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0. 2025. 10. 13. ~ 2025. 10. 18.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짧게 노트에 휘갈긴 것을 그대로 옮겨두는 공간입니다.
#1.
가다가 멈춰선다. 다수가 웃고 있기에 웃어야 할 순간에 웃지 못한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 주저한다. 빙빙.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돈다. 알고 있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이 여정에서 나아가기를 바라며 왼쪽으로 돌면 오른쪽 귀퉁이로, 지킬 수 있기를 바라며 오른쪽으로 돌면 왼쪽 귀퉁이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니체가 일찍이 그러했듯 나는 이 영원회귀(Ewige Widerkunft des Gleichen)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 초에 내가 하얀 문(La Porte Blanche) 앞에 서 있는 자의 그림 밑에 새겨둔, 다음과 같이 라캉의 주이상스 – 니체의 니힐리즘 –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마침내는 카뮈의 시지프스를 관통한 저 문구대로.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 서기에는 그 불꽃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불가능을 향하는 인간.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한 번 더 기꺼이 밀어올리는 이 인간의 정신.
끝없이 되풀이되어 울려퍼지는 의미와의 투쟁. 잃어버린 대상을 향한 포효와 그 허망함을 채우기 위한 필사의 생(生).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주이상스(Jouissance)〉에 따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들, 그런 위험한 직감들.
추석 연휴, 기나긴 12일의 여정에서 돌아온 나는 스스로가 있는 자리를 다시 한 번 알아보게 된다. 나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모두 같다. 다른 언어로 불릴 뿐이다.
한 번은 그 질문이 “왜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할까?”의 형태로 나타난다. 서사가 들어간 예술 작품과 활동에 의미를 부과하거나 이들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라 이야기해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집중하고 싶은 바는 왜 이야기를 찾는지의 여부다. 슬픈 이야기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비참한 주인공의 심정에 가슴이 찢어지며, 너무하다 싶은 인물의 처사에 괜히 숨소리가 가빨라지게 되는, 지루한 이야기보다는 희로애락에 ― 내가 겪을 때는 그 중 ‘로(努)’와 ‘애(哀)’는 빠지면 좋으리라고 생각하는 그 서사들에 ― 왜 우리는 끝끝내 뛰어들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구멍 막기, 즉 저 비어버린 자리에 대한 대체를 기도하는 것인가, 아니면 구멍 뒤집기, 즉 비어버린 자리를 드러내 바람을 쐬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인가? 전자의 경우 반대편의 심연은 더 보이지 않게 가려져, 일시적으로나마 판자에 못을 박은 이는 안도를 느끼게 된다. 후자의 경우 심연은 가장 격정적인 것이 되고, 그것을 들여다본 인간은 어찌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그것으로 빨려들어가 티끌 하나하나마저도 자세히 뜯어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하게 된다.
보다 쉽고 평이한 형태로, 즉 일상적 용어를 사용해 다시 물어보자. 문제가 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이 개별화할 수 있다: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 “나는 왜 서사가 있는 게임을 좋아하는가?”, “나는 왜 가공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이야기와 설정을 찾아보는 것을 멈추지 않는가?” 이 질문에 가치 평가와 문학적 뉘앙스를 조금 더 반영해보자. 그 경우 지금 내가 묻고 있는 바, 즉 예술의 기능이 무엇인지에 대해 안에서 대립하는 두 가지 입장 중 어느 것이 비추어지는지에 따라 질문은 크게 다음과 같은 두 부류로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제1부류, ‘구멍 덮기’로서의 입장: “나는 왜 이야기를 바라는가?”, “나는 왜 음악에 천착하는가?”. 제2부류, ‘구멍 드러내기’로서의 입장: “나는 왜 맴돌고 있는가?”, “나는 왜 망상을 하는가?”, “나는 왜 죽은 자들과 대화하는가?”1내가 읽는 책들은 이미 무덤에 묻히거나 재가 된 자들의 유산인 경우가 대다수다. 나는 그들의 남겨진 어록 위에서 타인이 무엇이며, 나 자신은 또 무엇인지를 가늠해보게 된다. … 겉보기에는 정신이상자가 끄적여둔 듯한 이 의문문들, 여기에 담긴 뉘앙스와 철학적 배경을 당신은 이해하겠는가?
