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춤 #18. 한병철, 바틀비의 경우
잠시, 멈춤 시리즈는 필자가 읽은 글 중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일부, 혹은 전부 인용하고, 필요에 따라 주석을 곁들이는 등, 커피, 사유의 글 모음집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로 포스팅되는 모든 글의 경우, 필자가 쓴 글이 아님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글의 출처는 ‘본문’ 단락 밑 ‘출처’ 단락에 표시하였습니다.
본문
일러두기
이 포스트에서는 글의 전부가 아닌 일부만을 부분 발췌하여 인용하고 있음을 사전에 알립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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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월 Wall가의 이야기’가 묘사하는 것은 모든 주민이 노동하는 동물로 전락해버린 비인간적 노동 세계이다. 고층 빌딩으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사무국의 음울하고 반생명적 분위기가 상세하게 그려진다. 창에서 채 3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 “오래되고 늘 그늘져서 검게 변한 높은 벽돌벽”이 우뚝 서 있다. 마치 수갱처럼 느껴지는 업무 공간에서는 조금의 “삶”도 느껴지지 않는다(“풍경 화가들이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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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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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증적인 과다활동성과 과민함을 드러내는 이들 인물은 침묵하며 돌처럼 굳어 있는 바틀비의 대적점에 놓여 있다. 바틀비는 신경쇠약의 특징적인 증상을 보인다. 그렇다면 그가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문구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 I would prefer not to“는 무위의 부정적 힘도 아니고 “정신성”에 본질적인 중단의 본능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무런 의욕도 없는 무감각 상태의 징후이다. 바틀비는 결국 그러한 의욕 상실과 무감각으로 몰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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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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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wall은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단어들 가운데 하나다. “죽음의 벽 dead wall“이라는 표현도 자주 나온다. “다음 날 나는 바틀비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가에 서서 죽음의 벽 같은 몽상 dead wall revery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다.” 바틀비 자신도 칸막이 뒤에서 일하면서 멍한 상태로 죽은 벽돌벽 dead brick wall을 바라본다. 벽은 언제나 죽음을 연상시킨다. 가장 대표적인 규율사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두꺼운 담장으로 둘러싸인 감옥은 멜빌의 소설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모티프이다. 멜빌은 이를 툼즈 Tombs, 즉 무덤이라고 부른다. 그곳에서 모든 생명의 불은 꺼져 있다. 바틀비 역시 결국 그런 무덤 속에 떨어져 완전한 고립과 고독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복종적 주체이다. 후기근대적 성과사회의 표징인 우울증의 증상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이 부족하다든가 열등하다는 느낌, 실패에 대한 불안은 바틀비의 감정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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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멜빌도 무덤들 가운데 아주 작은 생명의 싹을 틔워놓기는 한다. 하지만 압도적인 절망, 압도적인 죽음의 현존 앞에서 잔디가 돋아난 작은 땅덩어리 imprioned turf는 도리어 죽음의 왕국이 지닌 부정성을 부각시킬 뿐이다. 변호사가 감옥에 갇힌 바틀비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다. “자네에게 여기 있다는 것이 비난받아야 할 죄가 되는 건 아닐세. 그리고 보라구. 여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슬픈 곳도 아니야. 저기 하늘이 있고 여기 풀이 있어.” 이 말에 바틀비는 무덤덤하게 대꾸한다. “저도 제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어요.” 아감벤은 하늘도 풀도 메시아적 표징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죽음의 왕국 한가운데 유일한 생명의 신호로 남아 있는 작은 잔디밭은 그저 희망 없는 허무감만을 강화할 따름이다. “삶의 심부름에 따라 이 편지들은 죽음을 향해 빠르게 달려간다.” 이것이 아마도 소설의 중심 메시지일 것이다. 삶을 위한 모든 노력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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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월가의 이야기”는 “탈창조 Ent-Schoepfung“의 이야기가 아니라 탈진 Erschoepfung의 이야기다.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외침은 한탄인 동시에 고발이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출처
한병철. (2012). 피로사회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pp. 55-64.
