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춤 #22. 김윤식, 『살아 있는 정신에게』
잠시, 멈춤 시리즈는 필자가 읽은 글 중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일부, 혹은 전부 인용하고, 필요에 따라 주석을 곁들이는 등, Cafe 커피사유의 글 모음집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로 포스팅되는 모든 글의 경우, 필자가 쓴 글이 아님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글의 출처는 ‘본문’ 단락 가장 밑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본문
군은 돼지였다. 군의 입학이 유독 축복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조금 생각해보기로 하자. 군의 입학이란 한갓 우연성의 일종이라 볼 수 없겠는가. 군보다 머리 좋지 않은 자, 이 세상에 혹시라도 있을까. 어림도 없는 일이다. 당초부터 단춧구멍 뚫는 데로 간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우연히도 군은 밥술이나 먹는 집에서 태어났고 그 때문에 고액의 과외 또는 재수도 할 수 있었고 혹은 튼튼한 육질과 맑은 귀를 유지할 수 있지 않았던가. 밥은 잘 먹었느냐, 잘 잤느냐, 내복 입었느냐, 공부했느냐고 묻는 보살핌 속에 군이 놓여 있지 않았을까. 심지어 기르는 강아지조차도 군의 안색을 살피는 그런 속에서 군은 살았다. 무슨 대학을 가야 된다든가, 무엇을 전공해야 된다는 것도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갈데없는 돼지였다.
군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그들은 아마도 사랑이란 위선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리라. 군이 돼지 또는 노예였음이란 물론 군의 잘못이 아니리라. 군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닌 까닭이다. 군은 다만 태어나졌을 따름. 던져진 존재였던 것. 어디에 던져졌던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 아니겠는가. 거기 군은 혼자 던져졌고 따라서 불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혼자 있음, 불안, 무서움, 이 삼각형의 도식이 군의 본래의 모습이었다. 이 조건을 철저히 은폐시킨 자 누구였던가. 다름 아닌 지금까지의 군을 에워싼 아비 어미이고 환경이었다. 군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그들은 아마도 사랑이란 위선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어느 순간 군은 마침내 운명의 순간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의 간교한 전략을 간파하는 순간이 오고 만다. 그 계기란 도처에서 예감처럼 온다. 군이 창공의 별을 응시할 때 온다. 헤겔을 읽을 때 온다. <무진기행>을 읽을 때 온다. 릴케를 읽을 때 온다. <태백산맥>을 읽을 때 온다. 들판에 외로이 핀 이름 없는 꽃을 볼 때 온다. 가차 없이 오되 예감처럼 온다.
어떤 역사적 사회적 조건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나’ 자신의 세상에서의 있음의 의미란 무엇인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어떤 방향성도 해답도 없음을 서서히 군은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지금 여기 ‘나’가 있다는 것. 이것만은 절대로 의심할 수 없다. 여기 ‘나’가 있되 혼자 있다는 것. 불안하다는 것. 무섭다는 것. 이 엄청난 짐을 지고 있다는 것.
이 짐은 아무도 벗어날 수 없다. 차라리 의무라 불러야 마땅하리라. 의무는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의무니까. 이 의무를 수행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있다. 권리가 그것. 혼자 있음으로 말미암아 감당해야 될 불안과 공포를 대가로 하여 비로소 얻어진 권리. 이를 두고 자유라 부를 것이다. 자유이되, 무한한 자유가 아닐 수 없는데 그것은 던져진 존재로서의 그 의무에 정비례하는 것, 이를 결단 혹은 계획이라 부를 것이다. ‘나’는 무엇이며,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그 아무도 궁극적으로는 관여할 수 없기에 그 계획은 저주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의무 그것만큼 권리의 처절함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지 않겠는가. 돼지에서 벗어나 이 저주스러운 자유인으로 변신하는 장대한 장면의 입구에 작은 팻말이 하나 서 있지 않겠는가. 거기 적힌 글씨를 군은 이제 똑똑히 읽을 수 있으리라. ‘대학’이라는 두 글자가 그것. 군은 아는가. 훔볼트가 세운 저 베를린대학 창립 이념을. ‘혼자 있음’과 ‘자유’로 그 이념이 요약되어 있음을. 대학의 주체는 학생도 선생도 건물도 아님을. 이념 그것이 이곳의 주체임을. ‘살아 있는 정신’이라 부르는 이 자유 앞에 군은 지금 서 있다. 군의 입학이 축복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장면에서이리라.
출처
서울대학교 대학글쓰기1 교재편찬위원회 (2019). 김윤식, <살아 있는 정신에게>. 대학 글쓰기 1.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주석
이 글은 2021학년도 2학기 김혜영 교수님의 서울대학교 대학 글쓰기 1 수업에서 좋은 글의 예시로 인용된 글이다. 교재에 수록된 글을 읽어보라고 교수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처음에는 글의 어조와 단어 선택에서 유발된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으나, 이후 사실 그러한 어조와 단어 선택이 글의 주제를 더욱 잘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음을 깨닫고는 드리운 부정적 감각을 거두게 되었다. 글이 실은 대학에 입학하여 독립한 학생들의 앞날을 축복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글에 대해서는 수업 시간에 다음의 분석과 평가를 내린 바가 있어, 그대로 여기에 옮겨 둔다.
분석
- 글의 문체적 특징: 다소 불편한 표현과 단정적인 어조를 사용하고 있으나, 내용은 문체적 특징과는 정반대의 것임.
- 가장 핵심 부분: “돼지에서 벗어나 이 저주스러운 자유인으로 변신하는 장대한 장면의 입구에 작은 팻말이 하나 서 있지 않겠는가. 거기 적힌 글시를 군은 이제 똑똑히 읽을 수 있으리라. ‘대학’이라는 두 글자가 그것. 군은 아는가.”
- 가장 인상적 부분: 어린 아이 시절을 ‘노예’ 혹은 ‘돼지’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종속적인 주체, 보호받는 주체였음을 강조한 부분과, ‘저주스러운 자유인’이라는 (통상적 관념에 기댈 때)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한 부분이 가장 인상적임.
- 글의 장점: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과 정서를 전달하기 위해 상세한 비유와 묘사를 사용하여 정확히 이를 전달하고자 했음.
- 글의 단점: 다소 강압적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무례’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여 읽는 독자로 하여금 처음에 거부감을 느끼게 함. (글의 단점을 일으키는 문체적 특징을 사용하지 않고서 장점만을, 즉 글의 목적만을 취할 수는 없던 것일까?)
- 글의 주제는 무엇인가?: “과거의 보호를 벗어나 대학 입학으로 홀로서기를 하려는 신입생들에 대한 축복” + “신입생들에게 독립, 자유를 말하려 하는 것”
평가
김윤식의 <살아 있는 정신에게>는 불편한 표현과 단정적 어조에서 느껴지는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이러한 표현들을 통해 과거의 보호를 벗어나 대학 입학으로 홀로서기를 하는 신입생들에 대한 축복을 건넴과 함께 독립과 자유를 말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