또 한 번은 그 질문이 “왜 나는 계속 멈칫거리고, 산만해지기 시작했는가?”로 체화하여 목을 졸라오기도 한다. 오랫동안 동거한 이 문장은 스스로에게 휘두르는 채찍으로 너무도 자주 이용되어왔다. 현실적 · 당위적(적어도, 전통 · 기성적 도덕 하에서의 ‘당위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 일순간에 광휘를, 즉 생명력을, 아니, 그것으로 달라붙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게 만들던 그 ‘사이렌의 속삭임’들을 잃어버리는 때, 그 때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근래에 나를 더 심하게 매질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그의 2차 심급 모형에서 이 똬리를 틀어 사람을 고문하는(비록 그는 ‘관리’, ‘규율’, ‘감독’이라는 더 젊잖은 표현을 선호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것에 ‘초자아(Superego)’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는 그가 이 초자아가 학습된 것이리라 추론했다는 점을, 즉 아동기의 금지 그리고 좌절의 누적으로 새겨진 사회화의 증거라 했다는 점을 떠올려낸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도덕적 호소가, 암시되고 있는 아버지의 금지와 무뚝뚝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틀리지도 않았음을 나는 안다. 영원한 도덕이나 계율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 아니긴 하지만, 그들은 분명 실존하지 않는다. 니체는 도덕이 날조되는 과정을 이미 나에게 충분히 설득력 있게 설명해준 바 있다. 이미 자라난 의심의 싹은 자아(id)와 초자아(Superego) 양자 간 끈질긴 줄다리기를, 또 그 줄다리기 자체와 줄다리기하는 메타-줄다리기의 상태까지 중첩된 심상을 견뎌야 하는 운명을 내게 부여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이해하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질문의 원형, 아니 결국 모든 질문이 되돌아오는 문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물어온 저것이다: “왜 인간은(나는) 죽지 않는가?” 이 모든 철학에도, 신음에도, 주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생을 정당화하려는, 도망치려는 스스로를 붙잡아두거나 아니면 그 도망이 비겁하지 않은 것이라 여기게 해 줄 훌륭한 체계를 의욕하고, 또한 동시에 간절하게 찾아다닌다. 질문이 더 많은 변형태들을 거쳐 되풀이될수록 히스테리는 점점 심해진다. 붙잡을 수 있는 최소한의 기둥, 빌어먹을 그 ‘희망’이라는 마지막 조각. 나는 그것을 버려야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데 동의한 바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내려놓지는 못하고 있다. SNS 프로필에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빌려와: “나는 자기 자신을 넘어 창조하려고 파멸하는 자를 사랑한다(Ich liebe den, der-über sich selber hinaus schaffen will und so zugrunde geht).”라고 써 두었지만, 까마득한 심연에 여전히 아우성치고 있다. 인용구에서 짙게 표시한 두 낱말의 의미가 나의 삶에서, 무엇이 ‘넘는 것’이며 무엇이 ‘파멸하는 것’인지를 심히 혼동하는 나의 삶에서 부유하고 있기에 또 다시 나는 생(生)이 무채색으로 가라앉는 순간을 보내고 있다.
2주 조금 못 되는 연휴 기간 중의 어느 날, 어머니께서는 나를 이해하기 위해 니체의 저서를 읽다가 포기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답례로서 나는 스스로의 ‘경제적 생존을 위한 계획’만큼은 어머니께 말씀드렸으나, 삶의 시야이자 목표, 혹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나의 운명, 내가 얻어낸 나의 페르소나(Persona)에 대해서는 여전히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난 여름에 샀던 브로치를 아직도 재킷에 꽃고 다니는 이유를 기억한다. 만년필 모양의 그 브로치야말로, 나 자신 그리고 내가 창조하고 또한 파멸할 모든 순간들의 시니피앙(Signifiant)이니까.
가다가 멈춰선다. 다수가 웃고 있기에 웃어야 할 순간에 웃지 못한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 주저한다. 빙빙.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돈다. 알고 있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이 여정에서 나아가기를 바라며 왼쪽으로 돌면 오른쪽 귀퉁이로, 지킬 수 있기를 바라며 오른쪽으로 돌면 왼쪽 귀퉁이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니체가 일찍이 그러했듯 나는 이 영원회귀(Ewige Widerkunft des Gleichen)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 초에 내가 하얀 문(La Porte Blanche) 앞에 서 있는 자의 그림 밑에 새겨둔, 다음과 같이 라캉의 주이상스 – 니체의 니힐리즘 –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마침내는 카뮈의 시지프스를 관통한 저 문구대로.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 서기에는 그 불꽃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불가능을 향하는 인간.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한 번 더 기꺼이 밀어올리는 이 인간의 정신.
