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9. 『죄와 벌』, 세 번째 기억

탐서일지 #9. 『죄와 벌』, 세 번째 기억

2021-08-07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개요

지난 탐서일지에 이어서 이번에도 나는 『죄와 벌』이라는 작품을 계속 이어서 들여다볼까 한다. 제2권까지 이제 마침내 다 읽었고, 모든 내용을 다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이란 일종의 전율이었다.

그러한 전율이 얼마나 강하게 마음을 진동시켰는지, 심지어는 나는 이렇게 잘 쓰인 글을 내가 감히 옮기고 주석을 달아 두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까지 잠깐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글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 작품을 쓴 저자의 것과 다를 수 있으며 그 자체로 하나의 소중한 견해 및 시각이 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나는 미래의 나 자신을 위하여 지금의 나 자신의 생각을 기록해두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고 나는 주석을 달아야 겠다는 당초의 결심을 다시금 확립하게 되었다.

수많은 질문들이 제기되고 있고 저마다 대답과 해명을 요구하며 나에게 연신 들이닥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질문의 공세가 조금은 어지럽기는 해도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이 작품을 통해서 세상의 어떤 불편한 구석들을 더 많이 확인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며, 아마도 나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조금 더 성장하지 않을까하는 그러한 희망을 다시금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여튼, 나는 수많은 질문과 내가 느낀 전율의 부분들을 이제 여기에 옮겨 두어 이 작품에 관한 나의 기억의 상기를 마무리지을까 한다.

기억의 영역: 문과 답, 주석들

#20.

 “그럼, 뭐 말하자면 앞으로 참고가 되도록 한 말씀 드릴까 하는데, 다시 말해 제가 감히 선생을 가르치려 든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더군다나 선생은 범죄에 관한 논문도 발표하시는 분인걸요! 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그저 사실의 형태로 감히 한 가지 예를 제시하자면, 가령 제가 이놈이든 저놈이든 그놈이든 누구를 범인으로 여긴다면, 여쭙겠는데, 그 범인에게 불리한 증거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기한보다 더 빨리 그를 괴롭힐 이유가 있을까요? 가령 어떤 자는 한시바삐 체포해야 하지만 또 어떤 자는 사실 그런 성질이 아닐 수도 있거든요. 그렇다면 그냥 시내나 좀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두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헤-헤! 아니, 보아하니 선생이 제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으니까 좀 더 명료하게 묘사해 드리죠. 가령 그를 너무 빨리 잡아넣으면, 그로써 저는 그에게 말하자면 정신적인 지렛대를 제공하는 셈이랄까요, 헤-헤! 웃으시는 겁니까?(라스콜니코프는 웃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거니와 포르피리 페트로비치의 눈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을 떼지 않고 입술을 앙다문 채 앉아 있었다.) 하여간 정말 그렇습니다만, 어떤 사람을 대할 때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만, 사람이란 천차만별인데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선생은 방금 증거 얘기를 하셨지요. 하지만 사실 증거가 있다고 한들 그 증거라는 것은, 선생, 대개의 경우 양날의 칼인 반면, 저는 한낱 예심판사, 따라서 약자이기 때문에, 솔직히 고백하지만, 심리를 말하자면 수학적으로 분명하게 제시하고 $2 \times 2 = 4$와 비슷할 법한 증거를 얻어 내고 싶단 말입니다! 이론1(커피사유 주) 문맥을 고려할 때, 여기서의 ‘이론’이란 ‘이론(異論)’으로 생각된다.의 여지가 없는 직접적인 증명과 비슷할 법한 증거를! 한데 그를 엉뚱한 때에 잡아넣으면, 제가 비록 그놈이다 확신한다 할지라도 앞으로 그의 죄를 폭로할 수단을 저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될 텐데, 왜 그렇겠습니까? 왜냐면 그런 식으로 저는 그에게 말하자면 일정한 정황을 제공하는 셈, 말하자면 심리적인 정황을 굳혀 주어 안심시키는 셈이고, 그는 저를 피해 자기만의 껍질 속에 숨어들어 마침내는 자기가 죄수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듣자니 세바스토폴의 식자들은 알마 강 전투 직후에 이제 곧 적이 정면공격을 감행하여 당장에 세바스토폴을 점령하지나 않을까 정말 노심초사했다더군요. 한데 적이 정공법의 포위전으로 나와 첫 평행호를 파는 것을 보자마자, 웬걸, 바로 그 식자들이 크게 기뻐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요. 정공법의 포위전으로는 언제 점령할지 모르는 일, 적어도 두 달은 질질 끌 테니까요! 또 웃으시는데, 또 믿기지 않으십니까? 하긴 그야 물론 선생이 옳습니다. 옳지요, 옳다마다요! 이건 어쨌거나 특수한 경우니까, 선생 생각에 동의합니다. 제가 제시한 예는 정말로 특수한 경우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로지온 로마노비치 선생, 눈여겨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보편적인 경우, 즉, 모든 법률적 형식과 규칙을 측정하고 계산하여 책에 기록하도록 해 줄 만한 보편적인 경우란 절대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인즉 어떤 사건이든, 가령 범죄만 해도 전부 그렇지만, 그것이 실제로 발생하기가 무섭게 즉시 완전히 특수한 경우로 바뀌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때로는 어떠나면, 예전 경우와는 조금도 닮지 않는 경우로 바뀐다는 말이지요. 때로는 이런 유로 무척 희극적인 경우도 생기고요. 만약 제가 어떤 양반을 완전히 혼자 내버려 둔다고 칩시다. 체포하지도, 괴롭히지도 않되 대신 이쪽에서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고 밤낮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잠도 자지 않고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매 시각, 매 순간 알도록, 적어도 그런 의심을 품도록 한다면, 즉 그가 의식적으로 저의 영원한 의심과 공포의 덫에 걸려 있다면 아닌 게 아니라 빙빙 맴돌다가 제 발로 찾아올뿐더러 아마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을 겁니다. 이건 이미 $2 \times 2$ 같은 것, 말하자면 수학적인 양상을 띠게 될 테니 – 통쾌한 일이기도 하지요. 이런 일이 산골 무지렁이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들, 식자연하는 현대인들, 더욱이 어떤 방면으로는 남달리 발달된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선생, 그 사람이 어떤 방면으로 발달됐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그야말로 관건이란 말입니다. 한데 신경, 신경, 이걸 선생은 까맣게 잊으셨군요! 요즘은 이 모든 것이 병적이고 나쁘고 신경질적이지 않습니까……! 또 다들 발끈, 발끈하는 일은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사실 이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일종의 광맥입니다! 그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도시를 활보한들 제가 왜 불안하겠습니까! 뭐, 어떻습니까, 일단 좀 놀라고 내버려 두는 거죠. 어차피 저는 그가 저의 제물임을, 저를 피해 아무 데로도 도망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는걸요! 아니,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헤-헤! 외국으로요, 예? 폴란드인이라면 외국으로 도망칠까, 그는 아니며, 더욱이 제가 예의 주시하고 있고 조치도 취해 놓았습니다. 그럼 국내의 어디 벽지로 도망칠까요, 예? 그런 곳에는 농부들, 진짜 러시아 농부들, 무지렁이들이 살고 있지요. 이러니 지적으로 발달된 현대인이라면 외국인이나 다름없는 우리네 농부들과 같이 살 바에는 차라리 감옥을 선호할 겁니다, 헤-헤! 하긴 이런 건 전부 시시껄렁하고 표피적인 얘기입니다. 도망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요! 이건 형식적인 것일 뿐,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도망칠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그가 저에게서 도망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심리적으로 제 손아귀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겁니다, 헤-헤! 표현 한번 멋지죠! 자연의 법칙상 그는 제 손아귀에서 도망치지 못하며, 설령 어디 도망칠 데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촛불 앞을 맴도는 나방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 그는 바로 그렇게 촛불 주위를 맴돌듯 계속, 계속 제 주위를 맴돌 겁니다. 자유도 달갑지 않고 생각도 많아져 갈피를 잡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을 그물 같은 것으로 꽁꽁 옭아매면서 죽도록 불안하게 만들 테죠……! 그뿐이겠습니까. 그 스스로 $2 \times 2$와 같은 무슨 수학적인 증거까지 마련해 줄걸요, 제가 막간 휴식 시간만 좀 넉넉히 준다면……. 그러면 그는 제 주위에서 계속, 계속 원을 그리며 계속, 계속 반경을 좁히고 그러다가 탁 걸렸다! 곧장 제 입으로 날아들 테고 저는 꿀꺽 삼키면 되니까, 몹시 통쾌한 일 아닙니까, 헤-헤-헤! 믿기지 않으십니까?”

