 나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기 망설여진다. 그들의 균형 잡기를 도와야 할 것인가? 아니면 기꺼이 그들이 균형을 잃고 떨어지도록 도와서 카뮈가 말한 〈부조리〉의 순간을 실질적으로 체감하도록 해야 할 것인가? 알 수가 없다.

내 앞에는 하나의 선택이 놓여 있다. 이 선택은 카뮈를 구성원들에게 보일 때 그것을 타자로써 보일 것인지, 아니면 내면적 체험으로써 보일 것인지의 문제라고 정리할 수 있다. 카뮈는 후자를 말한다. 그는 저 정신적 우물 깊이 발을 들이는 추락과 권태의 순간을 겪지 않고서 인간이 시지프스의 운명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할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나는 저 시간들을 통과해오면서 그 과정의 중대성, 그러니까 회복이 쉽지도 않고 그 속으로 사람을 밀어버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여전히 알 수 없는 이 정신적 골병의 중대성을 온몸에 새겨왔다. 철학은 때로는 치명적일 수 있다고 내가 여러 번 썼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묻고 있는 것이란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인 셈이다.

“꿈과 현실, 이 둘 중 무엇을 말할 것인가?”1얼마 전에 공개한 플레이리스트 Clair-Obscur에 얽힌 이야기를 풀 때 염두해두었던 문제 의식은 여기서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3.

최근들어 나는 스스로의 글쓰기에 대해 양면적인 감정을 가지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갈고 닦아온 글쓰기의 양식이나 그 행간들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는 성취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글을 쓰는 빈도가 줄어들고 있음에 우려 또한 느낀다.

이 양가성의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고 생각하는데, 내 작문의 기준이 상당히 높아진 것이 바로 그 사유가 아닐까 싶다. 근래에는 많이 그리고 다채롭게 쓰는 것보다는 마음 속에서 어떤 강렬한 불꽃이 솟아오를 때 그것을 따라 문장들을 직조하는 것을, 특히 그 불꽃이 “글에 온전하게 반영되도록” 쓰는 것을 지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러 철학자나 문학인들, 그 중 가장 크게는 아마도 알베르 카뮈의 문체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는 몇 달 전부터 좀 더 세련된 글쓰기를 시도해왔고, 방학 동안에 그 방향성을 하나의 준칙으로 정리해냈다. 〈주제와 글의 일치〉, 그것이 바로 내 작문의 미학이 되었다.

