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9. 2025. 9. 1. ~ 2025. 9. 1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9. 2025. 9. 1. ~ 2025. 9. 11.

2025-10-14 0 By 커피사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짧게 노트에 휘갈긴 것을 그대로 옮겨두는 공간입니다.


#1.

미처 인식할 틈조차 없이 대학에서 (적어도 학부생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학기를 맞이했다. 신학기마다 하던 일을 결국 나는 또다시 반복하고 있음을 지적해야겠다. 이번 방학 동안에도 연구실 일은 또다시 손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생각하기를 멈추고 싶다는 죽음 충동(Todestrieb)이 다시 한 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7월 후반까지는 아슬아슬하게나마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21일이 되자 연구실에 나가고 싶지 않아졌다. 혼자 견디고 있던 소통의 부재 그리고 막막함이 발목을 휘감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던 것이다. 이미 여러 차례 결근한 전적이 있어 내가 심하게 눈치를 보는 것도 있겠지만, 친절함 뒤에 숨은 무심함까지 내 감수성이 포착해버린 것이야말로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실용적인 무언가에 막혀 도움을 어렵사리 요청해보더라도 막연한 방향성만을 제시해줄 뿐 실질적 도움은 받지 못했던 과거를 되돌아보면 칸막이로 나누어진 그 공간들에 자리한 것은 웃음으로 가려진 무관심 내지는 각자도생이라는 지엄한 준칙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공기가 탁한 곳에서 오래 있지 못하는 나는 뻔뻔하게 버티고 서 있기에는 대학 초년 시절의 풋풋한 특권, 즉 해맑음마저 잃어버린 상태였기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이한 침묵과 자판 두들기는 소리 가운데 계속 앉아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야 말았다. 결국 모두가 퇴근한 저녁 그리고 심야 시간이 내가 일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 경우 기껏해야 마주치게 되는 인물이란 비교적 안면식이 있는 (따라서 불편함에 내가 익숙하다고 스스로를 기만할 수라도 있는) 선배 1명 뿐이 되기에 나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러한 불편함을 피해 자발적인 고립을 택한 시도는 당연하게도 더 쓸쓸해지는 결말로 이어졌다. 기성 도덕관에 의하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또 새로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도 알았지만 한때 내가 사용해오던 장비가 회수되었고 정기적 · 주기적 랩 미팅에 불러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묻던 교수님의 연락이 뜸해지다가 마침내는 완전히 끊어졌을 때 무엇을 느꼈는지를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혼자서 연구실에 박혀 새벽까지 코드를 다듬고 실험을 이어가던 생활이 3주 정도 되었을 때 (물론 그리 꼬박꼬박 나가지는 않았다는 점을 부언해두어야 공평할 것이다.) 나는 마침내 오랫동안 믿어오던 바 중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의 참상을 견뎌왔고, 그 트라우마 속에서 아직까지도 신음하고 있는 나는 엉덩이가 무겁다고, 그러니까 어떠한 고통이나 난관에도 불구하고 뒷심으로 끝까지 버틸 줄 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아니었다. 무의미한 고통만큼은 나 역시 견딜 수 없었다. 고등학교 당시는, 물론 지금 보면 무의미하기 짝이 없긴 하지만 ‘진학’이라는 실존한다고 날조된 위협과 부추김 속에서 의미를 덥석 믿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서 생각이 점차 다듬어지고 평소 눈길을 주지도 않던 마음 속 구석들을 조금씩 탐험해감에 따라, 나는 스스로가 가졌던 믿음이 남김없이 흐물어져 흘러내리는 것을 목도했다. 철학과 교양 강의로 시각이 넓어진 나는 ‘생각하는 것’, 특히 ‘너무 많이,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것’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엘리트 계급으로 어떻게든 올라가기 위해 아비규환이 된 사회에서 다른 이들을 베고 짓밟으며 걸어온 저 길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힐난하도록 만들었을 저 얼룩진 길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본다. 가물거리지만 동시에 칼에 베인 상처마냥 선명한 저 흔적들 사이로 나는 죽음과 삶 자체에 대해 계속 고찰해오던 스스로를, 그리고 스스로를 뒤흔들고 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알아차린다. 이 광경이 너무나도 장엄하기에 한때 내가 단기적으로 가져왔던 대기과학에 대한 진심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자신의 서사가 끊임없는 내성(內省, 아니면, 내상(內傷))을 통해 재구축되는 과정을 거친 결과 이제 내 안의 불꽃은 스스로를,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것으로 옮겨갔다.

