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춤 #21. 김현경, 절대적 환대

잠시, 멈춤 #21. 김현경, 절대적 환대

2021-06-02 0 By 커피사유

잠시, 멈춤 시리즈는 필자가 읽은 글 중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일부, 혹은 전부 인용하고, 필요에 따라 주석을 곁들이는 등, 커피, 사유의 글 모음집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로 포스팅되는 모든 글의 경우, 필자가 쓴 글이 아님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글의 출처는 ‘본문’ 단락 가장 밑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본문

이 글에서는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의 제6장. “절대적 환대”의 내용 중 필자가 기억해두고 싶은 일부 부분들을 발췌하여 모아두고 있음을 밝힙니다.

#1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자리를 준다/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 딸린 권리들을 준다/인정한다는 뜻이다. 또는 권리들을 주장할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환대받음에 의해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권리들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다.

환대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hospitality는 ‘우호’로도 번역되는데, 이러한 번역을 통해 이 단어가 우정이나 적대와 맺는 관계를 좀더 분명하게 표시할 수 있다. 사회가 잠재적인 친교의 공간을 가리킨다고 할 때, 누군가를 환대한다는 것은 그를 이 공간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것, 그를 향한 적대를 거두어들이고 그에게 접근을 허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아직 나의 벗이 아니지만, 언젠가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2

… “적대란 타인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라는 슈미트의 말을 상기할 때, 환대의 이 두 가지 의미는 하나로 합쳐진다. 환대란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며, 이러한 인정은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몸짓과 말을 통해 표현된다.

환대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은 환대를 사회의 외부에서 온 이방인들이 직면하는 문제로 여긴다. 하지만 이미 사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들의 자리가 조건부로 주어지는 한, 환대의 문제를 겪는다. 절대적 환대라는 말로써 나는 데리다가 그랬던 것처럼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환대를 가리키려고 한다. 데리다는 이러한 환대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적 환대에 기초한 사회를 상상할 수 있다. 아니 사회란 본디 절대적 환대를 통해 성립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절대적 환대가 불가능하다면, 사회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3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는 현대 사회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이다. 우리는 이것을 세 가지 층위에서 확인한다. 첫째, 모든 인간 생명은 출생과 더불어 사람이 된다. 둘째, 공적 공간에서 모든 사람은 의례적으로 평등하다. 셋째,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다(정체성 서사의 최종 편집권은 당사자에게 있다).

#4

태어난 생명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그 생명이 살 가치가 있는지 (더 이상) 따지지 않는 것이다. 칸트 철학의 전통에서 사람은 지극히 가치 있는 존재라기보다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존재임을 여기에 부기해두자. 칸트는 가격을 갖는 사물과 존엄성을 갖는 사람을 대립시킨다. 가격을 갖는다는 것은 비교할 수 있으며 대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이기에 가격을 갖지 않는다. “존엄성의 가격을 계산하고 비교하는 것은 곧 그것의 신성함을 모독하는 것이다.” 타자를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질문을 괄호 안에 넣은 채 그를 환대하는 것을 말한다. 타자가 도덕적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이러한 환대를 통해서이다. 타자는 사회 안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우리의 몸짓과 말을 통해 비로소 사람이 되고, 도덕적 주체가 된다(사람이란 법적, 도덕적 주체의 다른 이름이다).

#5

이 부분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라 적어 두었음을 밝혀둔다. 6월 2일자의 강의에서 뜻이 조금 더 명확히 밝혀진다면 그 때 이 부분에 대해 주석을 달아야 할 것 같다.

… 로버트 솔로몬은 사람의 개념이 중요해진 것은 우리가 익명성과 비인격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도시에서 낯선 사람으로 살아가는 경험이 ‘고향 마을에서’ 지내는 것만큼이나 흔해지는 사회에서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는, 특별히 확장된 개념이 요구된다. 이는 우리가 다른 문화보다 더 ‘문명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를 더 많이 겪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개인적으로 전혀 모르더라도 사람으로서 존중하는 것은 우리 사회와 같은 사회의 존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보통 ‘사회계약’과 결부되는 일련의 규약으로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인과적 전제 조건으로서 말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사람으로서 존중하지 않았다면, 우리 사회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6

… 사람으로 인지된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몸이 아니라 그림자로 인지된다는 것이다. 공적 공간에서 교환되는 상호작용의 의례는 개별적인 몸을 향하는 것 같지만, 기실 그림자에 바쳐지는 것이다.