끝없이 되풀이되어 울려퍼지는 의미와의 투쟁. 잃어버린 대상을 향한 포효와 그 허망함을 채우기 위한 필사의 생(生).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주이상스(Jouissance)〉에 따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들, 그런 위험한 직감들.
#2.
구원으로서의 예술인가, 생으로서의 예술인가?
묻고 있는 것은 내가 글을 쓰는 이 행위, 모순을 끌어안는다고 표현하는 이 행위가 자기 위로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창조력의 적극적 발휘인지의 여부다. 나는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인가? 마치 수도사들이 ‘죄스러움’을,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 스스로의 몸에 고통을 새겼던 저 역사와 유사히, 나는 종이 위의 문장들을 매개로 하여 고통을 새기는 것인가? 삶의 불만족스러운 모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글을 쓰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해받지 못한 세월동안 쌓인 말들이 스스로를 갉아먹는 저 거슬리는 소리가 잠시라도 중단되기를 원하기에 글을 쓰는 것인가? 글을 쓰는 것은 나 자신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겠노라는 고백의 반복인가? 글을 쓰는 것은 나의 죽음, 자살을 면하기 위한 몸부림인가?
이러한 의문들의 연쇄는 분명 혼란스럽다. 지나치게 마모되었는지 이제는 자극에 대한 반응성이 좋지 않은 내면은 상처를 점점 더 깊은 방식으로 표현하려 든다. 직접 이야기할 용기나 행동할 용기가 없기에 나는 빙빙 돌려 말하면서도 그렇게 행위하는 스스로가 너무나 비참해보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비겁함과 유약함을 철학으로 그럴 듯하게 덮으려는 것은 아닐까?
정말로 나는 생을 위한 철학 그리고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일까?
#3.
사흘 전 질문을 되새겨보자: “구원으로서의 예술인가, 아니면 생으로서의 예술인가?”
냉철하게 문장만을 놓고 보면 대조되는 두 가능성이 같은 말이 아닌가 판단할 여지가 있다. 전제가 되는 인식이란 고대 그리스 신화가 실레노스(Silen)의 입을 벌려 말한 저 문장이 아니던가. “하루살이 같은 가련한 족속이여, 우연과 고난의 자식들이여, 그대는 왜 듣지 않는 것이 그대에게 가장 이로운 것을 나에게 말하도록 강요하는가? 가장 좋은 것은 그대에게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무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차선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찍 죽는 것이다.”2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박찬국 역, 아카넷, 2007. pp. 72-73에서 재인용. 싯다르타와 결을 같이하는 이 문장은 삶이 고통이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세계가 인간 존재에 드리우는 저 침묵의 그림자 앞에서 삶을 이해하지 못하겠노라 고백하는 인간을 보인다. 원하는 대로도, 소망한 대로도 되지 않는 생애, 겪어온 수많은 갈등과 견뎌야 했던 사람들의 무관심. 저마다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기에 바빠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으려는 눈동자에 담긴 저 깊이를 아는 우리는 이 전제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괴롭다고 우리는 고백하고 있다.
삶의 괴로움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고통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의미가 부여된 고통은 견딜 수 있다. 끔찍하기 짝이 없었던 고등학교 시절을 내가 통과할 수 있었던 이유란 그것의 실존성과는 별개로 〈대입〉이 스스로의 차후 사회적 지위나 삶의 윤택함에 있어 결정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미 부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육의 통증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제아무리 짖궃더라도 가쁜 숨을 골라가며 공과대학 강의실까지 걸어 올라가는 생활을 고수할 수 있던 이유는 그 행위가 스스로의 건강 그리고 체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삶의 고통, ‘살아있음’ 자체의 괴로움을 우리가 견디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정당화되는 고정된 근거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은 언젠가 죽어 존재하기를 중단할 것이라는 사실, 언젠가는 그것도 일시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어떤 날 스스로가 보고 있는 이 세계 ― 햇살과 하늘과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저 모든 관계를 맺어온 것들 ― 와 불가역적으로 결별할 수밖에 없음을 되새기게 되면 제아무리 “삶에는 의미가 있다”고 외친들 공허한 염불로 들리게 될 뿐이니까.