학문 일반에 대한 나의 오래된 생각, 그러니까 나의 세계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무언가를 새로이 배우고 스스로를 다듬어가는 과정에 대한 그 유서 깊은 열의는 여전하다. 동시에 나는 현실적인, 즉 경로의존적인 이유로 분야를 가리지 아니하는 열의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보내는 이 마지막 학기에 연구실의 일들과 두 편의 졸업 논문들이 잘 풀리기를 바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고착화된 세계, 계속 같은 일만을 반복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공간에서 스스로가 애써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으리라는 거짓말로 버티기에 나는 이미 너무 깊어져 버렸다. 타인과의 흥미로운 교류, 새로운 것들이 나를 사정없이 두들기고 고함을 질러 내가 아직도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저것들과 내가 모조리 한 판 붙어보고 싶다는 그 생명력을 느끼게 해 주는 환경이 결여된 토양 위에서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있었다. 스스로를 속여가며 위태롭게 봉합했던 의지는 다시 흘러내리고 나는 다가오는 학기, 그 미지의 근원적 공포 속에서 애써 부모님과 주변인들에게 침착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거짓말하는 삶을 지속해나간다.

문제를 풀기 위해 지난 번 지도교수를 찾아가 뵈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말씀드렸고 따라서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동물이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동물이고, 또 관심사 바깥의 것은 언제든지 냉철하게 내치는 그런 동물이다. 나는 작금에 대한 책임이 온전히 나에게만 있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고 있는 현실은 결국 급한 사람이 먼저 연락하고 숙여야, 더 힘이 없는 자가 결국은 휘둘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오랜 세월 동안 나의 모든 뼈마디 하나하나에 새겨줬다. 결국 나에게 남은 문제란 다시 기만적 용기를 낼 수 있을지의 여부, 잘 풀린다는 보장이 주어지지 않는 오늘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그 치열한 노동의 과정이 서성이는 나 그리고 관조하는 나의 깊이를 기억함에도 불구하고 그 지루함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평가될 수 있을지의 여부다.

아침이 밝고 눈을 떴을 때, 나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 충분한 ‘힘’1당연하게도, 나는 이 용례로서의 ‘힘’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이 있을까? 어머니께선 종종 나를 지나친 이상주의자라고 부르곤 하셨다. … 그렇다, 이상주의자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이 갈등을 폐기하지 않는 선택지를 여전히 택할 정도로 무모한, 현실적이지 못한 그런 이상주의자.

Il est bon cependant que l’homme, en se mesurant à la difficulté, se juge quelquefois.
Il est seul à pouvoir le faire.


#2.

오노레 (드) 발자크의 《나귀 가죽(La Peau de chagrin)》을 완독했다. 2023년 봄학기 개강을 앞두고 존경하는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께 선물받은 책이었건만, 당시에는 절반 즈음 읽고 서고에 잠자게 두었던 책을 나흘 전 다시 집어들어 단숨에 읽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8일로 넘어가는 새벽, 23살의 나 자신의 시작과 동시에 소설은 끝을 맞이했으니 이보다 더 귀중한 생일 선물은 분명 없을 터다.