라스콜니코프는 대답도 하지 않고 창백한 얼굴로 꿈쩍도 않고 앉아 예의 그 긴장된 표정으로 포르피리의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업 한번 멋지군!’ 그는 몸이 오싹해지는 가운데 이렇게 생각했다. ‘이쯤되면 어제처럼 고양이가 쥐를 갖고 노는 수준이 아니다. 이 작자가 내 앞에서 괜히 자기 힘을 과시하는 것도 아닐 테고…… 괜히 그런 암시를 하는 것도 아니겠지. 그러기에는 훨씬 더 똑똑하니까! 여기에는 다른 목적이 있을텐데, 대체 무엇일까? 에잇, 허튼수작 작작 하시지, 형씨, 나를 놀래고 잔꾀를 부리는데! 네놈에겐 증거도 없고, 어제의 그 사람도 아예 존재하지 않아! 네놈은 내 넋을 빼놓고 초장부터 자극하여 그 상태에서 단칼에 작살내려고 안달하지만, 그렇게 거짓말만 지껄이다가는 된통, 된통 당할걸! 하지만 이 정도로까지 나에게 암시를 주는 이유는 대체, 대체 뭘까……? 나의 병적인 신경을 이용할 속셈인가, 어……? 천만에, 형씨, 그렇게 거짓말을 지껄이다가는 네놈이 뭘 준비해 놨다고 할지라도 된통 당할걸……. 자, 그럼 대체 뭘 준비해 놨는지 한번 볼까.’

그러고서 그는 무서운 미지의 파국에 맞설 태세를 취하며 온 힘을 다해 몸을 다잡았다. 때로는 그 자리에서 당장 포르피리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실은 여기 들어올 때부터 이렇게 증오가 치밀어 오를까봐 두려웠다. 그는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가고 심장이 요동치고 입가에 침이 말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쨌거나 때가 될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지금 그의 처지에서는 이것이 최상의 전략임을 깨달았던 것인데, 그러면 자기 쪽에서 말실수를 하는 일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침묵함으로써 적수를 자극하여 저쪽에서 말실수를 하도록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적어도 그는 그렇게 기대했다.

포르피리의 말은 어떤 면을 고려하면 틀렸다고 여겨질 수도 있고 어떤 면을 고려하면 틀리지 않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태도가 가능한 이유는 정확히는 말하기는 힘들지만, 아마도 세상의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른 이후, 누군가가 은근히 지켜보고 있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른 후에 지켜봄을 당하는 것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는 여러 가지 끔찍한 범죄들이 많고,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심리와 과거 경험, 그리하여 형성된 그들의 세계관, 가치관이란 모두 다양하며, 게다가 오늘날 수많은 정신병의 흔적과 시발점이 곳곳에 가득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포르피리의 말이 맞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다.

#21.

“헤-헤–헤! 자, 그럼 이제는, 친애하는 선생, 저 특수한 경우에 관한 일을 전부 있는 그대로 속속들이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실과 천성이란, 친애하는 선생, 워낙 중대한 것이라, 맙소사, 어떨 땐 가장 주도면밀한 계산의 밑동마저도 싹둑 잘라 버린답니다! 에이, 이 늙은이의 말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진지하게 하는 말입니다, 로지온 로마노비치.(이런 말을 하니, 서른다섯 살 정도밖에 안 된 포르피리 페트로비치가 정말로 갑자기 폭삭 늙어 버린 것 같았다. 심지어 목소리도 변하고 어쩐지 몸도 구부정해졌다.) 게다가 저는 솔직한 사람이거든요……. 저, 참 솔직하지 않습니까, 예? 선생 생각은 어떻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아주 그런 것 같은데요. 이런 것을 선생에게 거저 알려 주면서도 무슨 보상도 요구하지 않잖습니까, 헤-헤! 자, 그럼, 계속하죠. 번득이는 재치란 제 생각으론 훌륭한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자연의 아름다움이요 삶의 위안이며 또 어떤 마법도 부릴 만한 것이니, 어떨 때는 빈약한 예심판사가 무슨 수로 짐작인들 하겠습니까, 그 역시 사람인지라 항상 그렇듯 자기만의 공상에 흠뻑 빠져 있는데! 한데 천성이 나서서 빈약한 예심판사를 구해 주니, 바로 이게 큰일입니다! 재치에 몰입한 청년들, ‘모든 장애를 뛰어넘으려는’(선생의 아주 재치있고 교묘한 표현을 빌리자면) 청년들은 이런 점은 생각도 하지 않거든요. 가령,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즉 특수한 경우에 해당하는 한 인간이 incognito(몰래) 멋들어지게,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거짓말을 한다고 칩시다. 승리의 쾌재를 울리며 자신의 재치의 열매를 음미하는 찰나, 왠걸, 그는 탁 걸리고 맙니다! 그것도 가장 흥미진진한, 가장 자극적인 순간에 기절을 할 것이란 말입니다. 이거야 병 때문일 수도, 또 때로는 방 안이 너무 갑갑한 탓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어쨌거나 생각의 빌미는 제공한 셈이지요! 거짓말이야 더할 나위 없이 잘했지만 천성을 계산에 넣을 줄 몰랐던 겁니다. 자기 꾀에 넘어가는 격이죠! 어떨 때는 자신의 발랄한 재치에 몰입한 나머지 자기에게 혐의를 두고 있는 사람을 우롱하느라 꼭 일부로 그러는 양, 꼭 놀이를 하는 양 창백해지는데, 그것도 어찌나 자연스럽게, 어찌나 진짜에 가깝게 창백해지는지, 웬걸, 그러다 또 그만 생각의 빌미를 제공해 주는 거죠! 처음 한 번은 속여 넘긴다 쳐도, 상대방도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녀석이라면 밤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게 되지요. 실은 발걸음을 뗄 때마다 이런 식이란 말입니다! 뭐냐면, 괜히 혼자 앞질러 달리고 딱히 요구하지도 않는데 코를 들이밀고 정반대로 침묵해야 할 것을 두고 끊임없이 지껄이고 온갖 알레고리를 남발하기 시작할 테죠, 헤-헤! 그러다간 제 발로 와서 물어볼 겁니다. 대체 왜 나를 이토록 오랫동안 잡아가지 않는 거요? 라고. 헤-헤-헤! 이런 일이 실은 가장 재치 있는 사람, 심리학자나 문학가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말씀! 천성이야말로 거울, 가장 투명한 거울이거든요! 거울을 들여다보며 찬찬히 감상하라, 바로 이거죠! 아니, 왜 그렇게 창백해지셨습니까, 로지온 로마노비치, 갑갑하십니까, 창문이라도 활짝 열까요?”

“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발.” 라스콜니코프는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염려는 붙들어 매시죠!”

포르피리는 그의 맞은편에 멈춰 서서 잠깐 기다리다가 갑자기 그를 따라 껄껄 웃기 시작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그야말로 발작과 같던 웃음을 갑자기 탁 그쳤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그는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간신히 서 있었지만 그래도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드디어 분명히 알겠는데, 당신은 확실히 저에게 그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 리자베타 살인 혐의를 두고 있군요. 제 입장에서 한 말씀 드리자면, 이 모든 소리에 저는 이미 오래전에 신물이 났습니다. 저를 합법적으로 추궁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추궁하십시오. 체포할 권리가 있으면 체포하시고요. 하지만 이렇게 눈을 맞댄 채 비웃고 괴롭히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겠습니다.”

갑자기 그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이 미칠 것 같은 분노로 타오르면서 지금까지 억눌렀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용납하지 못하겠어요!” 그는 있는 힘껏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듣고 계십니까,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용납하지 못하겠습니다.”

“아휴, 맙소사, 또 왜 이러십니까!”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는 보아하니 완전히 경악한 듯 소리쳤다. “선생! 로지온 로마노비치! 로지멘키! 하느님 아버지! 대체 무슨 일입니까?”

“용납하지 못하겠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한 번 더 고함을 질렀다.

“선생, 좀 조용히 해 주십시오! 밖에서 소리를 듣고 달려오겠어요! 그럼 뭐라고 말할까요, 생각 좀 해 보십시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는 공포에 사로잡혀 이렇게 속삭대면서 자기 얼굴을 라스콜니코프의 얼굴에 바싹 갖다 댔다.

“용납하지 못하겠습니다. 용납하지 못하겠어요!” 라스콜니코프는 이 말을 기계적으로 반복했지만 목소리는 역시나 갑자기 완전히 속닥대는 것처럼 변했다.

포르피리는 후다닥 몸을 돌리더니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열었다.

“환기를 시켜야겠어요, 신선한 공기를 마시도록! 선생은 물도 좀 마셔야겠습니다, 선생, 이쯤 되면 숫제 발작입니다!” 그러고서 그는 물을 내오게 하려고 문 쪽으로 달려갔지만 마침 구석에 물병이 있었다.

“좀 마셔요, 선생.” 물병을 들고 달려오며 그가 말했다. “한결 나아질 겁니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마음을 써 주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라스콜니코프는 입을 다물고 의아스러운 듯 호기심을 갖고 그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물은 받아 들지 않았다.

“로지온 로마노비치!” 친애하는 선생! 계속 이러시다가는 선생 스스로 미치고 말 겁니다, 정말입니다, 에-에이! 아-아휴! 좀 마시십시오! 조금이라도 마셔요!”