#7

… 분배 정의를 포함하여, 정의에 대한 모든 요구는 성원권의 인정을 전제하기에, 인정은 재분배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8

한편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어져 있는 정체성의 규정 요소들, 예컨대 국적이나 출신 계급이나 인종이나 성별, 심지어 언어와 문화는 개인의 정체성 서사에 통합되는 한에서만 중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하고 부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의 핵이 더 이상 이런 요소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탕으로 정체성 서사를 써나가는 주체의 저자성(authorship) 자체임을 뜻한다. 정체성에 대한 인정은 특정한 서사 내용(“나는 레즈비언이다”)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서사의 편집권에 대한 인정이다. 우리는 정체성운동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지 못했더라도(펨 femme이나 부치 butch같은 단어를 모른다 해도) 그저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행위를 통해 그러한 인정을 표현할 수 있다(“네가 레즈비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오늘은 레즈비언이라고 고백하고 내일은 그것을 부인해도 상관없다. 나는 너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너 자신임을 인정한다”).

#9

이러한 고찰은 환대가 면책 혹은 망각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부모는 아이가 자기들로부터 나왔고, 한때 자기들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부모는 무엇보다 아이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 자기들이고, 그들이 아이를 죽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이 망각으로부터 사회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

#10

여기서 죽이는 것과 잡아먹는 것의 차이를 지적해두기로 하자. 식인은 단순히 죽이는 것과 다르다. 사람은 살해된 뒤에도 여전히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즉 ‘살해된 사람’으로). 하지만 그가 먹힌다면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음식으로(즉 사물로) 바뀌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컨텍스트에서는 우리는 우리가 살해하는 대상을 여전히 존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대상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먹는다는 것은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이다(타자는 나에게 삼켜지고 나의 일부가 된다). 그러므로 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명령으로서 식인 금기는 타자의 개체성(individuality)에 대한 인정의 의무를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식은 부모의 신체 일부에서 생겨났지만, 일단 세상으로 나온 이상 독립된 개체이고, 부모가 다시 흡수하여 무화할 수 없는 타자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11

루쉰이 여기서 공격하는 것은 봉건적 윤리, 그중에서도 효(孝)의 관념이다. 유교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일종의 채무 관계로 규정한다. 부모는 자식을 길러주었을 뿐 아니라, 그 이전에 낳아주었다. 자식은 부모에게 생명이라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것이다. 부모는 이 빚을 기억하고 있으며, 자식 역시 기억하기를 바란다. 효의 관념은 바로 이러한 소망의 반영이다. 효에 대한 언설은 자식의 몸이 여전히 부모에게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부모가 아플 때 자식이 자기 신체의 일부를 공양하는 의례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이런 예들로부터 유교 문화가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이다. 이야기 속의 효자는 도덕적 시험을 겪는 주체로 나타난다. 그는 자연스러운 본성(자기의 몸이나 자기가 낳은 자식을 아끼는 마음)과 문화적 명령(부모에게 진 빚을 먼저 갚아야 한다)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마치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을 들은 아브라함처럼 말이다. 이야기의 힘은 오히려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어렵다는 데서 나온다. 자연스러운 본성을 누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낄수록, 청중은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며 결말을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효자가 문화적 명령을 따르면서도 행복을 잃지 않는 것을 보고 안도한다. 아이를 묻으려고 땅을 파던 손순이 돌종을 발견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데려간 자리에서 제물로 쓸 양을 발견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늘은 효자의 진심을 확인하자 그를 시험에서 놓아주는데,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그처럼 오랜 세월 동안 인기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