〈주제와 글의 일치〉라는 표언은 경우에 따라서 실소를 자아내게 할지도 모르겠다.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아니던가!2물론 일기나 메모와 같이 일상적 기준에서는 예외가 있겠지만, 내가 고려하는 것은 생각을 담는 글쓰기지 단순 기록에 대한 윤리학이 아니다. 그러나 주제에 대하여 글이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단순히 쓰인 것이 만들어내는 의미뿐만이 아니라는 관찰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러 문학 작품들과 예술품들의 감상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쓰이지 않은 것들도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림에서는 늘 선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이 형체를 만들어왔고 음악에서는 가사가 없는 전개가 훨씬 더 넓고 생생한 호소력을 발산해왔다. 글에 대해서도 나는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방식에는 필요한 수사를 동원해 읽는 이로 하여금 문장들을 읽었을 때 비슷한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의도적인 반복 · 자기모순의 삽입과 같이 글의 구조를 통해 독자가 생각하도록 만드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쉽게 읽히는 글을 쓰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학술 논문, 신문 기사, 보고서 등 대부분의 일상적 문서는 여기에 해당하니까) 이제 내 관심사는 글, 그러니까 내가 손에 쥔 자그마한 펜 한자루의 끝에서 인간을 노래하는 하나의 사상 내지는 구조를 직조하는 예술로 옮겨간 것 같다. 이러한 사상과 구조가 탁월하게 전달되는 순간은 논리적 전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관찰에서 내 미학은 출발한다. 소설이나 희곡을 읽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감동은 그런 종류를 매개로 하여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 글들은 의도적으로 자리를 덜어내고 이상함과 불편함을 느끼게 함으로써 읽는 이들의 의식을 요청한다. 소설은 의도적으로 내면 묘사를 생략하여 독자를 주인공과 세계라는 타자 속으로 초대하는 법이며, 불후의 명저들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줄곧 늘어놓기보다는 끊임없이 독자를 불편케하는 질문들과 선언들을 준비하는 법이다. 이 같은 ‘비어있음’을 통해, 글의 행간을 통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통해 한 사람이 옮기고자 하는 바들을 말할 수 없는 것들까지 포함하여 전달하는 방식이 유효하게 존재하고 있다. 내 실험이 이 방식들에 유별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그리하여 요즘은 글쓰기를 더욱 엄격히 하게 되는 것 같다. 초안을 쓰더라도 어투 · 접속사 · 배치 · 단어 등 글의 모든 요소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정교히 다듬어지기를 더욱이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 작금, 그러니까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에 대해 쓰고 있는 지금은 〈부조리〉의 철학이 글의 구도 · 문체 · 단어 선정과 그 단어들이 배치를 통해 종합적으로 그려내는 관계 속 태동하는 감정선들 모두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으면 도저히 성이 차지 않는다. 나는 이제 모든 것을, 쓴 것과 쓰지 않은 것,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내용과 뉘앙스, 문장과 문단, 단어와 글의 구조 이 모든 가능태들을 단 하나의 현실태로, 〈주제와 글의 일치〉라는 미학이 온전히 구현된 하나의 글로 매듭짓기를 원한다. 쓸 때마다 하나의 조각을 하는 기분 속에서, 이제 어떤 영감이 찾아오는 날이 아니면 글이 퇴고되는 속도가 지지부진해지기 시작한 것 같지만, 만약 그 원인이 상술하였듯 내 예술적 욕망이 이제서야 태동하기 시작한 것에 있다면 그렇게까지 이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글쓰기에 대해 느끼는 이 양가적인 감정, 지금으로서 나는 이 정동을 하나의 변화의 후속이요 새로운 지평선 앞에서의 혼동으로 정의내리고자 할 따름이다.


Appendix.

Pyotr Ilyich Tchaikovsky – Symphony No. 6 in B Minor, Op. 74 ‘Pathétique’, Movement IV. Adagio lamentoso – Andante (By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2012) ― 차이코프스키가 세상을 떠나기 단 9일 전에 초연된 그의 최후의 교향곡, 〈비창〉은 그 제목에 대한 작은 논쟁이 있다. 작곡가가 악보에 써 놓은 원 부제는 ‘강한 감동을 주는’, ‘애절한’ 등을 뜻하는 ‘Патетическая’로, 비장(悲壯)함과 비창(悲愴)함이라는 두 단어 모두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한편에서는 작곡가가 비장함을 뜻하는 ‘Pathétique’로 프랑스어판 부제를 정한 이상 국내에 통용되는 ‘비창’보다는 ‘비장’이라는 단어가 훨씬 적절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전반적으로 우울하고 장엄한 곡의 분위기로 볼때 현재의 제목도 충분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관심사란 둘 중 어느 것이 더 적절한지가 아니다. 우울하게 들리면서도 어느 순간 우아하게 들리는 선율로부터 나는 모든 인간적 운명이 공유하는 이중성을 읽어내기 때문이다.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속에서 의미를 바라는 인간이라는 바로 그 운명의 이중성, 친숙하고 따뜻한 품을 원하는 욕망이 믿음을 채택하고 자신만의 팔레트로 세계라는 캔버스를 하나씩 칠해가지만 불안정한 캔버스는 언제든지 붕괴해 먼지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한편에서 우리는 이 광경을 죽음 앞에서는 무의미한 삶 일체로 해석하여 깊은 슬픔(悲愴, Pathétique)에 잠겨들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는 인간, 여전히 꿈을 꾸고 세계를 나름대로 해석하려 애쓰는 인간의 감동적인 서사(悲壯, Патетическая)로 볼 여지 또한 충분하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얼마 전에 공개한 플레이리스트 Clair-Obscur에 얽힌 이야기를 풀 때 염두해두었던 문제 의식은 여기서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 2
    물론 일기나 메모와 같이 일상적 기준에서는 예외가 있겠지만, 내가 고려하는 것은 생각을 담는 글쓰기지 단순 기록에 대한 윤리학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