결국에는 그에게 물 잔을 들게 했다. 상대방은 그것을 기계적으로 입에 갖다 대려고 했지만 정신이 번쩍 들자 혐오스러워하며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결국 (노파와 그 동생에 대한) 살인을 저지른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니코프는 포르피리의 말대로, 현실과 천성에 의하여 자기 자신의 주도면밀한 계획(정확하게는 아마도 자기합리화로 추정된다. 노파를 죽일 수 있는 인간, 즉 호모 사케르로 만들었고 노파를 죽이는 행위가 어떠한 이익을 가져올 것인지를 명시하여, 스스로에게 권리 내지 동기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의 밑둥마저 싹둑 잘라버린 것이다. 그는 당초에 계획도 없던 살해를 추가로 했으며 (노파의 동생 리자베타를 살해함) 또한 계속 불안과 의심에 시달리면서 정신병적인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 한 켠에는 옳지 못함에 대한 어떤 확고한 견해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적용될 수 있는 일종의 직관인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22.

“제 쪽에서는 뭐라고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말을 받아쳤는데, 이미 계단을 내려가던 참이었으나 갑자기 다시 포르피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더욱더 성공하길 바란다고 할까 싶지만, 보다시피 당신의 직무라는 것이 얼마나 희극적입니까!”

“아니, 왜 희극적입니까?”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도 그만 가려고 몸을 돌렸다가 당장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 불쌍한 미콜카를 당신의 그 수법, 그 심리전으로 얼마나 고문하고 괴롭혔을까요, 자백할 때까지 그랬겠죠. 밤낮으로 ‘네가 살인자이다, 너는 살인자이다…….’ 하고 증명을 거듭했을 겁니다. 뭐 이제는 이미 자백했으니까 당신은 또 그를 뼛속까지 짓뭉개기 시작할 테죠. ‘거짓말이야, 너는 살인자가 아니야! 네가 살인을 했을 리 없어! 너는 자기 말을 하는게 아니야!’ 하는 식으로. 자, 이러니 어떻게 희극적인 직무가 아닐 수 있습니까?”

“헤-헤-헤! 그러니까 제가 방금 니콜라이에게 ‘자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을 인지하셨군요?”

“어떻게 인지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까?”

“헤-헤! 영특하십니다, 영특해요. 모든 것을 인지하시니! 머리가 정말 잘 돌아간다니까요! 게다가 가장 희극적인 핵심을 포착할 줄 아시고……. 헤-헤! 작가들 중에서는 고골이 이런 재주가 제일 많았다고들 하죠?”

“예, 고골이 그렇지요.”

“예, 고골이…… 그럼 또 만납시다.”

“예, 그러죠…….”

포르피리의 정확한 속셈이란 무엇인가?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그는 라스콜니코프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엉뚱한 이를 취조하고 살인자로 몰아가서 라스콜니코프를 자극하려는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종의 연극을 하고 있는 셈이며 그것을 라스콜니코프가 간파한 것인가? 라스콜니코프를 자극하기 위하여 불쌍한 미콜카에게 ‘네가 살인자야’하고 증명을 거듭하다가, 그 결과로 이제는 미콜카가 자신이 범인이라고 믿어버리게 되자 이제는 그 반대를 생각 깊은 곳에 심어주려고 하는 것인가? 그런데 포르피리는 러시아의 예심판사이다. 판사, 즉 법조인이 진짜 범인을 잡는다는 목적으로 이런 식으로까지 해도 되는 건가? 즉, 진짜 범인이라고 추정되는 인물을 압박하기 위하여 이렇게 죄 없는 한 사람을 스스로가 살인자라고 믿도록 만들어도 되는 것인가?

#23.

“줄곧 비웃기만 하시는데, 그것도 무척 어설프게 말이죠, 이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시니! 코뮌에 그런 역할은 없습니다. 코뮌은 그런 역할이 없어지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코뮌에서는 그런 역할이 현재와 같은 본질을 전부 바꿀 것이며, 여기서는 멍청한 일이 거기서는 현명할 일이 될 것이며, 여기 현 상황에서는 부자연스러운 일이 거기서는 완전히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인간이 어떤 상황에,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것이 환경에 달려 있고, 인간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지금도 소피야 세묘노브나와 무난히 잘 지내고 있는데, 이것만 봐도 그녀가 결코 저를 자기를 모욕한 원수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잖습니까. 그렇고말고요! 저는 지금 코뮌에 들어오라고 그녀를 꼬이고 있지만, 단, 전혀, 전혀 다른 근거에서 그런 겁니다! 뭐가 웃기십니까? 우리는 우리만의 특별한 코뮌을 창설하고 싶습니다. 단, 예전의 코뮌들보다 더 광범위한 근거에서요. 우리는 신념에 있어서 더 멀리 나간 것입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부정하고 있거든요! 만약 도브롤류보프가 관 속에서 벌떡 일어난다면, 저는 그와 한바탕 논쟁을 벌일 겁니다. 벨린스키도 귀양을 보내 버릴 겁니다! 하지만 일단은 계속 소피야 세묘노브나를 지적으로 계발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름다운 천성을 타고난 사람이거든요!”

… 결국 ‘코뮌’이라는 새로운 지적 공동체를 핑계로, 소피야 세묘노브나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속셈이 아닌가? 그러한 코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역할이 없도록 하는’ 공동체인가? ‘현 상황에서는 부자연스러운 일이 완전히 자연스로운 일이 되는’ 공동체인가? 예전의 코뮌들보다 더 광범위한 근거에서, 자신들만의 특별한 코뮌을 창설하고 싶다고 했는데, 과연 그 창설된 코뮌이 예전의 코뮌들보다 더 특별한 위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근거는 단지 더 많은 것을 그 코뮌에서 부정하기 때문인가? 현재의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어떠한 신념과 가치들을 부정하는 것은 훌륭한 극복점이지만, 오직 이것만으로서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확립하려는 시도는 위험하지 않은가?

#24.

“‘더 고결하다.’라는 것이 뭡니까? 저는 인간 활동을 정의함에 있어 그런 표현이 있는지 잘 모르겠군요. ‘더 귀족적이다.’, ‘더 관대하다.’, 이 모든 것이 허튼소리요 터무니없는 소리에 케케묵은 편견이 섞인 말이므로, 저는 그것을 부정하는 바입니다! 인류에게 유익한 것은 전부 고결하다! 제가 아는 말은 단 하나, 유익하다, 입니다! 히히거리는 거야 당신 자유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경우, 모든 것은 인간에게 유용해야 한다. 그런데 이 유용하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말인가? 맥심 기관총과 같이 상대를 살해하는데 ‘유용하다’라는 표현은 이 ‘유용하다’에 들어갈 수 있는가? 아닌가, 오히려 ‘인류’에게 유익하여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경우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별로 유용하지 않고 오히려 잔혹한 것이므로 ‘유용하지’ 않은가? ‘귀족적이다’, ‘관대하다’에는 사실 편견이 섞인 말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 ‘유용하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지 않고서는 인간 활동을 제대로 평가하지는 못할 것만 같다.

#25.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교란된 머릿속에서 어떻게 저 무모한 추도식 생각이 싹텄는지, 그 원인을 정확히 명시하기란 어려울 법하다. 정말로, 라스콜니코프가 원래 마르멜라도프 장례비로 건넨 20루블 남짓한 돈 중에서 거의 10루블을 거기다 써 버렸다. 어쩌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격식을 갖추어’ 고인의 명복을 빌어 주는 것이, 그리하여 모든 세입자들, 특히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에게 고인이 ‘그들보다 절대 못하기는커녕 아마 훨씬 더 나은’ 사람이었고 그들 중 누구도 고인 앞에서 ‘콧대를 세울’ 권리가 없음을 똑똑히 알리는 것이 고인에 대한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이 경우 제일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가난한 사람 특유의 자존심이었을 텐데, 그런 것 때문에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의무적인 어떤 사회적인 의식을 치러야 할 경우 많은 가난뱅이들이 오직 ‘남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남들한테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짜고 애써 모아 놓은 마지막 한 닢까지 다 써버리지 않는가. 그러니까 분명히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바로 이번 기회에,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바로 이 순간에 자기도 ‘여봐란듯이 살 줄 알고 여봐란듯이 손님 대접을 할 줄 안다.’, 뿐더러 절대 이런 팔자로 살 몸도 아니고 ‘점잖은 집, 심지어 말하자면 귀족이나 다름없는 대령의 집에서’ 자랐다, 마룻바닥이나 닦고 밤마다 아이들의 걸레쪽이나 빨 신세도 절대 아니었다, 하는 것을 이 모든 ‘시답잖고 추악한 세입자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와 같은 자존심과 허영심의 발작이 가난에 찌들고 짓눌린 사람들에게 찾아들어 억누를 수 없는 초조한 욕구로 바뀌는 일이 더러 있잖은가.