#12

… 하지만 효는 충과 연결되어 있다. 유교적 가산제(patrimonialism)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 투영한다. 자식이 부모의 은덕으로 살아가듯, 신하는 군주의 은덕 – 성은 – 으로 살아간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서 은(恩)을 베푸는 사람, 즉 증여자는 언제나 군주이다. 신하가 군주를 위해 무엇을 하든 이는 보은, 즉 증여에 대한 보답으로 간주될 뿐, 은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성은은 무한히 큰 – 망극한 – 것이므로, 신하는 늘 빚진 상태에 있다. 이 빚은 실로 그의 목숨보다 무겁다. 그 앞에서는 목숨이 도리어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다. …

#13

결국 신체공양 의례가 제기하는 문제는 중국인(혹은 한국인)의 야만적 습속에 관한 것도 아니고, 유별나게 잔인한 심성에 대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한 사회가 성원권을 부여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유교 사회의 구성원들은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는 점에서 노예와 비슷하다. 물론 그들과 노예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들이 존재한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들은 사람이다. 노예에게는 아무런 명예가 없지만, 그들은 명예를 지니며 명예를 추구한다. 노예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람의 지위를 포기한다. 반면 효자와 충신은 사람다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하지만 이 차이들은 어떤 역설에 의해서 희미해진다. 유교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람다움을 증명하는 한에서, 조건부로만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인격은 지속적인 시험 아래 놓이며, 언제나 잠재적인 비난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이 모든 비난의 가능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죽음으로써 이 시험을 통과했을 때뿐이다. 유교 국가는 ‘효에 죽은’ 자식과 ‘충에 죽은’ 신하를 기리기 위해 비와 문을 세운다. 이 비와 문은 사회 안에 있는 그들의 자리를 표시한다. 그들은 비록 몸을 잃었지만, 그 덕택에 누구보다 확고한 자리를 갖게 된 것이다.

#14

사물의 본질은 종종 극단적인 사례 속에서 드러난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유교적인 채무 윤리를 한계까지 밀어붙인 예이다. 이 예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역설 또는 모순을 깨닫게 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사회적 유대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특공대의 전사들은 그들이 진 빚을 갚기 위해 죽음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빚진 것일까? 물건은 빚을 질 수 없다. 돌멩이나 페이퍼 나이프는 이 세상에 아무런 빚도 지고 있지 않다. 특공대의 전사들이 빚을 졌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사람임을 인정해야 한다. 빚을 갚은 후에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서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유교의 채무 윤리 전체에 대해 우리는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그의 의무에 대해 설교하면서 동시에 그의 살을 먹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유교 문화뿐 아니라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채무노예’라는 관념에 이미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기에 빚을 질 수 없다. 그는 어떤 빚도 없이 주인과의 비관계 속에, 순수한 적대 속에 있을 뿐이다.

#15

… 의무와 빚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는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사회를 만드는 것은 망각이다. 상대방을 죽일 수 있고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순수하고 어린아이 같은 망각인 것이다.

#16

절대적 환대를 규정하는 마지막 항목은 적대적인 상대방에 대해서도 환대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원을 확인하지 않는 환대나 답례를 기대하지 않는 환대보다 훨씬 더 실천하기 어려운 미덕처럼 보인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고, 대가를 전혀 계산하지 않고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돌변하여 우리를 해치려 할 때도 여전히 그럴 수 있을까?

데리다는 이 어려움을 강조하면서, 절대적 환대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타자가 당신에게서 가정이나 지배력을 빼앗는다 해도,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것이 무조건적 환대의 조건이다 – 당신은 당신의 공간, 가정, 나라에 대한 지배력을 포기한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순수한 환대가 있다면, 그것은 이런 극한까지 고양되어야 한다.”

… 데리다의 오류는 첫째, 환대를 사적 개인이 다른 사적 개인에게 자신의 사적 공간을 개방하거나 개방하지 않는 문제와 결부시킨다는 점이고 둘째, 주인의 자리에 사적 개인 대신 ‘국민’이 오는 것을 허용한다는 점이다. 절대적 환대가 공간에 대한 지배력의 포기를 함축한다고 주장하면서, 데리다는 가정과 나라를 나란히 놓는다(“당신은 당신의 공간, 가정, 나라에 대한 지배력을 포기한다”). 환대는 이렇게 해서 외부인을 맞이하는 문제, 또는 울타리를 개방하는 문제가 되어버린다. 환대는 주인과 손님의 대립 속에 갇힌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주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서 국민이 되고, 가족의 일원이 되는가?

