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 살인만큼은
2022-04-05… 오래 전 나는 이렇게 썼다. “어떤 살인은 변호된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이 써야 할 것만 같다. “이 살인만큼은 변호되어서도, 변호해서도, 그리고 잊혀져서도 안 된다.”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는 당초의 문장을 쓰던 그때보다도 더욱 깊어지고 있다. https://twitter. […]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커피와 사유(思惟)가 있는 공간.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너무 짧아서 포스트로 올리기는 힘든, 글과 생각 모음집.
… 오래 전 나는 이렇게 썼다. “어떤 살인은 변호된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이 써야 할 것만 같다. “이 살인만큼은 변호되어서도, 변호해서도, 그리고 잊혀져서도 안 된다.”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는 당초의 문장을 쓰던 그때보다도 더욱 깊어지고 있다. https://twitter. […]
#1. ……. 이제야 알 것 같다. 니체의 〈자기초극〉,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하에서의 소외〉, 프로이트의 〈원초아, 자아, 초자아〉,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의지〉가 나에게 미친 영향을. 니체 철학에 내가 이렇게까지 집착하게 된 핵심적인 이유를 나는 그동안 “스스로의 만성적인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하여”라고 진술해왔다. “니체의 철학은 인간 자신에게 주어진 어려움과 고통을 긍정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주체적인 인간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을 들은 나에게 니체 철학은 훌륭한 정신적 지주요 하나의 길라잡이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
#1. 나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과의 투쟁은 결국은 나 자신과의 투쟁으로 환원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 자신 대 나 자신의 투쟁으로 환원된다. 이 투쟁으로의 환원은 그 모든 것과의 투쟁은 다름아닌 나 자신의 살아있음의 증거라는 것을, 이보다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게 해 준다. #2. 나 자신과의 투쟁은 결국은 어떤 종류의 살해인 셈이다 ― 나 자신을 나 자신이 성공적으로 살해하느냐 혹은 그렇지 못하느냐가 나 자신의 살아있음을 결정하는 것이다. […]
#1. 니체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차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너의 삶이라면, 너의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는 약 2년 전부터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답을 다듬어왔다.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내 삶의 의미를 구성한다.” 이 대답은 니체가 도출한 대답과 유사한 것 같다. 그러나 니체의 대답은 삶의 매 순간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졌으나 나의 대답은 그렇지 못하고 있다. […]
대학의 강의가 열리고 한창 수업을 듣는 요즘, 학부 Lab Internship까지 같이 해서 수치모델 연구실에 자리 하나를 얻어 인턴십 생활까지 하게 되면서 시간이 남아 돌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예전에는 모른다는 것으로부터 오는 무능과 무지의 공포가 내 목을 조르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무능 · 무지의 공포의 손아귀 위에서 시간의 부족함이 더 세게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이미 투표는 종료되었고 남은 것은 결과의 확인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개표 현황을 보고 있다. 양당 후보의 득표율 차이가 1%p도 나지 않아서 아주 보는 내내 피를 말리고 있다. 오늘 계획은 이미 한 표를 행사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신경 끄고 내 할 일을 하는 것이었으나, 개표율이 75%가 넘어가는 이 순간에도 양쪽 경합이 극심해서 도대체 안심할 수가 없다. […]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에게는 보어의 〈수소 원자 모형〉에서 등장하는, 〈에너지 준위〉와 닮은꼴의 기분 준위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된다. 즉, 나는 지금 나 자신의 감정의 상태가 연속적으로 변화한다기 보다는 불연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에 차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와 같은 〈기분 준위〉의 설정이란 연속적인 데이터들을 내가 분류해놓는 과정에서 데이터의 연속성을 불연속성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한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내 〈기분 준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상세 설명은 평소 내 급격한 기분 변동을 꽤나 잘 설명해 주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