원래는 부유한 편이었다가 몰락한 사람들은, 어쩌면 예전의 영광(Glory)을 잠깐이라도 회복하고 싶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 자신의 상황에 맞지 않는, 그 영광스러웠던 순간을 재현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현실은 가난한 곳에 있되 마음과 정신이란 여전히 가난한 현재에 있지 않고 재력적으로 괜찮았으며 명예로웠던 예전에 남아 있는 것이다. 사람은 어쩌면 절망의 굴레 속으로 떨어졌을 때 그 절망의 굴레 자체를 끝까지 부정하려는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좋았던 예전’을 추억하는 사람의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러한 행위를 바보같다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해하고 그러려니 해야 하는가? 우리와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즉 제3자의 입장으로서가 아니라 그 사람, 즉 절망에 빠진 상태로 ‘좋았던 예전’을 추억하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그 사람 입장을 고려하여 말해볼 수 있는가?

#26.

타고나길 그녀는 웃음이 많고 명랑하고 온순한 성격이었지만 끊임없이 불행과 실패를 겪은 탓에 모든 사람들이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감히 다른 식으로 살지는 않기를 너무나 맹렬히 바라고 또 요구하게 되었으며, 때문에 삶 속의 아주 가벼운 불화나 아주 사소한 실패에도 대번에 거의 미칠 것만 같은 상태가 되었고, 가장 찬연한 희망과 환상을 품었다가도 한순간에 운명을 저주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모든 것을 찢어발기고 내던지고 벽에다 머리를 찧어 대기 시작했다.

한순간의 몰락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가? 즉, 자신처럼 고통을 겪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왜,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데, 그 경험을 통과하던 당시 나는 ‘너희들도 고통받아봐라’라는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러한 이타적인 행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복수심이 불타오르던 사람도, 그것이 조금 잦아든 이후에 이렇게 바라게 된다는 것이 바로 이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한가? 모든 사람에게는 어쩌면 이기적인 심성에 가려진 이타적인 심성이 있다는 것인가? 감히 세계가 자신과 같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은, 과연 이기적인가?

#27.

“있잖아, 소냐.” 그가 갑자기 어떤 영감에 사로잡혀서 말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할 거냐 하면 말이야, 만약 내가 오직 굶주림 때문에 사람을 찔러 죽였다면” 하고 그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고 아리송하지만 진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 행복했을거야! 이 점, 똑똑히 알아 둬!”

굶주림 때문에 사람을 찔러 죽였다면, 그는 자신의 신념과 현재의 상황이 충돌하고 끊임없이 모순을 일으켜 다양한 생각으로 그 스스로를 괴롭히고 절망에 빠지게 하는 상황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그렇지 않고, 자신의 위험한 이론에 따라 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이 공리주의적인 관점으로 도움이 된다는 논리를 나름 구축한 후 살해를 저질렀는데, 그 살해 이후에 행한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철학과 이론과 너무 달랐고, 이것에 대한 자기 비난과 괴로움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굶주림 때문에 사람을 찔러 죽였다면, 그의 생각과 행위가 일치하였을 것이므로 차라리 행복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금 괴로워하고 있는 진정한 이유는, 그의 이론 즉 사상과 그의 실제 살해에 관한 행위가 일치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28.

“문제는 뭐냐면, 한번은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어. 예를 들어 나폴레옹이 내 입장이었다면, 그래서 출셋길을 열러 줄 툴롱도, 이집트도, 몽블랑을 넘는 일도 없고 그 모든 아름답고 기념비적인 것 대신에 말단 관리의 미망인인 무슨 우스꽝스러운 노파만 있는 데다가 그녀의 트렁크에서 돈을 훔치기 위해서는 (출셋길을 위해서 말이야, 이해하겠지?) 덤으로 그녀를 죽여야 했다면, 자, 다른 출구는 없었다면, 그는 그런 일을 감행했을까? 그것이 전혀 기념비적인 일도 아니고…… 또 죄스러운 일이라는 이유로 움찔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내 말인즉, 이 ‘문제’를 두고 얼마나 오랫동안 괴로워했는지 마침내(갑자기 어쩌다) 그였다면 움찔하기는커녕 그것이 기념비적인 일이 아니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죽도록 부끄러워졌어……. 그였다면 여기에 움찔할 일이 뭐가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도 못했겠지. 그에게 다른 길이 없다면, 생각을 곱씹을 것도 없이 그냥 목을 졸라 버리고 찍소리도 못하게 했을걸……! 뭐 그래서 나도…… 생각을 곱씹는 건 집어치우고……. 권위 있는 전범에 따라…… 목을 졸라 버린 셈이지……. 정확히 이런 식이었어! 우습지? 그래, 소냐, 여기서 제일 우스운 것은 아마 정확히 이런 식이었다는 점일 거야…….”

소냐는 전혀 우습지 않았다.

“차라리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봐요…… 예를 들지 말고.” 더욱더 소심하게, 거의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그녀가 부탁했다.

그는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고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도 당신 말이 맞아, 소냐. 이건 전부 허튼소리야, 거의 수다에 불과해! 사실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어머니는 거의 빈털터리야. 여동생은 우연찮게 교육을 받은 덕분에 가정교사로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팔자였지. 이들의 모든 희망이 나였어. 나는 대학을 다니다가 학비를 조달할 형편이 못 돼 잠깐 쉬지 않으면 안 됐어. 그런 식으로라도 계속 끌었다면, 십 년이나 십이 년쯤 뒤에는 (상황이 호전됐을 경우에) 어떻든 1,000루블 정도의 연봉을 받는 무슨 교사나 관리쯤은 될 수도 있었겠지…….(그는 암기한 것 같은 말을 읊조려 댔다.) 한데 그 무렵이면 어머니는 근심걱정 탓에 바싹 말라 버리셨을 테고 그런데도 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지 못했을 테고 여동생은…… 뭐, 여동생에게는 더 험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겠지……! 아니,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평생 이 모든 것을 그냥 지나치고 모든 것을 외면하고 어머니를 잊고, 가령 여동생의 모욕을 정중히 참아 내야 하지? 대체 무엇을 위해서? 저 둘의 인생을 망치고 새로운 가족, 즉 아내와 아이들을 만든 다음 땡전 한 푼 없이, 땟거리도 없이 내팽개치기 위해? 그래…… 그래서 나는 노파의 돈을 빼앗아 어머니를 괴롭힐 것도 없이 그 돈을 첫 몇 년간 학비로, 또 대학 졸업 후 첫 걸음을 내딛는 데 쓰자고 결심했어. 이 모든 일을 폭넓고 철저하게 하자고, 완전히 새로운 출셋길을 닦고 새롭고 독립적인 길로 나아가자고 말이야……. 그래…… 그래, 이게 다야……. 뭐, 물론, 노파를 죽인 것은, 이건 나쁜 짓이었지…… 뭐, 됐어!”

왠지 힘없이 얘기를 끝낸 다음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 그건 아니야, 그건 아니지.” 소냐가 애달파하며 소리쳤다. “설마 그럴리가……. 아니, 그렇지,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다는 걸 당신도 아는군……! 어쨌거나 나는 진심으로 얘기한 거야, 사실 그대로!”

“사실 그대로라니, 이게 무슨! 오 맙소사!”

“나는 그저 이를 죽였을 뿐이야, 소냐, 아무 쓸모도 없고 더럽고 해롭기만 한 이를.”

“사람을 두고 이라니!”

“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아.”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가 대답했다. “하긴 내 말은 거짓말이야, 소냐.” 그가 덧붙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실은 전혀 그게 아니야. 당신 말이 맞아. 여기에는 전혀, 전혀, 전혀 다른 원인이 있어……! 오랫동안 누구와도 얘기를 나누지 못했어, 소냐……. 지금 머리가 너무 아프다.”

그의 눈은 열병에 걸린 듯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는 거의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불안한 미소가 그의 입가를 맴돌았다. 몹시 흥분한 상태였지만 그 와중에 벌써 끔찍한 무기력함이 엿보였다. 소냐는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도 현기증이 났다. 그의 말투가 너무 이상했다. 뭔가 이해될 것도 같지만……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오 맙소사!’ 그러고서 그녀는 절망에 차 두 손을 비볐다.

