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23. 김애란, 『비행운』 I
2025-06-21“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닌, 그 일부로 존재한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속 저 문장이 김애란의 《비행운》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낀다. 문장은 책과 일상을 건너 또 다른 문장들을, 우리가 간과한 삶의 여러 측면들 혹은 여러 삶의 측면들을 살포시 들어올려 그 흔적들을 보인다.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커피와 사유(思惟)가 있는 공간.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일기’와 ‘일상’을 모은 공간입니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닌, 그 일부로 존재한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속 저 문장이 김애란의 《비행운》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낀다. 문장은 책과 일상을 건너 또 다른 문장들을, 우리가 간과한 삶의 여러 측면들 혹은 여러 삶의 측면들을 살포시 들어올려 그 흔적들을 보인다.
당초 쿤의 물음은 과학 일반에 대해 국한되었지만, 우리는 그의 의심을 교육과 진리 일반으로 확장할 줄 알아야 한다. 진리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가? 교육은 정말 그런 진리를 가르치는가? 인간의 지성 전통은 교육이 가르치는 바로 그 방식대로 진행되어 왔는가? “Veritas Lux Mea.” 저 모토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우리는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다.
객관성과 과학. 대중은 객관성의 대명사가 곧 과학이라고 생각하기에, 과학적 사고를 통해 그 어떠한 주관에도 치우치지 않은 판단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정말 과학은 그러한가? 과학은 정말 믿음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과학이 절대성의 화신이라는 지위를 획득한 오늘날, 우리에게는 위험한 질문을 던질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전례없는 시간, 전례없는 사유, 전례없는 회복. ― 철학적 사유가 〈죽음〉과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운 지금,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되짚어본다. 나는 방금 막 〈우물〉에서 빠져나왔다. 불타고 있는 〈숲〉과 아침을 기다리는 〈초원〉 사이에 자리한, 모든 인간이 가진 그 〈우물〉로부터.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 《노르웨이의 숲》은 이 문장에 담긴 인간 존재의 근간에 자리한 두 개의 항에 주목한다. 〈죽음〉, 그리고 〈삶〉. 인간은 이 둘의 경계에 놓인 존재이기에 가운데 자리한 〈우물〉 옆에서 질문을 던진다.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마침내는, “왜 인간은 자살하지 않는가?”라고.
인간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타인에 대해서는 또 어떨까? 그러나 우리는 오직 자신과 타인 모두를 타자로써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최초의 단절, 즉 〈상실〉은 여기서 시작된다. 철학, 문학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학문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갈 때 항상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지난 시간의 물음은 여전히 이어진다. 맨 처음부터 묻고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자의적으로 그어진 경계들이 허물어지고 반대편을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말의 의미에 전율하게 된다. 문 앞에서 공포와 불안을 느끼는 인간의 운명은 영원하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인간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된다.
“인간은 영원히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불가해한 단절, ‘문’이 있다. 심연이 그를 들여다봄에도 인간은 닿을 수 없는 것을 탐한다. 그렇기에《OMORI》는 우리를 문 앞에 세운다. 문고리를 움켜쥐며 나는 망설인다. 가장 치명적인 물음이 울려퍼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마침내 심연이 나에게 묻는다…. “문을 열 것인가?”
반년 전 즈음 보낸 편지다. 처음과 끝이 맞닿는 순간을 인식하노라면 사람은 어느 때보다도 가장 깊어지고 솔직해지곤 한다. 대학의 토양 위에서 처음과 끝이 엇갈리는 순간에는 더더욱.
우리 자신 안에 존재하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 근대 이후의 철학과 예술 모두는 바로 이 부분과 ‘이해할 수 있는 부분’ 사이의 공존에 주목해왔다. 《OMORI》는 이 가장 흥미로운 모순적 지탱을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느끼게 한다. 우리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따라가고 있다. 카뮈의 ‘부조리’는 분명 그 핵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