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화수월 #1. 《OMORI》, 모임 계획서
2025-02-04비록 작은 창 속에 펼쳐진 여러 층위의 세계였지만 나는 기꺼이 뛰어들었고, 주인공을 따라 위와 아래를 넘나들며 다시 한 번 인간 정신의 취약성을 깊게 음미했다. 게임 《OMORI》를 통해 내 정신이 어떻게 ‘심연’을 돌아다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만들어낸 조각들, 이들을 이제 하나씩 풀어낼 때가 되었다.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커피와 사유(思惟)가 있는 공간.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비평’들을 모은 공간입니다.
비록 작은 창 속에 펼쳐진 여러 층위의 세계였지만 나는 기꺼이 뛰어들었고, 주인공을 따라 위와 아래를 넘나들며 다시 한 번 인간 정신의 취약성을 깊게 음미했다. 게임 《OMORI》를 통해 내 정신이 어떻게 ‘심연’을 돌아다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만들어낸 조각들, 이들을 이제 하나씩 풀어낼 때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도처에서 금지에 대한 이의가 제기됨을 목격한다. 아래로 내려가서 보았을 때, 이것은 ‘문을 열고 나가는’ 과정이며 스스로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만나는 과정이다. 〈페미니즘〉은 금지가 목표하는 일원성과 맞서 싸운다. 그리고 이 철학은 바로 이 방법에 의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덕수궁 속에서 발견된 것이란 모두 격동기였던 것이다. 고종의 격동기, 그리고 나의 격동기. 인간은 한 치 앞도 내려다보기 힘든 눈보라 속에서 나아가는 존재. 그 눈보라에 때로는 쓰러지기도 하고 하지만 다시 일어나기도 하면서, 비틀거리지만 천천히 걸어나가는 존재. 삶이 그런 것이다. 인간이 그런 것이다.
니체가 도덕의 절대성에, 마르크스는 경제질서의 절대성에, 프로이트가 이성의 절대성에 의문을 던졌다면, 페미니즘은 ‘젠더(gender)’의 절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으로 평가할 수 있어 보인다. 페미니즘은 우리가 의심없이 전제해왔던 명제들에 대한 재고를 권유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페미니즘의 담론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이해할 수 없더라도 또 동의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그들에 대한 반목을 거두어야 하며 의견을 듣고 최대한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운명에 있다. 밀란 쿤데라의 문장은 여기서 그 진가를 온전히 발휘한다. “우리가 아무리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아주 슬픈 날이다.
오늘의 참사는 단순히 ‘운이 없었다’라는 말로 단정될 수 없다. 모든 죽음에는 사회적 책임이 있는 법이다. 시스템과 매뉴얼들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 우리가 보지 못했던 구조상의 위험들이 무엇이었는지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같은 죽음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여러 유혹에 흔들리고, 위험을 피하고 싶어한다. 나 또한 목전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토요일 늦은 밤까지 추운 겨울 속에서 서로의 곁에 서 있던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냉철한 이해타산만으로 살기에는, 항상 위험을 피하면서 살기에는 우리의 마음 속 한켠의 바로 그것이 너무나도 귀중하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회귀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무슨 사랑을 말하는가?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는 초인의 사랑을 말한다. 책을 마무리하며 나는 단 한 가지의 질문만을 남겨두게 된다. “영원회귀 속의 인간은 가능한가?”
진정으로 철학적이며, 진정으로 인간적인 질문.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인간 존재가 처한 가장 심오하면서도 가장 감동적인 부조리, 그것은 쿤데라에게는 무거움과 가벼움의 대립으로, 나에게는 혼돈과 질서의 대립으로 간주된다.
니체, 알베르 카뮈, 질 들뢰즈 그리고 밀란 쿤데라. 혹자는 이들에게 무슨 공통점이 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유약한 인간이 만들어낸 〈키치〉라는 가장 인간적인 결과물 앞에서, 나는 스스로의 철학적 여정이 중간 기착지에 도달했음을 인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