“아니, 소냐, 그건 아니야!”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또다시 말을 시작했는데, 급작스러운 생각의 전환에 충격을 받아 다시 흥분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야! 차라리…… 이를테면(그래! 이러는 편이 정말로 더 낫겠군.) 내가 자존심도 강하고 질투심도 많고 못됐고 추잡하고 원한도 깊고…… 게다가 미칠 조짐까지 보인다고 치자.(몽땅 다 갖춘 셈이지! 주위에서는 전부터 미친 것 같다고 수군댔고, 나도 알아차렸거든!) 아까 난 당신에게 학비를 조달할 수 없었다고 말했어. 한데 그럭저럭 조달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거, 알아? 필요한 만큼은 어머니가 부쳐 주셨을 테고 신발 값이나 옷 값, 밥값 정도는 내 손으로 벌 수도 있었을 거야. 확실히 그랬을 거야! 과외 자리도 들어왔는데 50코페이카씩 준다고 했지. 라주미힌은 그렇게 일을 하고 있거든! 하지만 난 악에 받쳤기 때문에 하기 싫었어. 그야말로 악에 받쳤지.(이거 좋은 단어군!) 난 그때 거미처럼 내 방구석에 틀어박혔어. 당신도 내 골방에 와서 직접 봤잖아……. 한데 알겠지, 소냐, 낮은 천장과 비좁은 방이 영혼과 이성의 숨통을 조인다는 걸! 오, 나는 이 골방을 정말 증오했어! 그럼에도 거기서 나가기는 싫었어. 일부러 나가기 싫었던 거야! 몇 날 며칠을 밖에 나가지도 않았고, 일도 하기 싫고 숫제 먹는 것도 싫어서 줄곧 누워만 있었어. 나스타시야가 뭘 갖다 주면 좀 먹고 안 갖다 주면 그냥 그대로 하루를 보내는 거야. 악에 받쳐서 일부러 부탁도 안 했어! 밤에도 불도 없이 어둠 속에 누워 있는데, 양초 값을 벌기도 싫은 거야. 공부를 해야 했지만 책도 다 팔아 버렸어. 지금 내 책상은 물론이고 수첩과 공책 위에도 먼지만 수북이 쌓여 있지. 나는 드러누워서 생각을 하는 편이 더 좋았어. 그래서 계속 생각했지……. 계속 참 이상한 꿈을, 딱히 뭐라고 얘기할 것도 없는 온갖 꿈을 꾸었어! 하지만 그때 또 비로소 그것이 내 머릿속에서 어른거리기 시작했어……. 아니야, 그렇지 않아! 또다시 잘못된 얘기를 늘어놓고 있군! 있잖아, 그때 나는 줄곧 자문하곤 했어. 어쩌자고 나는 이토록 바보 같을까, 만약 다른 놈들도 바보 같고 그놈들이 바보 같다는 것을 내가 확실히 알고 있다면 왜 나라도 더 현명해지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그러다가 나는 알게 되었어, 소냐, 다들 현명해질 때까지 기다린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임을……. 그러다가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그 누구도 그들을 개조할 수도 없으니 그러려고 애쓸 가치도 없다는 것을 또 알게 되었지! 그래, 정말 그래! 이것이 그들의 법칙이야……. 법칙이란 말이야, 소냐! 정말 그래……! 나는 이제는, 소냐, 이성과 정신이 튼튼하고 강한 자가 그들의 지배자라는 걸 알겠어! 많은 것을 감행할 수 있는 자, 그가 그들 사이에서는 옳은 거야. 보다 많은 것에 침을 뱉을 수 있는 자, 그가 그들 사이에서 입법자이며, 제일 많은 것을 감행할 수 있는 자, 그가 제일 옳은 거야! 지금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거야! 오직 장님만 알아보지 못할 뿐이지!”

… 인류의 수많은 역사의 진보 과정에서, 그 진보에 참여한 이들이 어떤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한 것은 분명히 옳은 그의 지각이다. 그러나 그 역을 추론하는 과정은 분명한 논리적 오류인 듯 하다. 어떤 명제의 역은 항상 본명제와 참/거짓의 여부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논리학의 기본적 상식이다.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한 사람들의 집합에 역사적 영웅들의 집합이 포함될 수는 있겠으나, 역사적 영웅들의 집합에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한 사람들의 집합이 포함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즉, 명제의 역전개 과정에서 그는 진위 여부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논리적 오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의 위와 같은 정신병적이고 급작스러운, 다소 흥분한 상태에서 행한 고백에서, 그가 자신의 범죄를 변명하는 것과 사실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서도 자신의 생활비를 뒷받침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두 가지가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의 범죄를 변호하고 싶으면서도 사실은 그 범죄가 그의 자기합리화의 핵심 논리 중 하나인 ‘불가피성’을 의심하고 있으므로, 스스로의 논리로도 변호되지 않는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29.

“아무 말 하지 마, 소냐, 비웃다니, 악마의 꾐에 빠졌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아무 말 하지 마, 소냐, 아무 말도!” 그는 음울하고 집요하게 되뇌었다. “전부 알고 있어. 이 모든 것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계속 속삭였지, 그때 어둠 속에 드러누워서……. 이 모든 것을 두고 제일 사소한 점까지 나 자신과 논쟁에 논쟁을 거듭했으니까 전부, 전부 알아! 그래서 신물이 났어, 그때 이 모든 잡념에 정말 신물이 났어! 나는 모든 것을 잊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어, 소냐, 이따위 잡념을 그만두고 싶었다고! 설마 내가 바보처럼 무턱대고 나섰다고 생각해? 나는 영리한 놈으로 나섰고 바로 그 때문에 망하고 말았어! 설마 당신은 내가 가령 나 스스로에게, 내가 권력을 가질 권리가 있을까, 하고 물어보고 또 추궁하기 시작했다면, 고로 내가 권력을 가질 권리가 없다는 뜻임을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해? 혹은, 인간이 이인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면, 고로 나에게는 인간은 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고 무슨 질문을 던질 것도 없이 곧장 제 갈 길을 가는 자에게는 이라는 사실을……. 내가 그토록 많은 날들을, 나폴레옹이라면 나섰을까 아닐까, 하는 문제로 괴로워했다면, 실은 내가 나폴레옹이 아니라는 사실을 또렷이 느꼈다는 뜻이야……. 이 모든 잡념이 주는 고통을 나는 모조리, 모조리 견뎌 냈고, 소냐, 그 고통을 모조리 어깨에서 떨쳐 버리고 싶었어. 나는, 소냐, 궤변을 늘어놓을 것도 없이 그냥 죽이고 싶었어, 나를 위해, 나 하나만을 위해 죽이고 싶었던 거야! 이 점을 나 자신까지 거짓말로 덮어 두고 싶지는 않았어! 어머니를 돕기 위해 죽인 것이 아니야, 허튼소리지! 비용과 권력을 얻기 위해, 인류의 은인이 되기 위해 죽인 것도 아니야. 허튼소리! 나는 그냥 죽였어. 나 자신을 위해, 나 하나만을 위해 죽인 거야. 행여 내가 누구의 은인이 되든, 아니면 한평생 거미처럼 모두를 거미줄에 꽁꽁 옭아매고 그 모두의 싱싱한 즙을 빨아먹든 그 순간 나로서는 아무 상관없었을 거야, 틀림없이……! 무엇보다도, 소냐, 살인을 했을 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어. 돈이 필요했다기보다는 뭔가 다른 것이…… 나는 이제야 이 모든 것을 알겠어……. 나를 이해해 줘. 만약 똑같은 길을 간다고 해도, 절대 두 번 다시 살인을 하지 않을 거야. 그때는 다른 것을 알아야만 했어, 다른 것이 내 겨드랑이를 콕콕 찔렀거든. 나는 그때 다른 사람들처럼 이에 불과한지, 아니면 인간인지를 알아내야만 했어, 그것도 어서 빨리 알아야만 했지. 즉, 내가 넘어설 수 있는지, 아니면 그럴 수 없는지를! 감히 몸을 숙여 취할 수 있을까, 아닐까? 벌벌 떨기만 하는 피조물인가, 아니면 권리를 갖고 있는가…….”

“죽일 권리? 죽일 권리를 갖는단 말이에요?” 소냐가 손뼉을 탁 쳤다.

“에-에잇, 소냐!” 그가 짜증 난다는 듯 소리를 치며 그녀에게 뭐라고 반박하려고 했지만, 경멸스럽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내 말 좀 끊지 마, 소냐! 내가 당신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딱 하나야. 그때 악마는 나를 꾀었지만 나중에 설명해 주더군,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이에 불과하니까 그리로 갈 권리를 갖지 못했노라고! 그 녀석은 나를 우롱했고, 그 때문에 나는 지금 당신을 찾아온 거야! 손님을 맞아 주시라! 만약 내가 이가 아니라면 당신을 찾아왔겠어? 들어 봐. 내가 그때 노파에게 간 것은 그저 시험하기 위해 들렀던 것일 뿐이야……. 그렇게 알아 둬!”

“그러고는 죽였군요! 죽였어요!”

“죽였다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과연 사람을 그런 식으로 죽이나? 사람을 죽이러 갈 때 과연 그때 내가 한 것처럼 할까 말이야! 언제 당신에게 이야기해 주지, 내가 어떤 식으로 갔는지……. 내가 과연 노파를 죽인 걸까? 나는 나 자신을 죽인 거야, 노파가 아니라! 어쨌거나 그로써 나 자신을 작살낸 거야, 단번에 영원토록……! 그 노파를 죽인 것은 악마지, 내가 아니야……. 됐어, 됐어, 소냐, 됐다고! 나를 내버려 둬.” 그는 경련이 일만큼 비탄에 잠기며 갑자기 소리쳤다. “그냥 내버려 둬!”

그는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두 손바닥으로 머리를 펜치처럼 꽉 움켜쥐었다.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 소냐의 입에서 괴로움에 찬 절규가 터져 나왔다.