첫 인상은 문체가 장황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한참 뒤의 문호임을 알지만 나 자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글쓰기에 있어 주요한 지표이자 참고점이 되는 알베르 카뮈의 잔인할 정도로 깔끔하게 단절된 문체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다. 계보적 사유(思惟)로 인하여 개인적인 미적 선호가 단순 명료하고 고독한 문장과 문단의 구성에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쪽을 덮었을 때 몇 안 되는 경험, 즉 문학 작품 특유의 흥취가 스스로의 존재와 공명하여 정신 전체를 뒤흔들고 주체할 수 없는 고양감 내지는 흥분으로 나를 이끌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미니멀하지 못하다는 점만 제한다면 발자크는 무려 200년 뒤의 독자인 나에게도 성공적으로 스스로를 각인시켰다고 평할 수 있겠다.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도 길고 또 각종 인용구부터 격언, 화려한 수사 속에서 거하게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 마구잡이로 내뱉는 모양새의 (물론, 실제로 소설의 제2부에서 주인공 ‘라파엘’이 정확히 이렇게 하지만.) 장황함이 주제 의식을 오히려 더 생생하고 가깝게, 당장이라도 그 날카롭고 차가운, 그러나 동시에 마치 위로하는 위선 속의 산 사람들과는 달리 날카로운 비평과 문장들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죽은 사람들의 품이 제공해주는 온기만큼이나 부드러운 감각 속에서 여실히 전하고 있다 생각하게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금의 전율에 대한 원천은 필시 작품의 말미에 실린 해설의 공적일 것이다. 해설을 읽고 전체를 재평가하기 전까지는 지루해지고 있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제1부를 읽을 때만 하더라도 청년 ‘라파엘’이 겪은 허울 상의 좌절 그리고 가식으로 꾸며진 사회 앞에서의 환멸이 몰리에르의 《인간 혐오자》라던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은 직후처럼 와르르 쏟아져들어와서는 스스로 감내하는 편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편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저 저주이면서 동시에 축복이라고 할 나의 민감한 감수성과 격렬하게 반응하지 않았던가. 당장에 처한 지도교수와의 관계부터 졸업 그리고 그 이후에 대한 기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면서 인간관계의 ‘공학 기술’을 쓰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 그리고 그 역겨움이 날이 갈수록 무뎌지고 있는 것 같다는 메타-역겨움 내지는 환멸 위에 다시 한 번 속을 게워내는 나 자신을 떠올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때문에 종이 책의 제1부 곳곳에는 나중에 따로 옮겨 보존해두기 위해 밑줄이나 홑겹표로 표시해둔 부분들이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수십 쪽에 한 번씩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간격은 제2부를 거쳐 제3부로 떠나감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마침내는 한 부를 통틀어 한두 개 정도, 그것도 길지도 않은 아주 짧은 대목들을 표시해둔 것으로 갈무리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진행되고 있었던 독서가 공명 없는 읽기의 지속에 흥미를 잃었던 정신이 무거운 납덩어리가 은연 중에 미끄러져서 원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된 용수철마냥 쾅 튀어올라 도처에서 영감인지 광기인지 모를 열감을 터뜨려대고 있는 지금으로 이어졌으니, 이것을 말미의 해설이 아니면 무엇의 영향으로 설명한단 말인가?

해설의 결정적 기여는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시대상, 그러니까 소설의 초판이 간행된 1831년의 당대 사회 · 정치적 환경과 작가 발자크의 생애에 대한 사실들을 열거해준 것이다. (솔직히 다른 방법으로는 알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너무 많고 넓은 분야에 관심이 많은 이공학도일 뿐이지, 프랑스 문학 전공자는 아니다.) 이 배경 정보들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던 제2부와 제3부에 대한 인상을 획기적으로 뒤집어놓았다. 지나치게 길고, 그의 몸이 흡수한 에탄올 만큼이나 독했던 푸념으로 들렸던 라파엘의 독백, 그러니까 제2부는 이제 한 인간이 욕망하는 삶과 그 삶으로 다시 좀먹히는 스스로의 삶이라는 이율배반 속에서 터뜨리는 신음 소리가 되었고, 당대의 과학부터 의학 · 기술들을 총동원하여 ‘나귀 가죽’의 저주로부터 벗어나려 용을 쓰다 온천 그리고 한적한 호수로 떠나버린 요양, 그러니까 제3부는 희망고문 또는 불가피성 앞에서 도망치는 데카당스적 인간 반응의 묘사라는 최초의 평가를 뒤집고 프랑스 대혁명 이후 봉건귀족의 자리가 금권귀족으로 대체되었을 뿐인 7월 혁명기와 그에 반발한 노동자들의 2월 혁명기로 이어지는 격동하는 계보 속에서 해답을 모색하려는 절실한 작가의 시도가 되었다.