“인류 역사에 이만한 업적을 남길 거야”라 다짐하면 기록된 수많은 위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능력을 이미 인정받은, 소위 ‘나보다 더 뛰어난 자들’ 앞에서 주눅드는 자신은 어렵지 않게 의심의 대상이 된다. “소소한 행복으로 살아갈 거야”라 마음을 다잡으면 금방 사라져버리는 포만감, 고양감, 충만함과 같이 쾌는 순간에 불과할 뿐이며 불만족스러움, 불편함, 부당함을 느끼는 시간들이 훨씬 많은 것 같다는 스스로의 체험이 즉각 반론을 제기한다. “타인을 돕는 자선적 삶을 살 거야”고 외친들 스스로가 가진 것을 덜어 다른 쪽에 둠에 따라 기뻐하거나 나를 인정해주는 타인을 목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순간일 뿐이며, 그 목격 혹은 목격을 회상 · 상상하는 순간이 아니면 스스로가 처한 경제적 · 사회적 상황에서의 행동을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자신이 눈에 걸린다.
어떠한 도식을 들고 오더라도 낯선 세계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무력해진다. 결국 무로 돌아갈 것을 아는데, 결국 언젠가 주저앉아버리고 중지해버릴 저 폐허의 무게가 더욱 스스로를 짓누를 것을 인식하는데 이 모든 몸부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다. 삶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처럼 어떤 정당화의 시도도 결국 자신의 중지라는 근원적 선고 앞에서 힘을 잃어버리기에, ‘삶’에 의미를 부과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결론에 계속 도달하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고통만큼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우리는 그래서 비명을 지른다. 대관절 나는 왜 이런 빌어먹을 세상에 태어난 것이냐고 삶 자체를 격렬히 저주하고픈 강렬한 욕망에 휩싸이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랬듯 말이다.3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여기에 옮겨둔 프리드리히 니체의 《비극의 탄생》의 한 대목이 크게 참고가 되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끝을 알 수 없는 절망 속에서 구원을 바라는 것, 즉 어떻게 해서든 삶 자체에 대해 의미가 부과되기를 바라는 것은 따라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그 대표적인 몸짓이 예술 활동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저 추측을 검토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맥락 위에서는 당초의 질문에서 언급되는 양자, 즉 ① ‘구원으로서의 예술’과 ② ‘생으로서의 예술’은 같은 것처럼 들린다. 생에 뿌리를 두는 예술은 삶이 무의미함을 아는 이상 필시 그것으로부터의 구원을 바라게 되니까. 그렇다면 니체의 《비극의 탄생》의 본문에서의 니체의 입장과 후일 《이 사람을 보라》에서 그가 다시 이 자신의 초기 저작에 대한 불만을 쏟아낸 대목에서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인가? 즉 니체의 전기 예술 사상과 후기 예술 사상은 둘 모두가 삶의 고통에 대한 구원이라는 점에서 동등한 것인가?