“자, 이제 어떻게 하지, 말해 봐!”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서, 절망에 빠져 추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냐니!” 그녀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이렇게 외쳤는데, 지금까지 눈물범벅이던 그녀의 눈이 갑자기 번득이기 시작했다. “일어나!(그녀는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는 거의 깜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 지금 당장 나가서는 교차로에 서서 우선 당신이 더럽힌 저 땅에 절을 하고 입을 맞춘 다음 온 세상을, 사방을 향해 절을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말해. 그러면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다시 생명을 보내 주실 거야. 갈 거야? 갈 거지?” 그녀는 발작을 하듯 온몸을 벌벌 떨며 이렇게 묻고는 그의 두 손을 붙잡아 자신의 두 손 안에 꽉 쥐면서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는 그녀의 느닷없는 환희에 너무 놀라 충격까지 받았다.

“혹시 유형살이를 말하는 건가, 어, 소냐? 자수해야 한다, 그런 소리?” 그가 음울하게 물었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속죄하는 것, 바로 그렇게 해야 해.”

“아니! 나는 놈들한테는 가지 않겠어, 소냐.”

“그럼 사는 건, 아니 어떻게 살아가려고? 대체 뭘 믿고 살려고?” 소냐가 절규했다. “과연 지금 그럴 수 있을까? 어머니한테는 어떻게 말하려고?(오, 그분들, 그분들은 이제 어떻게 될까!) 하긴 나도 참! 당신은 이미 어머니와 동생을 버렸는걸. 그래, 벌써 버렸어, 버렸는걸. 오, 맙소사!” 그녀가 소리쳤다. “이 사람 스스로 이미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사람과 인연을 끊고 어떻게, 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제 당신은 어떻게 될까!”

“어린애처럼 굴지 마, 소냐.”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놈들에게 무슨 죄를 지었지? 대체 왜 가야 되냐고? 놈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 이 모든 것이 그저 환영일 뿐이야……. 그놈들이야말로 사람을 수백만 명이나 진을 빼 놓고서는 선행이라고 생각하지. 사기꾼에 비열한 놈들이야, 소냐……! 난 가지 않겠어. 게다가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죽이긴 했지만 돈을 훔칠 용기가 나지 않아 돌 밑에 숨겼다고?” 그가 신랄한 냉소를 담아 덧붙였다. “그러면 놈들은 나를 조롱하며 돈도 훔치지 못한 바보라고 말할 테지. 겁쟁이에 바보, 라고! 놈들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소냐, 이해할 자격도 없는 작자들이지. 내가 왜 가야 하지? 가지 않겠어. 어린애처럼 굴지 마, 소냐…….”

“죽도록, 죽도록 괴로워할 텐데.” 이렇게 되뇌면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애원하며 그에게 두 손을 뻗었다.

“아직은 나 자신을 너무 비하했는지도 모르겠어.” 그는 생각에 잠기며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은 난 이가 아니라 인간인지도 몰라, 나 자신의 운명을 너무 서둘러 결정했는지도……. 아직은 싸워 볼 거야.”

오만방자한 냉소가 그의 입가로 삐죽 배어 나왔다.

“그런 고통을 짊어지겠다니! 평생, 평생 동안……!”

“익숙해질 테지…….” 그가 생각에 잠긴 듯 암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질문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결국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 표면적인 사실에 대한 진술이란 ‘라스콜니코프’가 ‘노파와 그 여동생’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 라스콜니코프의 말에서 그는 사실은 그 스스로가 노파와 여동생을 죽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기 스스로’를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뒷이어 노파와 그 여동생을 죽인 것은 자신이 아닌 어떤 악마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당연히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이지만 적어도 그의 위와 같은 진술 중에서, 자기 자신을 죽였다라고 말하는 진술은 적형적인 듯 하다. 그는 노파와 여동생을 죽일 때 이미 자기 자신의 미래를 살해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의 운명은, 그 선택을 기점으로 분기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자수가 아닌 견뎌내기를 선택하는가? 자수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행위인가? 그러나 자수를 하고 형법에서 정한 형을 산다고 해도, 라스콜니코프가 자신의 신념에 위배되는 살인을 했다는 죄책감을 씻을 수 없다. 형법은 그저 사회가 정하는 벌칙일 뿐이고, 라스콜니코프가 정한 벌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존심이 세고 대학 교육을 받던 이론가였으므로, 더욱이 그는 형법에서 정하는 벌칙으로 자신이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수는 그에 대한 형벌이 될 수 없다. 아무래도 그는 자수가 아닌 견뎌대기를 통해, 죽도록 괴로운 상태에 자기 자신을 가둠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형벌을 집행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30.

“죄송, 죄송하지만, 물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로서는 이해하기 상당히 힘들 테지요. 하지만 파리에서는 오직 논리적 설득만 갖고 광인을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두고 이미 진지한 실험을 했는데, 알고 계십니까? 그쪽에, 최근에 사망한 진지한 학자이자 교수 한 명이 그런 식의 치료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답니다. 그의 기본적인 생각인즉, 광인이라고 해서 유기체에 특별한 손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광기는 말하자면 논리적인 오류이자 판단의 오류이며 사물에 대한 옳지 못한 시각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는 환자를 점차적으로 논박하여, 상상이 되십니까, 글쎄, 성과를 얻었다는군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샤워 요법까지 병행했기 때문에 이 치료법의 성과는 물론 의심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적어도 그런 것 같아요…….”

정신병을 대화만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을까? 과연 한 사람의 정신적, 무의식적인 요소에 대한 치료를 오로지 그의 의식적 요소에 접근함으로써 진행할 수 있을까? 광인은 논리적 오류, 판단의 오류, 사물에 대한 옳지 못한 시각에 의하여 탄생하는 것이라는 시각은 옳은가? 그러한 믿음에 근거하면, 라스콜니코프는 광인인데, 라스콜니코프는 광인인가?

#31.

“선생은 어쨌거나 구제불능의 비열한은 아닙니다. 절대 그런 비열한은 아니죠! 적어도 자기 자신을 오랫동안 기만하지 않고 단번에 최후의 기둥에 다다랐지요. 제가 선생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바로, 믿음이든 신이든 찾아내기만 하면 창자를 도려내도 가만히 선 채로 미소를 지으며 고문자들을 바라볼 만한 자들 중 한 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 찾아내십시오, 그럼 살게 되겠지요. 선생은 첫째, 이미 오래전부터 공기를 바꿀 필요가 있었습니다. 뭐 어떻습니까, 고통도 역시나 좋은 일입니다. 고통받으십시오. 고통을 자처하는 미콜카가 옳은지도 모릅니다.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쯤은 저도 압니다만, 이것저것 너무 잔꾀를 부리지 마십시오. 생각은 그만하고 곧장 삶에 몸을 내맡기십시오.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곧장 해안가로 이끌려 가 두 발로 서게 될 테니까요. 그럼, 어떤 해안가일까요? 저라고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는 그저 선생의 앞날이 창창하다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 선생이 지금 제 말을 판에 박힌 설교쯤으로 받아들이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 나중에 상기하시면 언제든 쓸모가 있을 겁니다. 그러시라고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고요. 노파만 죽이셨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행여 다른 이론을 생각해 내셨더라면 억 배는 족히 더 추악한 일을 저지르셨을테니까요! 하느님께 감사드려야겠지요. 선생이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뭔가를 위해 선생을 지켜 주시는지도 모르지요. 마음을 크게 잡고 무서움을 좀 버리십시오. 위대한 실행이 임박하자 겁이 나십니까? 아니요, 이럴 때 겁을 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일단 그런 걸음을 내디뎠다면 힘을 내셔야지요. 이건 이미 정의의 문제입니다. 자, 이제 정의가 요구하는 것을 실행하십시오. 선생이 믿지 않으신다는 것쯤은 압니다만, 그래도 틀림없이 삶이 끝까지 이끌고 갈 겁니다. 나중에는 스스로 좋아하시게 될 테고요. 지금 선생에게는 오직 공기가 필요할 따름입니다, 공기, 공기가!”

라스콜니코프는 심지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신은 대체 뭐 하는 사람입니까?” 그가 소리쳤다. “무슨 예언자라도 됩니까? 그래서 저 높은 곳에 평온하고 장엄하게 버티고 서서 저를 향해 오묘한 예언을 늘어놓는 겁니까?”