자세한 설명을 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할 것 같다. 그러므로 상세한 평가는 미루지 않는다면 가까운 시일에 완성하게 될 서평의 몫으로 남겨두고 여기에는 핵심적인 결론만 기록하기로 하자. 발자크의 작품으로부터 나는 스스로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구를 처음으로 느꼈던 문제의 그림, 내가 소설 제목으로도 일찍이 점찍어두기도 한 《하얀 문》의 그림을 보았다.2그 그림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시의 인상을 나는 간명하게 두 편의 글에 나누어 기록해둔 바 있다. 하나는 독립된 산문으로, 하나는 음악으로 보완된 단문으로. 문제의 그림에서는 털로 뒤덮여 야생성을 암시하면서도 색채라곤 단 하나 즉 백색을 뒤집어썼기에 그 음영만이 전신에 드리울 뿐인 누군가가, 텅 빈, 그러나 위로 높게도 뻗었으되 완전히 흰 캔버스 앞에 서 있다. 마치 더 밝은 세계로 향하는 문인가 싶기도 하고, 때로는 슬쩍 바람이 불기만 해도 뒤로 넘어져 비탈길처럼 굴러버릴 것만 같은 이 캔버스 옆에는 물감이, 그리고 그 지나치게 새하얀 물감에 적셔진 붓이 조용히 떨어져 있다. 이 모든 것에 눈이 가 닿은 뒤 그림은 앞에 서 있는 인물이 무언가를 그리려하다 무저갱(無底坑)3아바돈의 무저갱(Abyss of Abadon)이라 해도, 또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내가 수차례 언급한 ‘우물’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을 떠올릴 때의 추락감에 휩싸여 한때 그가 쥐었던 붓을 떨어뜨리고야 만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스스로가 그리지는 않았지만 또다른 누군가가 남기고 떠난, 완성이라고 해야 할지 미완성이라고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저 불확실성의 화신 앞에서 굳어버린 자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나는 이 구도 앞에 선 그가 느끼는 두 감정의 혼합을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상상했다. 첫째로 그는 소외되었다는 것, 즉 그의 작품으로부터 혹은 그의 것은 아니되 눈 앞에 생생하게 실존하는 저 문 그리고 그 문이 예시하는 세계로부터 고립되었다는 바로 그 거리를 인식함에 따라 특유의 허함을 느낀다. 그러나 둘째로 (이게 중요하다) 그는 자신이 응시하는 그 공허 내지는 어디로 통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이 미명(微明), 금방이라도 기울어져 시지프가 그러하였듯 그에게로 굴러떨어져버릴 저 불안정한 캔버스를 붙잡고서 이 모든 장면 ― 떨어진 붓, 텅 빈 그러나 동시에 가득 찬 여지(勵志)를 남기는 캔버스, 그 앞에 선 스스로를 그려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도 느낀다. 이 두 번째 모습을 발자크는 나에게 정확하게 상기시켜주었다. 그는 《나귀 가죽》에서 만족하지 않았고, 비록 미완으로 종결되었으되 당대의 사회 그리고 그 속에 처한 그 자신을, 거듭된 사업 실패와 기성 도덕관과의 괴리 속에서 방황하는 자아를 붙잡고서, 떠오르는 의문들을 현실에 대응하는 가상의 캔버스 위에 생생히 그려낸 저 문장들로 되살려낸 《인간극》을 마지막 순간까지 붙잡고 있었다. 바로 이 광경, 그러니까 인간이 자신의 운명 내지는 닫힌 (그리하여 반대가 보이지 않는) 미래와 한바탕 씨름하는 이 광경은 분명히 나의 미학이 출발한 바로 그 자리에 닿아 있다.