주석
이 글은 일단 서울대학교 강우성 교수님의 <문학과 철학의 대화>의 강의에서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라는 단편 소설을 다루는 중에 읽게 된 텍스트이다. 한병철 선생님의 위와 같은 바틀비에 대한 ‘탈진 Erschoepfung‘하는 인간으로의 해석은 나의 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무래도 ‘쇠락 Decay‘하는 인간으로서의 해석이 될 것 같다. 예전에 한 번 생각해둔 바가 있었는데 – 모든 인간은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이 죽음으로 달려가는 여정을 어떻게 긍정해낼 것인가 – 하는 약간 이 바틀비의 경우와는 약간 다른 맥락인 주제이기는 했지만, ‘쇠락’의 인간상에 대한 고찰이라는 점은 아무래도 한병철의 의견의 전체 흐름에 합치되는 것 같기는 하다.
우선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수업 이전에 재빠르게 몇 가지 의문점을 남겨 두기로 하자.
#1. 바틀비는 ‘규율사회’에 있는가 ‘성과사회’에 있는가
한병철은 바틀비의 심리에서 ‘성과사회’에서 특정적으로 드러나는 자기 자신의 무극복성에 대한 우울이 없다고 지적하며, 바틀비는 벽 Wall들로 대표되는 수많은 금지 혹은 규제의 사회 속에 살고 있으며, 성과적인 측면이 그의 행동에 지배적이지 않으므로 ‘규율사회’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솔직하게 아직도 ‘성과사회’와 ‘규율사회’의 정의를 제대로 숙지하지 않은 모양인지, 이 두 가지가 여전히 헷갈린다. ‘성과사회’는 내가 지난 시간에 강우성 교수님의 강의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성과’와 일의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이므로 ‘규율사회’의 금지를 허물고 개인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사회라고 정의된다. 반대로, ‘규율사회’는 성과와 무관히 개인을 규약하는 어떤 제약이나 벽 Wall이 많은 사회로 정의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병철이 바틀비의 경우는 ‘규율사회’라고 하였을 때, 바틀비의 경우 벽이란 무엇인가? 그를 제약하는 것이라고는 몇 가지 이 안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변호사의 요구 – 이를테면 문서의 필사를 해달라고 하면 문서를 필사해야 한다는 것, 혹은 심부름을 시키면 다녀와야 한다는 것, 혹은 건물에서 나가달라고 할 때 건물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 – 이다. 그런데 작중 모든 부분에서 드러나지만 바틀비는 이런 그의 금지, 벽들을 수동적으로 거부하는 인물이다. 한병철은 그러한 바틀비의 태도를 ‘쇠락’으로 읽기는 했지만, 이러한 점이 약간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다. 그의 수동적 거부는 그가 ‘포기’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줄 수도 있지만, 그는 오히려 ‘거부’를 통해 나로 하여금 그의 비상식적 행동에 대한 나름의 영웅성을 부여하도록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바틀비는 ‘규율사회’에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틀비가 전적으로 ‘규율’을 거부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에 합치하는 시각을 준수하여야 하기 때문인가?
바틀비가 있는 월가의 회사의 분위기는 현재 우리가 ‘성과사회’라고 부르는 회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물론 성과에 대한 보답이 명시적인 ‘성과금’이라는 형태로 들어오지는 않지만 바틀비는 초기 그의 성실함으로 변호사에게 몇 가지 호의를 추가로 얻어낸다. 또한 그 당시의 노동 환경이 ‘성과사회’와 무엇이 다른지에 대하여 나로서는 전혀 확신할 수 없다. 당시의 배경에 대한 설명이 정확히 선행되지 않는 이상, 해당 사회가 ‘성과사회’가 아닌 ‘규율사회’라고 말하는 한병철의 주장은 나에게는 설득력을 잃는 것 같다.
#2. 메시아적
인용문 #4에는 아감벤의 해석을 놓고 ‘메시아적’인 해석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병철은 언급하고 있다. 도대체 메시아가 무엇인가? 어떤 위대한 성소를 말하는 것이라, 그의 해석은 신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3. 카프카의 ‘단식곡예사 Hungerkuenstler‘
위의 인용문들에는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카프카의 ‘단식곡예사’에서의 ‘단식곡예사’의 죽음을 저자 한병철은 ‘바틀비’의 죽음과 나란한 관계에 놓고 있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단식곡예사’의 대략적인 서사, 즉 이야기는 어떠한가? 그러한 이야기를 알아야 그가 평행하게 이 둘을 놓은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