“제가 뭐 하는 사람이냐고요? 저로 말하자면 볼 장 다 본 인간입니다. 아마 느낄 줄도, 동정할 줄도 알고 또 뭔가 아는 것도 있지만 완전히 볼 장 다 본 인간요. 하지만 선생은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선생을 위해 삶을 마련해 놓으셨거든요.(하긴 선생의 경우에도 그냥 연기처럼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뭐, 선생이 다른 부류의 사람들 쪽으로 옮겨 간들 뭐가 어떻겠습니까? 선생 같은 마음을 가진 분이 안락을 버리기가 아까운 건 아닐 테지요? 너무 오랫동안 아무도 선생을 보지 못한들 또 어떻습니까?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선생입니다. 태양이 되십시오, 다들 선생을 우러러볼 겁니다. 태양은 무엇보다도 태양이 되어야지요. 그 미소는 또 뭡니까, 제가 무슨 실러 같아서요? 장담하지만, 제가 지금 선생의 환심을 사려고 아부를 한다고 생각하실테죠! 하긴 정말로 아부를 한다고 한들 어떻습니까, 헤-헤-헤! 로지온 로마느이치, 제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도 마시고, 아니, 아예 조금도 믿지 마십시오. 이거야말로 저의 고질병이거든요, 예, 그렇지요. 다만, 이 말만 덧붙이죠. 즉, 제가 얼마만큼 천박한 인간이고 또 얼마만큼 정직한 인간인지는 선생이 직접 판단하시면 될 것 같군요!”

라스콜니코프에게는 새로운 공기가 필요하다는 포르피리 페트료비치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로지온 로마느이치 라스콜니코프를 순교자, 엄청난 고집의 따라서 큰 일을 낼 수 있을 듯한 인물로 바라보지만 동시에 예심판사로서 범죄자로도 바라보고 있는 이 포르피리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라스콜니코프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노파를 죽였다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즉, 그는 포르피리의 표현 중에서는 ‘태양’이 되고 싶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태양’이 되지 못한 인물이며, 오히려 그러한 자신의 과거 논리가 틀렸음을 명확히 인지한 인물이다. 새로운 공기란 무엇인가? 그가 형법에서 정한 죗값을 치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공기이다. 그러한 공기는 라스콜니코프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인가? 포르피리는 말을 아끼고 있다. 그러나 오직 그의 미래가 창창하다고 말할 뿐이다. 다시 묻자, 새로운 공기란 무엇인가? 라스콜니코프는 새로운 공기로 그의 폐를 가득 채울 필요가 있는가?

#32.

“얘기하자면 깁니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여기에는, 글쎄,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마는, 그 나름의 이론이 개입되어 있는데, 내가 이해하기론, 가령 주된 목적이 좋다면 개개의 악행쯤은 허용된다는 것과 똑같은 이치랄까요. 단 하나의 악과 백 가지 선이지요! 그것도 물론, 장점을 두루 갖추었고 자존심도 한없이 강한 청년으로서는 가령 3,000 정도만 있어도 모든 출세가도가, 그의 인생의 목적에 있어 모든 미래가 다른 식으로 형성될 것인데 문제의 이 3,000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해야 한다니, 얼마나 모욕적이겠습니까. 여기에다 굶주림, 좁아터진 방, 누더기 같은 옷, 참 휘황찬란한 사회적 처지는 물론 여동생과 어머니의 처지에 대한 또렷한 의식 등에서 비롯되는 짜증까지 덧붙여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허영심이, 오만함과 허영심이 문제이지만, 하긴 아무도 모를 일이죠, 좋은 성향을 갖고 있었는지도……. 사실 그를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부디 그렇게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내 일도 아니고요. 여기에도 역시 그 나름으로 이론이 하나 있엇는데 – 그저 그런 이론인데 – 그것에 따르면 사람은, 그러니까 재료와 특별한 사람들, 즉 자신들의 드높은 처지 덕분에 법률의 구애도 받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재료 혹은 쓰레기나 다름없는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직접 법률을 만드는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진다는 겁니다.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이론이지요, une theorie comme une autre.(이론이란 그놈이 다 그놈이니까요.) 나폴레옹에 흠뻑 빠졌는데, 즉 원래는 몹시 많은 천재적인 인간들이 개개의 악은 개의치도 않았고 심사숙고할 것도 없이 그냥 넘고 지나갔다는 사실에 흠뻑 빠졌던 겁니다. 아무래도 자기도 천재적인 인간이라고 상상했던 모양, 즉 얼마간은 그렇게 확신했던 모양입니다. 자기는 이론을 정립할 줄은 알았지만 심사숙고할 것도 없이 그냥 뛰어넘는 법은 몰랐다, 그럴 능력이 없었다, 고로 천재적인 인간이 아니다, 하는 생각 때문에 심적인 괴로움이 컸으며 지금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뭐, 이건 자존심이 강한 청년에게는 굴욕적인 일이지요, 우리 시대에는 특히나 더…….”

“그럼 양심의 가책은요? 그렇다면 오빠에게 어떤 도덕적 감정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과연 오빠가 그런 인간일까요?”

“아휴,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지금은 모든 것이 흐릿해졌고, 하긴 질서정연했던 시절은 딱히 없었군요. 러시아인은 대체로 광활한 사람들입니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그들의 땅처럼 광활하여 환상적인 것에, 무질서한 것에 굉장히 많이 이끌리는 편입니다. 하지만 특별한 천재성도 없는 주제에 광활한 것이 큰 문제입니다. 기억납니까, 저녁마다 식사 후에 우리는 단둘이 정원의 테라스에 앉아 이런 종류, 이런 주제로 참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지요. 그때 당신은 바로 저 광활함을 운운하며 나를 책망했더랬지요.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가 그 얘기를 하던 바로 그때 그는 여기에 누워 자기만의 생각을 가다듬고 있었을지도 모르기요. 우리네 식자층에게는 특별히 신성한 전통이란 것이 사실상 없으니,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기껏해야 누가 책에 따라 어떻게 구성하거나…… 혹은 연대기에서 뭘 끄집어낼 따름이지요. 하지만 그나마도 주로 학자들, 그러니까 그 나름으로 죄다 얼간이들이 하는 일이라서 사교계 사람 눈에는 영 볼썽사나울 수도 있습니다. 하긴 내 견해라면 당신도 대체로 알고 있겠지만, 나는 단연코 아무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도 백수거니와 그걸 고수하고 있으니까요. 이 얘기도 우리는 벌써 여러 번 했군요. 행복하게도 당신은 심지어 내 의견에 흥미를 보였고……. 얼굴이 몹시 창백하군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33.

이 분 정도 침묵이 흘렀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바닥만 내려다보며 앉아 있었다. 두네치카는 책상의 맞은편 끝에 서서 고통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가 일어났다.

“늦었어, 그만 가 봐야지. 나는 지금 자수하러 간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자수하는지 모르겠어.”

굵은 눈물방울이 그녀의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우는구나, 두냐, 그럼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도 있을까?”

“그걸 말이라고 해?”

그녀는 그를 꼭 껴안았다.

“고통받으러 간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죄의 절반은 씻는 셈 아닐까?” 그녀는 이렇게 외치며 그를 꼭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죄라고? 무슨 죄?” 갑자기 그가 어떤 느닷없는 광분에 휩싸이며 소리쳤다. “저 추잡하고 해로운 이를, 가난한 자들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 아무에게도 필요 없는 전당포 노파를 죽였으니 마흔 가지 죄악은 용서받을 텐데, 그것이 죄라고? 나는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 죄를 씻을 생각도 없어. 그런데 왜 다들 사방에서 나에게 ‘죄야, 죄!’ 하며 손가락질을 하느냔 말이야. 다만, 내가 어처구니없을 만큼 옹졸했다는 것쯤은 이제 톡톡히 알겠고, 그래서 이제 저 불필요한 수치를 감내하러 갈 결심을 한 거야! 그저 나의 천함과 무능함 때문에 이런 결심을 한 것이지, 저어기…… 저 포르피리가 제안한 것처럼 무슨 이익 때문은 아니야……!”

“오빠, 오빠,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어쨌거나 오빠는 남의 피를 흘렸잖아!” 두냐가 절망에 차서 소리쳤다.

“다들 흘려 놓는 그 남의 피 말이지.” 그가 거의 미친 듯 흥분하며 말을 받았다. “이 세상에 언제나 폭포처럼 넘쳐 났고 지금도 넘쳐 나는 피, 샴페인처럼 넘쳐흐르는 피, 그 피 덕분에 카피톨리누스 신전에서 월계관을 씌우고 나중에는 인류의 은인이라는 칭호도 주었지. 자, 제발 눈을 똑바로 뜨고 유심히 잘 살펴봐! 나도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이 한 가지 멍청한 짓, 아니, 숫제 멍청한 짓도 아니고 그냥 어설픈 짓 대신에 수백, 수천 가지의 좋은 일을 했을지도 모르거니와 사실 이 사상 자체는 지금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멍청한 것은 절대 아니었는데, 실패하는 바람에…….(실패할 경우에는 전부 멍청해 보이지!) 이 멍청한 짓을 통해 자립할 기반을 마련하고 첫걸음을 내딛고 그 수단을 손에 넣고 싶었을 따름이고, 그랬다면 상대적으로 말해 무한한 이익을 통해 모든 것이 깨끗이 상쇄됐을 텐데……. 하지만 나는, 나는 그 첫걸음도 견뎌 내지 못했어, 비열한 놈이니까! 바로 이게 문제의 핵심이야! 어쨌거나 너희들과 같은 시각을 갖지는 않겠어. 만약 성공했더라면 나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었겠지만 이제는 꼼짝없이 올가미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건 아니잖아, 절대 그건 아니야! 오빠,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아! 형식이 틀렸단 말이야, 미학적으로 그렇게 좋은 형식이 아니었거든! 뭐, 나는 진짜 모르겠는데, 왜 사람들을 향해 폭탄을 던지고 포위 공격을 일삼는 것이 보다 더 점잖은 형식일까? 미학에 대한 두려움은 무기력의 첫 번째 징후야……! 이 사실을 지금보다 더 또렷이 의식한 적은 결코, 결코 없었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의 죄를 이해하지 못하겠어! 지금보다 더 강하고 확신에 찼던 적은 결코, 결코 없었단 말이야……!”