서두에 언급했듯 《나귀 가죽》은 대략 2년 전 고등학교 은사님으로부터 선물받았다. 선생님께서 무엇을 의도하셨을지에 대해서는 잠시 연락이 끊어진 지금으로서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지만, 혼란스러운 필체 속에서도 고스랑히 녹아 들어간 인간 자체의 모순적 진술이 태동하는 광경만큼 감미롭고 또한 한 사람의 가슴을 근원부터 울려오는 선물은 아마도 더는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 스물 셋의 새벽을 맞이하기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책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3.

사람들은 왜 이야기를 좋아할까?

단순히 재미있어서? 굴곡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을 향해가는 모습이 숭고해보여서? 서사와 인물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서? 위안을 얻고 싶어서? 겪지 못한 세계와 감각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되, 직접 겪는 위험 부담은 줄이고 싶어서?

혹자는 도서와 영화의 소비 대신 짧은 영상 위주로 미디어의 생태계 내지는 유행이 바뀌었다는 점을 들어서 이제는 이야기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매질(Media)가 변한 것이지 그 매질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이 변질되었음은 아니다. 전통적 소설 소비는 양산형이라거나 같은 주제 의식을 반복한다는 비판에 널리 노출되어 있긴 하지만 웹 · 라이트 소설과 만화 쪽으로 이동했을 뿐이고, 영화는 영화관 대신 OTT 위주의 소비로 그 향유 방식이 전환되었을 뿐이 아닐까. 사람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지어내고, 누군가가 창조한 세계 그리고 인물들 속에서의 체험을 멈추지 않는다.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관습이긴 하다.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는 호메로스 등 음유시인이 이야기들을 읊었고, 중세에는 귀족 계급 · 기사의 무용담부터 평민들의 소소한 사사(私事)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서사들이 암암리에 필사 혹은 구전되었으며, 출판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이후 근 · 현대에는 수많은 소설과 전설들이 인쇄되어서, 그리고 이제는 전자책 또는 영상의 형태로 사람들의 곁에 있으니까. 음유시인의 경우 그들이 서사시를 읊은 것은 역사적 사실을 조금 각색되었을지언정 후세에 이어지게 하려는 목적, 즉 기록의 보존 나아가서는 이야기 속의 교훈을 전승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간주되곤 하는데, 어쩌면 같은 논리가 고대 이후, 즉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기나긴 인류 문학과 예술사적 계보 일체에 적용될 수 있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이야기의 창작 · 변형 · 소비가 기록 내지는 지식의 전달 차원에서 이어지고 있는가?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가는 이유는 정말로 교훈을, 아니면 적어도 가슴 속에 남는 그 무언가를 얻기 위함인가? 책을 읽거나, 비디오 게임의 서사를 감상하는 경험도 마찬가지인가? 중 · 근세의 경우는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는 결론을 내리기 대단히 조심스러워지지만, 적어도 스스로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관한 한은 개인적 체험에 입각할 때 대답이 그렇지 않다는 것임이 자명해 보인다. 즉, 오늘날 이야기가 소비되는 것은 수집이라거나 체험으로의 갈망 때문이다고 결론짓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책을 읽거나 전통적 미디어에 실려 오는 서사를 소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경험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것은 그 서사들로 나를 이끈 추동이다. 모든 첫 걸음은 항상 호기심이었다. 직전의 설명과 표면적으로는 모순이기는 하지만, ‘잃어버린 것을 욕망하는 것’이라고 하면 적절할까? 아니면 그저 원인도 모르겠지만 희한하게도 스스로와 반응하여 그것을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즉 그것을 맴돌도록 하는 매력 혹은 마성적 인력이라고 해야 할까? 