#17

‘주인’은 내부에 타자들을 포함한다. 환대의 권리를, 칸트가 그랬듯이 공간에 대한 권리이자 교제의 권리, 즉 친교의 가능성으로 충전된 형이상학적 공간 – 사회 – 에 들어갈 권리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환대가 단지 이방인들이 겪는 문제가 아니며, 반드시 국경선과 관련된 문제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

#18

그러므로 환대란 어떤 사람이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 그가 사람으로서 사회 속에 현상하고 있음을 몸짓과 말로써 확인해주는 행위라고 말하기로 하자. 그 경우 데리다가 제시하는 절대적 환대의 세번째 조건을 수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떤 사람을 절대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18의 주석

교정 시설에 수감된 사람은 입소의 순간부터 인격을 부정당하는 경험을 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범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 그 자체가 범죄자에 대한 환대의 철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법 앞에 선다는 것이야말로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범죄는 (무국적자가) 인간적 평등을 다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는 아렌트의 냉소적인 발언은 이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 이진우, 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pp. 517 ~ 518).

#19

그런데 이런 의미의 절대적 환대는 이미 우리의 형법 안에서 실정적인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위의 원칙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사회는 개인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은 유사한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함이지, 사회가 피해자를 대신하여 가해자에게 복수하기 위함이 아니다.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 이 책은 근대적 형사제도의 초석이라 일컬어진다 – 은 이러한 생각을 간결하게 피력한다. “형벌의 목적은 오직 범죄자가 시민들에게 새로운 해악을 입힐 가능성을 방지하고, 타인들이 유사한 행위를 할 가능성을 억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형벌 및 그 집행의 수단은, 범죄와 형벌 간의 비례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간의 정신에 가장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인상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수형자의 신체에는 가장 적은 고통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베카리아에 따르면, 형벌의 무게는 “범죄자가 형벌을 통해 받은 해악이 범죄로부터 얻는 이익을 넘어서는 정도로 충분하다.” 여기서 형벌의 경중을 결정하는 잣대는 피해자가 받은 고통이 아니라, 가해자의 관점에서 계산한 이익과 손해이다. 이런 접근법은 범죄자가 형벌을 받음으로써 “죄를 씻어야 한다” – 이 표현은 형벌이 의례(복수 의례이지 정화 의례)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던 시대의 흔적을 드러낸다 – 는 생각과 분명하게 단절하고 있다.

형벌이 범죄자에 대한 공공의 복수가 아니라는 생각은 사형폐지운동이나 감옥개혁운동의 이론적인 출발점이자, 대중이 가장 자주 오인하는 형법의 원리이다. 대중은 형벌의 무게가 피해자의 고통에 비례하여 결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성폭력 피해자가 여전히 후유증에 시달리는데도 가해자가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는 일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수십 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이코패스가 안락한 감방에서 여생을 마친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한다. 복수를 다룬 영화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대중은 악인이 자기가 저지른 것과 똑같은 일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통쾌해한다. 그러면서 현실에서는 왜 이런 식의 해결이 금지되어 있는지 의아하게 여긴다.

#20

법은 어째서 범죄자에 대한 복수를 포기한 것일까? 여러 가지 설며잉 가능하겠지만, 법이 군주의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사회계약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가장 결정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법을 어긴 사람은 그가 이미 동의한 규칙에 따라 벌을 받는다. 즉 벌은 계약의 일부이며, 벌을 받는 동안에도 계약은 유지된다. 이것은 축구 경기에서 레드 카드를 받은 선수가 운동장 바깥으로 나간 뒤에도 여전히 규칙의 지배 아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벌이 보복이라고 말한다면, 벌이 지니는 이 계약적인 속성이 깨어진다. 보복이란 본래 보복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복은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공격을 내포한다. 그 결과, 보복당한 사람은 보복한 사람과 예전의 관계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다(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건 그 때문이다. 보복당한 사람이 다시 반격하지 않으면, 그는 상대방보다 ‘낮은’ 위치로 떨어진 채 남아 있게 된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 형벌은 규칙의 위반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고, 위반한 사람의 인격을 문제 삼지 않는다. 형기를 마친 사람은, 레드 카드를 받은 선수가 다음 경기에 출전하는 것처럼, 명예에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고 자연스럽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 사람이 사회계약에 계속 참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모든 계약은 주체들의 인격적 동등성을 전제하는 까닭이다. …

