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Quotes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마음에 든 문구들을 모아두는 작은 도서관.

고(苦)와 감(甘) 사이, 운(耘)

By 커피사유 2025-06-24 0

기옥 씨가 알기로 공항 안에 제일 많은 단어는 ‘출발’이란 말과 ‘도착’이란 말이었다. 그런데 기옥 씨는 이 순간 수천 개의 표지판 아래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고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옥 씨가 하아― 얕은 숨을 뱉었다. 배가 고파 입에서 쓴 내가 났다. 생각해보니 오늘 먹은 것이 없었다. 그러자 문득 아까 가방 속에 넣어둔 마카롱이 떠올랐다. 어느 아기 엄마가 놔두고 가는 걸, 음식 버리는 게 죄스럽고 아까워 따로 챙겨둔 거였다. […]

방을 닦고 장을 보고 삶을 불리기

By 커피사유 2025-06-24 0

기옥 씨는 오전에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쉬었다. 며칠 전 업체에서 ‘그날도 할 수 있느냐’는 전화가 왔을 때 망설이다 ‘어렵겠다’ 말해둔 덕이었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굳이 명절 때까지……’ 싶어 둘러댔던 거다. 그리고 기옥 씨는 그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같은 알바 자리를 두고 경쟁 중인 십대 아이들이 의식됐지만, 자신이 이 세상의 풍습에 속하고, 풍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게 좋아서였다. […]

비행운(秘行殞)

By 커피사유 2025-06-24 0

하지만 이런 역동적인 풍경과 달리, 멀리 바깥에서 본 인천공항의 모습은 고요하기만 했다. 공항 리무진 버스에서 소리가 소거된 채 나오는 연합뉴스 화면처럼 그랬다. 허허벌판 섬 한쪽에 외따로 핀 문명의 꽃이라 그런 듯했다. 현대의 복잡하고 거대한 시스템이 정적(靜的)으로 평화롭게 돌아갈 때, 그 무탈함이 주는 이상한 압도, 안심, 혹은 아름다움 같은 것이 공항에는 있었다. […]

떠내려가고 뒤섞이는 것들

By 커피사유 2025-06-19 0

세계는 비 닿는 소리로 꽉 차가고 있었다. 빗방울은 저마다 성질에 맞는 낙하의 완급과 리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듣다 보니 하나의 소음처럼 느껴졌다. 자연은 지척에서 흐르고, 꺾이고, 번지고, 넘치며 짐승처럼 울어댔다. 단순하고 압도적인 소리였다. 자연은 망설임이 없었다. 자연은 회의(懷疑)가 없고, 자연은 반성이 없었다. 마치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 같았다. […]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By 커피사유 2025-06-19 0

… (전략) … 사람들은 종종 자기 심박동에 홀려 신을 벗고 길 떠나는 꿈을 꿨다. 또는 알 수 없는 초조를 어쩌지 못해 옷을 벗고 아내 위에 올라탔다. 잘 모르지만 그랬을 거란 느낌이 든다. 우리가 붙잡고 헤매는 실 끝에는 언제나 가는 눈을 반짝이며 웅크리고 있는 원시인이 있으니까. 그들은 늘 우리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게다가 장마철엔 살냄새가 짙어졌다. […]

정치의 법률화

By 커피사유 2025-04-29 0

재판은 완전하지 않다 재판은 오히려 게임에 가까울지 모른다. 엄격한 규칙이 전제되고, 그 규칙에 따른 공격과 방어를 통해 일정한 결말에 도달한다. 재판은 사실로 이루어진 사건에 내재하는 옳음을 찾아가는 작업이 아니라, 정해진 규칙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이다. 사실에 적용하는 법은 그 자체가 정당한 것이 아니라 제시되는 근거에 의해 좌우된다. 재판의 결과가 일정하지 않다면 법치의 무대에서 안정성이 사라진다. […]

쇼츠, 이야기의 종말

By 커피사유 2025-04-28 0

쇼츠와 ‘사상-계’ 이 모든 현상들은 유튜브 콘텐츠 형식으로서 ‘쇼츠’라는 현상으로 압축된다. 쇼츠 세계는 0과 1만이 존재하는 디지털 정보성의 실체가 극적으로 드러난 모호로비치 불연속면(Mohorovičić 不連續面)이다. 상품사회와 현대적 미디어가 야기한 사물-세계 상실, 이야기성의 상실이 드디어 여기에서 완전히 끝나고 완성된다. 쇼츠가 공간상의 거리 소거를 넘어 시간성을 삭제하기 때문이다. […]

간극의 상실, 해석의 상실

By 커피사유 2025-04-27 0

코믹스 세계관 시대 현대적 미디어의 출현이 사물의 신비를 소거해 버렸다는 지적은 이미 낡은 것이다. TV가 출현하는 순간, 옛날이야기로, 전승된 민담으로 추측되던 사물들의 실체는 눈앞으로 불려 세워져 낱낱이 발가벗겨졌다. 사물들의 포르노화는 현대 미디어 시대의 본질이며 최종적 목적이다. 아마존의 어떤 어둠 속 동굴에서부터 인간의 침실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누구와 만나 어떤 아침 식사를 했는지, 인간 정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 가려진 곳, 숨겨진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

시지프스 ‘이야기’

By 커피사유 2025-04-26 0

이야기는 정보가 아니다 인간의 삶은 이야기 속에 있다. 이야기를 그저 듣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에 참여함으로써 이야기 위에 삶의 집터를 짓는다. 이야기의 영토를 쇄신하고 이야기에 비추어 제 삶을 반추한다. 상상도, 신성도, 균형도, 반성도, 이야기를 거울삼음으로써 유추되는 인간 경험의 양상들이다. 최초의 이야기인 신들의 이야기가 성스럽다고 할 때, 그것은 신들의 성스러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

수기화인(修己和人)

By 커피사유 2025-04-24 0

관계의 시작은 관심이다. 농익은 관계는 설익은 관심으로부터 발전된다. 남태령에서 촉발된 돌봄은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를 향해 번져나갔다. 나 역시 전태일 의료센터에 기꺼운 마음으로 연말 성금을 보냈다. 반세기 전의 전태일이 이토록 가깝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우리의 분노가 좌우 아닌 생사에서 비롯되었듯, 전태일 역시 노동 현장에서 죽음을 몸으로 감각했다. 그의 저항은 생명의 위협에 분노하는 생의 주체로서의 외침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