흔히 호기심은 학문의 원천이며 우리가 세운 저 인식 체계들의 근본에 자리매김한 바탕 또는 그것을 세우는 건축자들을 좋다고 말하는 도덕적 장려라고 이야기되곤 한다. 그러나 나는 통념이 약속하는 것과 다른 것을 느낀다. 뚜렷하게 계시되는 것은 없다. 그저 모종의 계기가 주어지고, 그것이 스스로를 떠나지 않게 될 뿐이다. 생각이 놓아주지 않기에 손은 뻗어지고 나는 농익은 과실을 한 입 가득 베어 물어본다. 과즙의 맛이 순간 스스로를 사로잡지만, 그것이 달짝지근하다거나 아니면 조금 짭짤하다는 사실은 금세 중요해지지 않는다. 내가 기대했던,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향취만을 기억할 뿐인 열매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추억도, 수집도 아니다. 실존하는 것이란 맴도는 것, 바로 그것 뿐이며 그 가운데에 결핍이 자리할 뿐이다. 없는 것, 부족한 것, 그러나 영원히 닿을 수 없는(이 속성을 강조해야 내 입장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서사 소비의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보는 이유가 오해의 여지 없이 전달될 것이다) 바로 그것을 찾아다니는 인간 운명의 연장선이, 서사의 소비 그리고 나아가서는 창작이라는 형태로 삶에 현현한 것은 아닐까?4만약 이 모호한 설명으로부터 라캉의 상상계 · 상징계 · 실재계를, 특히 실재계의 ‘격리성’을 떠올렸다면 정확히 본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결핍을 구심으로 하는 ‘이끌림’이란 무엇인가에 주목해보고 싶어진다. 맥락에 따라 ‘이끌림’이란 보다 다양한 표현들로 일컬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떤 때는 ‘사랑’이라는 글자로5거래 관계의 ‘사랑’이 아니라,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등장하는 카레닌의 사랑, 그러니까 니체가 말한 의미에서의 사랑 말이다., 어떤 때는 ‘불꽃’이라는 글자로, ‘매력’, ‘함정’, ‘타락’이라는 글자로 이 힘은 나타난다. 그러나 ‘결정하다’, ‘결심하다’와 같이 의사결정이나 행위에 주체가 적극적으로 개입함을 지시하는 표현들은 후보군이 될 수 없는데, 고려의 대상이 되는 ‘이끌림’은 우리의 선택이라거나 의지가 활약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도 없고 통제하기도 어려운 대상에 대한 갈망, 정복욕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거리를 좁히는 시도라고도 할 만하며 경계와 형상을 모조리 때려부수는 블랙홀이라고도 이를 수 있을 이 무언가는 적어도 확실히 이성이, 아니 우리의 의식이 파악할 수 있는 범주 바깥의 무언가로 보인다.

이 ‘바깥에-있음’이 지금 내가 가장 강한 흥미를 느끼는 대상이다. 이 낯선 특유의 감각이야말로 어쩌면 당초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줄지 모른다는 인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주목해보고 싶은 것은 나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것, 그러니까 내 세계에 편입되지 않은, 나의 ‘바깥에-있는’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면 다음의 두 가지 감정이 또오른다는 점이다. 첫째, 그것이 거슬린다. 마치 스스로가 지탱하고 있는, 애써 옹립하고 질서를 부여하려 안간힘을 쓰는 세계를 두들겨 조종하는 배후 의지처럼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 이물감이 너무나도 낯설다. 익숙하지 않다는 미묘한 인식 내지는 감각과 공존하는 것은 힘, 그것을 몰아내던가 아니면 동화되기를 의욕하는 바로 그 힘이다. 그리고 이 힘이 결국 맞부딪쳐보는 것을 선택하게 만든다. 둘째 ― 더욱 주목할 만한 감정인데 ― 공허함이다. 거슬리는 느낌과 구분되는 이것은 대상이 나의 것이 아니지만 나의 것이기를 바란다는 모순적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아직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에 주저하게 되지만서도 그것이 나와 친숙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기도 하고, 뭐가 뭔지, 대관절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조금이나마 내가 기댈 수 있는 무언가가 되지 않을까 소망해보기도 하는 것 같다. 이야기를 보고 듣는 나 자신에게서 나는 이 감각들을 항상 발견해왔다. 비어있는 저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그리고 그 낯선 것들과 대면하기 위해서.