장고 끝에 탄생한 나의 결론은 이제 ‘아니오’라 말한다. 두 예술론은 삶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즉 삶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만드려는 철학적 시도라는 점에서 동등하기는 하지만, 정당화 작업을 행하는 주체 즉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주체가 상이하다. 전기 예술론 즉 《비극의 탄생》에서는 예술이 삶을 구원하는 주체로 상정된다. 예술가는 쇼펜하우어가 이야기하는 세계의 ‘근원적 의지’가 개별화된 존재일 뿐으로, 그의 활동은 만약 그것이 조형하는 것 즉 아폴론적인 것이라면 쇼펜하우어의 ‘의지’가 스스로의 모방을 형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만약 그의 활동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그는 ‘의지’와 어느 정도 합일한 상태에서 그것의 일부를 세계에 드러내보이는 것으로 이해되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여기서 구원을 행하는 주체는 인간 자신이 아니다. 여기서의 구원은 철저히 타력 구원(他力 救援)이다. 종교, 도덕에 의한 가치 부과와 비슷한데, 이 부류에서는 우선 인간 자신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이 전제되며, 그 다음에 이 ‘구제불능의 죄인’은 혹은 ‘불쌍한 존재’에게 있어 일시든 영원이든 행복 또는 존재의 정당화를 약속해주는 외부가 제시된다. 그리스도교에서 그것은 신이 되고, 기성 도덕에서는 타인의 인정 · 의존 · 도덕률이 전제하는 이상적 인간에 합치된다는 짐작이 된다. 인간 자신은 세계 앞에서 철저히 무능력하고 유약한 존재가 되고, 오직 그 세계의 〈진리〉 혹은 〈선〉이라고 불리는 타율적인 무엇이 인간을 구원한다. 이 방향에서 예술과 인간의 관계를 고찰한다면 예술이 인간을 구원하는 주체가 된다. 즉 우리는 예술이 제공해주는 일시적 도취 · 황홀감(디오니소스적인 것) 또는 관조적 상태(아폴론적인 것)에 젖어서 삶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는다. 이 구도 하에서 예술은 삶의 무의미함을 잊게 해 주는 아편이자 각성제 내지는 삶을 위한 효과적 자극제가 된다. 예술에 의해 삶은 그나마 견딜 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의 후기 예술론, ‘힘에의 의지’의 발현으로써 예술을 이해하는 저 입장이 지시하는 것처럼 구원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즉, 예술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예술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도 있다. 의미를 단순히 타(他)에서 가져오고 덥석 믿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각 사물을 나름대로 배치하거나 표현하는 것으로, 특히 각 사물과 자신이 맺는 관계를 설정하는 주체적인 ‘물감 칠하기’로써 저 세계를 보다 흥미로운 무엇으로 재해석하는 것으로 세계와 자기 자신 사이에 놓인 저 침묵을 타개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방법도 있다. 이 방향에서는 삶의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이 자력 구원(自力 救援)이다. 세계에 대한, 삶에 대한 정당화 또는 의미 부여는 도덕도, 신도, 진리도 그 무엇에 의해서가 아닌 오직 스스로의 작업이 된다. 예술은 그 방식 중 하나로, 가치 평가의 방식으로 이용될 뿐이다. 이 구도 하에서 예술은 인간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작업의 한 방식일 뿐이며 그가 세계와 대면하는 한 가지 창구가 될 뿐이다. 이 경우 삶은 예술을 통해 견딜 만한 것이 된다.
다시 사흘 전의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구원으로서의 예술인가, 아니면 생으로서의 예술인가?”
동어반복처럼 반복되었던 이 의문은 이제 방치되는 두 요소를 상이한 것으로 볼 수 있는 해석을 만났다. 이 질문에서 나열되는 것은 예술과 우리가 맺는 관계, 즉 삶에 대한 정당화 작업에서 예술이 어떤 역할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 가능한 두 입장이다. ① ‘구원으로서의 예술’: 이는 예술이 구원하는 주체가 되는 경우를 상정하는 것이다. ② ‘생으로서의 예술’: 이는 예술이 구원의 매개체, 즉 인간이 스스로 세계에 질서 · 형태 · 구조를 부과하는 과정으로 자리하는 경우를 상정하는 것이다. 즉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예술인지, 아니면 인간 자신인지의 여부다.
과연 예술은 삶에 대한 정당화 작업에서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두 가지 선택지 앞에서 나는 잠시 주저한다. 그냥 포기하고 간단한 도식에, 순간의 고양감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항이 나에게 약속하는 저 편안함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러나 허상인지 아닌지 모를 이 주체성, 희미해보이면서도 여전히 포기하기는 싫은 저 주체성을 놓기 싫은 나는 예술을 ‘구원하는 주체’라는 저 왕좌에서 쫓아내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의 대관식을 여는 다른 도식이 더 바람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내가 읽는 책들은 이미 무덤에 묻히거나 재가 된 자들의 유산인 경우가 대다수다. 나는 그들의 남겨진 어록 위에서 타인이 무엇이며, 나 자신은 또 무엇인지를 가늠해보게 된다.
- 2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박찬국 역, 아카넷, 2007. pp. 72-73에서 재인용.
- 3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여기에 옮겨둔 프리드리히 니체의 《비극의 탄생》의 한 대목이 크게 참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