#21

… 푸코는 (베카리아가 의존하는 것 같은) “그러한 서정적 표현이 형벌을 정하는 계산의 합리적 기초를 발견하지 못하는 무력함을 드러내주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그려면서 거기에는 아마도 어떤 합리성이 존재하지만, 그 합리성이 고려하는 것은 범죄자의 고통이 아니라 재판관과 구경꾼의 고통이라고 냉소적으로 지적한다.

하지만 베카리아가 무제한의 처벌권을 인정하면서 단지 감성적인 호소에 의존하여 형벌의 경감을 시도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베카리아는 오히려 범죄에 대한 처벌이 사회계약의 틀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범죄자는 사회의 바깥에서 사회와 적대하면서 무한한 복수의 가능성에 노출되는 게 아니라, 사회 안에 있으면서 그 자신도 동의하는 규칙에 따라 정해진 만큼만 처벌받는 것이다. 베카리아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형에 반대한다. 사형은 범죄를 사회 바깥으로 내몰고 사회의 적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사회의 적이라면, 그는 더 이상 사회의 규칙을 따를 필요가 없어진다. 그의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의 힘은 그에게 미치지 못하고 그의 앞에서 멈추어 선다. 그는 법의 바깥에 있으므로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다. 따라서 사형은 더 이상 형벌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폭력일 뿐이다. 베카리아의 다음과 같은 말은 사형이 내포하는 역설을 정확히 지적한다. “사형은 어떤 의미에서도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시민에 대한 국가의 전쟁이다.” 그런데 이 말은 범죄자를 사회의 적으로 간주하는 한, 다른 모든 형벌에도 해당된다. 범죄자가 사회 바깥에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어떤 처벌의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권리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주체들이 먼저 상호 인정 관계 속에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22

…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생겨난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은 권리가 있다는 말과 동의어인가? 범법자에게는 살 권리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루이에게 그를 죽일 권리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범법자가 사회 바깥에 있다면, 즉 그가 우리에 대해 아무런 의무를 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를 향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런데 루소는 “전쟁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루소의 오류가 드러나는 것이 이 지점이다. 전쟁의 승자가 포로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은 포로가 원래 속해 있던 사회 바깥으로 끌려나와 사물의 상태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 또는 부족이 포로를 되찾아오지 않는 한, 포로는 그 상태에 머물게 된다. “전쟁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패자가 포로를 포기했음을 뜻한다. 즉 승자에 대해 “전쟁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상대방은 포로 자신이 아니라 그가 속해 있던 나라 또는 부족이다. 포로 자신은 더 이상 법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권리를 인정해줄 수 없다. 사회 바깥으로 추방된 범법자는 포로와 같은 위치에 놓인다. 범법자를 처형하는 사회는 범법자로부터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을 수 없다. 또한 범법자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회로부터 그것을 인정받을 수도 없다. 결국 사회는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확언할 뿐이다. 이 경우 권리라는 단어는 아무 내용도 없는 무의미한 수사에 지니지 않는다.

