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hor: 커피사유

낮에는 학구열과 호기심이 넘치는 학자, 밤에는 실리적인 프로그래머, 새벽에는 새벽만의 또렷한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블로거. 별난 사람, 커피사유입니다.

구조대 없는 등산

By 커피사유 2025-06-27 0

“엄마 저게 뭐야?” 온화한 인상의 여자가 풍요로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케이블카야. 저 안에 사람들이 있어. 이렇게 줄을 타고 꼭대기로 올라오는 거야.” 아이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저렇게 높이 올라가다 갑자기 멈춰버리면 어떡해?” 여자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누군가 구해주러 올 거야.” 유리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투명한 유리컵을 우하하게 감아 쥔 손을 보며 한 번 더 흡족해했다. […]

덮어서 꾸미고, 애써 자격이 있다 생각하기

By 커피사유 2025-06-27 0

소비는 내가 현재 대도시의 왕성한 생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줬다. 나 역시 그 신진대사에 속해 있다는 느낌. 그리하여 뭔가 지불할 때, 나는 더 잘 생산할 수 있을 것 같은 암시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 언론사 시험에 몇 번 떨어졌다. 공중파 방송국의 프로듀서가 되고 싶었는데 오래 공부할 용기가 안 나 재빨리 외국계 제약회사 쪽으로 눈을 돌렸다. […]

고(苦)와 감(甘) 사이, 운(耘)

By 커피사유 2025-06-24 0

기옥 씨가 알기로 공항 안에 제일 많은 단어는 ‘출발’이란 말과 ‘도착’이란 말이었다. 그런데 기옥 씨는 이 순간 수천 개의 표지판 아래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고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옥 씨가 하아― 얕은 숨을 뱉었다. 배가 고파 입에서 쓴 내가 났다. 생각해보니 오늘 먹은 것이 없었다. 그러자 문득 아까 가방 속에 넣어둔 마카롱이 떠올랐다. 어느 아기 엄마가 놔두고 가는 걸, 음식 버리는 게 죄스럽고 아까워 따로 챙겨둔 거였다. […]

방을 닦고 장을 보고 삶을 불리기

By 커피사유 2025-06-24 0

기옥 씨는 오전에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쉬었다. 며칠 전 업체에서 ‘그날도 할 수 있느냐’는 전화가 왔을 때 망설이다 ‘어렵겠다’ 말해둔 덕이었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굳이 명절 때까지……’ 싶어 둘러댔던 거다. 그리고 기옥 씨는 그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같은 알바 자리를 두고 경쟁 중인 십대 아이들이 의식됐지만, 자신이 이 세상의 풍습에 속하고, 풍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게 좋아서였다. […]

비행운(秘行殞)

By 커피사유 2025-06-24 0

하지만 이런 역동적인 풍경과 달리, 멀리 바깥에서 본 인천공항의 모습은 고요하기만 했다. 공항 리무진 버스에서 소리가 소거된 채 나오는 연합뉴스 화면처럼 그랬다. 허허벌판 섬 한쪽에 외따로 핀 문명의 꽃이라 그런 듯했다. 현대의 복잡하고 거대한 시스템이 정적(靜的)으로 평화롭게 돌아갈 때, 그 무탈함이 주는 이상한 압도, 안심, 혹은 아름다움 같은 것이 공항에는 있었다. […]

부활 #9. 호모 피데스, 마키나 피데스

By 커피사유 2025-06-23 0

인간은 오류를 저지르면서까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고자 하기 때문에 죽음을 택하지 않고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추측을 인공지능으로 확장할 필요를 느낀다.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인공지능,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인공지능, 무지와 공포와 자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인공지능. 피데스(Fides)라고 불리는 저 기반 위에 동일하게 선 두 지능을 나는 그려본다.

탐서일지 #25. 김애란, 『비행운』 I

By 커피사유 2025-06-21 0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닌, 그 일부로 존재한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속 저 문장이 김애란의 《비행운》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낀다. 문장은 책과 일상을 건너 또 다른 문장들을, 우리가 간과한 삶의 여러 측면들 혹은 여러 삶의 측면들을 살포시 들어올려 그 흔적들을 보인다.

떠내려가고 뒤섞이는 것들

By 커피사유 2025-06-19 0

세계는 비 닿는 소리로 꽉 차가고 있었다. 빗방울은 저마다 성질에 맞는 낙하의 완급과 리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듣다 보니 하나의 소음처럼 느껴졌다. 자연은 지척에서 흐르고, 꺾이고, 번지고, 넘치며 짐승처럼 울어댔다. 단순하고 압도적인 소리였다. 자연은 망설임이 없었다. 자연은 회의(懷疑)가 없고, 자연은 반성이 없었다. 마치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 같았다. […]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By 커피사유 2025-06-19 0

… (전략) … 사람들은 종종 자기 심박동에 홀려 신을 벗고 길 떠나는 꿈을 꿨다. 또는 알 수 없는 초조를 어쩌지 못해 옷을 벗고 아내 위에 올라탔다. 잘 모르지만 그랬을 거란 느낌이 든다. 우리가 붙잡고 헤매는 실 끝에는 언제나 가는 눈을 반짝이며 웅크리고 있는 원시인이 있으니까. 그들은 늘 우리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게다가 장마철엔 살냄새가 짙어졌다. […]

탐서일지 #24.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 II

By 커피사유 2025-06-19 0

당초 쿤의 물음은 과학 일반에 대해 국한되었지만, 우리는 그의 의심을 교육과 진리 일반으로 확장할 줄 알아야 한다. 진리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가? 교육은 정말 그런 진리를 가르치는가? 인간의 지성 전통은 교육이 가르치는 바로 그 방식대로 진행되어 왔는가? “Veritas Lux Mea.” 저 모토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우리는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