이야기의 창작도 아마도 비슷한 욕망과 감각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소설을 쓰고 싶다는 내 욕망은 어쩌면 인정받기를 갈구하는, 나에게는 결여된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결여될) 사회적 상태에 대한 타파는 물론이거니와(형태와 경계를 파괴하는 ‘파괴적 욕망’) 그 되새기기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가 시달리는 공허감을 색채와 질감으로 덮고자 하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까? 창작과 감상의 욕구, 특히 서사에 대한 이 욕구들은 여전히 나에게 이방인이며 니체의 실재에 있는 것인지 라캉의 실재에 있는지 헷갈리는 갈망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탐하고 만들어낸 저 많은 서사들의 계보를 보노라면 여기에 ‘이끌림’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다. 지금은 이 ‘이끌림’이 나를 ‘이끈다’. 거부할 수도 없고, 자제할 수도 없는 그런 ‘이끌림’이.


Appendix.

Kotaro Oshio – Twilight (2012) ― 어쿠스틱 기타곡 중에는 아마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을 이 곡의 제목은 ‘황혼(黃昏, Twilight)’이다. 국문으로는 누를 황(黃)에 어두울 혼(昏)을 쓰니 노르스름한 여명과 그 사이를 비집고 새어나오는 검은 세계가 공존하는 상태라 할 것이고, 영문으로는 두 개의(Twi-) 빛(light)이니까 태양과 달이 동시에 공존하는 하늘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나는 밤과 낮 사이에 애매하게 서 있는 이 시간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불그레 상기된 듯 하면서도 그 간극을 더듬는 것만 같은 모호한 하늘. 경계가 없기에 정경은 재현되기 어려워진다. 문장으로 설명해보고, 캔버스 위에서 붓을 휘둘러 보고, 사진을 찍어 보이는 그대로를 남겨도 본다. 그러나 만족스럽게 내가 세워 낸 저 형상들을 들어올릴 때마다 손가락 사이로 황혼은 흘러내린다. 때로는 푸근한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와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적막처럼, 때로는 ‘하얀 문’과 그 앞에 선 인물 사이에 묻어나오는 침묵처럼. 나는 무엇인가를 그리워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마음 속 허한 저것의 정체가 태양인지, 달인지, 아니면 두 개의 빛 모두인지 둘 다 아닌지 모르기에, 나는 여전히 황혼 주위를 맴돌고 있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당연하게도, 나는 이 용례로서의 ‘힘’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 2
    그 그림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시의 인상을 나는 간명하게 두 편의 글에 나누어 기록해둔 바 있다. 하나는 독립된 산문으로, 하나는 음악으로 보완된 단문으로.
  • 3
    아바돈의 무저갱(Abyss of Abadon)이라 해도, 또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내가 수차례 언급한 ‘우물’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 4
    만약 이 모호한 설명으로부터 라캉의 상상계 · 상징계 · 실재계를, 특히 실재계의 ‘격리성’을 떠올렸다면 정확히 본 것이다.
  • 5
    거래 관계의 ‘사랑’이 아니라,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등장하는 카레닌의 사랑, 그러니까 니체가 말한 의미에서의 사랑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