#23

… 우선 루이 16세의 처형은 18세기 사법 개혁의 성격에 관한 푸코의 견해를 반박하는 예로 간주될 수 있다. 왕은 사회 바깥에 있으므로 형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생쥐스트의 말은, 범죄자는 사회의 적이라는 루소의 단언이 결코 이 시대에 범죄와 형벌의 관계를 사고하는 일반적인 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범죄자는 사회계약을 위반했지만, 여전히 사회 안에 있다. 그는 형법이 보장하는 피고의 권리들을 지닌 채, 재판을 거쳐 법이 정한 만큼만 벌을 받는다. 법 앞에 선다는 것은 범죄자의 권리인 것이다. 전쟁의 논리는 범죄자에게서 이 권리를 박탈한다. 절대적인 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일체의 환대가 철회된다는 것, 또는 사회 바깥으로 자리가 옮겨진다는 것, 또는 같은 말이지만, 법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한편 19세기 후반의 범죄자=괴물 담론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롬브로소가 이끄는 ‘실증학파’가 베키리아와 벤담을 잇는 ‘고전학파’와 대립했다는 사실을 – 전자는 사형제도에 찬성했지만 후자는 반대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 기억해야 한다. 실증학파는 형벌을 범죄에 대한 처벌에서 범죄자에 대한 처벌로 (즉 행위에 대한 처벌에서 인격에 대한 처벌로) 바꾸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교정 시설, 보호관찰제도, 부정기형 등 얼핏 보기에 인간적이고 진보적인 제도들을 고안하였다. ‘교정 불가능한’ 범죄자는 더 무겁게 처벌하고, 우발적인 범죄자는 정상을 참작하여 형을 감해주며, 죄를 뉘우치는 정도에 따라 형기를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이 제도들의 핵심이다. 형벌이 범죄의 성질에 엄격히 비례해서 주어져야 하며,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었던 고전학파는 실증학파의 주장을 사법적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실증학파의 개혁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나라는 미국인데, 스피븐 제이 굴드는 형량을 개인화나는 이런 제도들이 이 나라에서 인종적, 계급적인 억압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위험한 사람들은 좀더 긴 형을 받고, 형기를 끝낸 후의 생활도 더 엄중하게 감시된다. 또한 부정기형제도 – 롬브로소의 유산 – 는 모든 측면에 걸쳐 복역자의 생활에 보편적이고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한다. 그의 서류가 그의 수형 생활을 지배하고 연장한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감시되고, 조기 석방이라는 당근을 눈앞에 둔 채 행동을 심사받는다. 게다가 이 제도는 위험을 격리한다는 롬브로소의 원래 의도대로 사용되고 있다. 롬브로소에게 위험이란 원숭이와 비슷한 낙인을 가진 선천적 범죄자를 의미했다. 오늘날 그것은 종종 반항자, 가난뱅이, 그리고 흑인을 뜻한다.”

#24

… 나는 베카리아의 사형폐지론이 사회의 구성원리에 대한 깊은 통찰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 통찰의 빛이 18세기 이래 지금까지 사법 개혁을 둘러싼 모든 논의의 지평선을 밝히고 있다고 믿는다. 법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환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환대란 타자를 도덕적 공동체로 초대하는 행위이다. 환대에 의하여 타자는 비로소 도덕적인 것 안으로 들어오며, 도덕적인 언어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사회를 만드는 것은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바로 환대이다.

출처

현대의 지성 159.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작. 문학과 지성사. (2015). 제6장. <절대적 환대>.

주석

솔직하게, 너무 많은 영감과 어떤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준 글이라 충격의 여파가 가시려면 적어도 자고 일어나야만 할 것 같다. 나는 내가 어떤 일련의 전율을 느꼈거나 혹은 무언가 기억해두어야 겠다는 강한 충동이 드는 글귀들, 즉 곱씹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글귀들을 여기에 적어두었는데(그리고 좀 옹졸하게 덧붙이자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 한 개를 포함하여 – 그것은 발췌문 #5이다), 이것에 대하여 내가 든 생각이란 아주 복잡하고 양가적이라 나는 일단 이 수많은 생각들을 당장에 급한 수학과 물리학 기말이 끝나고 나서 주석으로 총 정리하기로 기약하고 일단은 미루어두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6월 2일의 서울대학교 강우성 교수님의 <문학과 철학의 대화>에서 좀 더 많은 것들, 그리고 교수님께서 “대성당”과 이 글의 무엇을 연결하시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인데, 그 이야기가 – 교수님의 서사가 – 무언가 또 다른 영감을 줄 수도 있을 것이므로, 주석은 일단 달지 않기로 하자. 즉, 보류다. 보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