지칠 대로 지친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홍조마저 감돌았다. 하지만 마지막 말을 외치다가 문득 두냐와 눈이 마주쳤고 그 시선에서 자기 때문에 생긴 깊은, 정말 깊은 고뇌를 보자 저도 모르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쨌거나 그는 저 가련한 여자 둘을 불행에 빠뜨렸음을 절감했다. 어쨌거나 그가 원흉이다…….

“두냐, 얘야! 혹시 내가 잘못했다면 용서해 줘.(정말 잘못했다면 용서할 수도 없겠지만.) 그럼 잘 가! 논쟁은 그만하자! 가 봐야겠어, 정말로 가 봐야 돼. 나를 따라오지 마, 제발 부탁이야, 또 가 봐야 할 곳이 있거든……. 이제 얼른 가서 어머니 곁에 있어 줘. 제발 좀 그래 줘! 이건 내가 너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자 가장 큰 부탁이야. 어머니 곁을 잠시도 떠나지 마. 어머니를 심란하게 해 놓고 그냥 나와 버렸으니 좀처렴 견디기 힘드실 거야. 죽거나 미칙거나 하실 테지. 어머니 곁에 있어 줘! 라주미힌이 함께 있어 줄 거야, 내가 말해 놨으니까……. 나 때문에 울지는 마. 비록 살인자라고 해도 평생 의연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테니까. 어쩌면 언젠가 네가 내 이름을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너희들 얼굴에 먹칠을 하지는 않을 거야, 두고 보렴. 증명해 보일 테니까…… 지금은 그만 헤어지자.” 그는 자기가 마지막 말과 함께 약속을 할 때 두냐의 눈에 또다시 어떤 이상한 표정이 어리는 것을 알아채고는 서둘러 말을 끝맺었다. “왜 그렇게 우는 거야? 울지 마, 울지 말라고. 완전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아휴, 참! 잠깐만, 깜박했군……!”

그는 책상으로 다가가 먼지가 자욱이 앉은 두꺼운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펼치더니 책갈피에서 상아 위에 수채화로 그린 작은 초상화를 꺼냈다. 그것은 주인아주머니의 딸이자 열병으로 죽은 그의 약혼녀, 수녀원에 들어가고 싶어 했던 그 이상한 처녀의 초상화였다. 잠깐 동안 그는 표정이 풍부하면서도 병색이 완연한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초상화에 키스를 하고 두네치카에게 건네주었다.

“그 애와 그 얘기를 많이 나누었지, 오직 그 애하고만.” 그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나중에 가서 그토록 추한 모습으로 실현된 것 중 많은 것을 그 애의 마음속에 불어넣었지. 염려하지 마.” 그는 두냐 쪽을 보았다. “그 애도 너처럼 동의하지 않았거든. 그래서 지금 그 애가 없는 것이 기뻐.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이제 모든 것이 새로이 시작되고 두 동강 날 거야.” 그는 또다시 예의 그 우수에 사로잡히며 갑작기 소리쳤다. “모든 것, 모든 것이 그렇지만, 과연 나는 그럴 준비가 된 것일까? 나 자신은 그것을 원하는 걸까? 나의 시련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들 말하지! 이 모든 무의미한 시련이 무슨,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며, 과연 내가 이십 년 동안의 유형살이 이후 고뇌와 백치 상태에 짓눌리고 늙어 빠져 쇠약해질 그때 지금보다 더 잘 의식할 수 있을까, 그때는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어쩌자고 나는 지금 이렇게 사는 데 동의하는 걸까? 오, 오늘 새벽녘에 네바 강을 내려다보며 서 있을 때 내가 비열한 놈이라는 것을 알았어!”

여기서 꿈틀거리던 생각이 의외의 방향에서 논의될 줄은 몰랐다. 나는 이러한 계속 반복되는 라스콜니코프의 ‘살인’에 관한 생각을 주제로, 친구와 논쟁을 했다. 이것은 다음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34.

‘나는 참 못된 놈이야, 그런 줄은 나도 안다.’ 잠시 뒤 두냐에게 신경질적인 손짓을 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저들은 어쩌자고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걸까, 정말 그럴 가치가 없는 놈인데! 오, 만약 내가 혼자였다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 역시 아무도 절대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은 없었을 텐데! 한데 궁금하군, 앞으로 십오 년, 이십 년이 지나면 내 영혼도 이미 제법 얌전해져서 말끝마다 나 자신을 강도라고 부르면서 사람들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흐느끼게 될까? 그래, 그렇다, 바로 그렇다! 그러라고 저들은 지금 나를 유형지로 보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필요한 것이다……. 저들은 전부 거리를 앞뒤로 정신없이 쏘다니는데, 이미 천성만 봐도 너 나 할 것 없이 죄다 비열한에 강도이다. 아니, 그보다 더 할테지, 백치니까! 낵가 어쩌다 유형을 피하게 되면, 저들은 모두 고결한 분노에 사로잡혀 날뛰겠지! 오, 저들이 정말 싫다, 모조리 다!’

그는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어떤 과정을 거쳐야, 마침내 온갖 생각을 접고 저들 모두 앞에서 얌전해질 수 있을까, 신념에 있어서 얌전해질 수 있을까! 아니, 왜 그럴 수 없겠는가? 물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십 년간 끊임없이 박해를 받다 보면 기어코 그렇게 되지 않을까? 물방울이 바위를 뚫지 않나. 그렇다면 왜, 대체 왜 살아야 하며 지금 나는 대체 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이 그야말로 책에 쓰인 대로 될 것임을 잘 알면서!’

#35.

라스콜니코프는 창백해진 입술, 미동도 없는 시선으로 조용히 그를 향해 걸어가 책상 앞까지 바투 다갔으며 한 손으로 책상을 짚고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들리는 건 종잡을 수 없는 무슨 소리뿐이었다.

“몸 상태가 영 엉망이시구려, 자, 의자! 여기 의자에 앉으세요, 좀 앉아요! 물 좀 가져와!”

라스콜니코프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지만, 영 마뜩치 않은 듯 깜짝 놀란 일리야 페트로비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며 기다렸다. 물을 가져왔다.

“바로 제가…….” 라스콜니코프가 말문을 열었다.

“물부터 마셔요.”

라스콜니코프는 한 손으로 물을 물리치고 조용히 띄엄띄엄, 하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바로 제가 그때 관리 미망인인 노파와 그 여동생 리자베타를 도끼로 살해하고 금품을 훔쳤습니다.”

일리야 페트로비치는 입을 딱 벌렸다.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진술을 되풀이했다.

#36.

그는 벌써 오래전부터 아팠다. 하지만 그를 꺾은 것은 유형 생활의 공포도, 노역도, 음식도, 삭발한 머리도, 누더기 옷도 아니었다. 오! 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노역을 달가워했을 정도였다. 노역을 하느라 육체적으로 지쳐 버리면 적어도 몇 시간은 달콤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음식이, 바퀴벌레가 둥둥 떠 있는 멀건 쉬가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옛날 학창 시절에는 그나마도 먹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다. 옷은 따뜻했고 그의 생활양식에도 적합했다. 족쇄는 몸에 차고 있다는 느낌도 없었다. 삭발한 머리와 줄무늬 재킷이 수치스러웠을까? 하지만 누구 앞에서? 소냐 앞에서? 소냐는 그를 무서워하는데 과연 그가 그녀 앞에서 수치스러웠을까?

한데 어떤가? 그는 소냐 앞에서도 수치스러워했고 그 때문에 그녀를 경멸하듯 거칠게 대하며 괴롭혔다. 삭발한 머리와 족쇄가 수치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병이 났던 것이다. 오, 만약 스스로 죄를 인정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랬다면 모든 것을, 수치와 치욕마저도 견뎌 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자신을 아무리 엄중하게 심판하고 양심을 모질게 다져 봐도 지난 일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실책 외에는 유달리 끔찍한 죄를 도무지 발견할 수 없었다. 그가 수치스러워한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즉 라스콜니코프라는 인간이 운명의 어떤 맹목적인 선고에 따라 그토록 맹목적이고 허망하고 먹먹하고 어리석게 파멸했으며 만약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진정시킬 마음이 있다면 저 무슨 선고의 ‘어처구니없음’과 타협하고 그것에 굴복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현재로서는 대상도, 목적도 없는 불안이, 또 미래를 봐서도 아무런 보상도 없는 끊임없는 희생만이, 바로 이런 것이 그의 앞에 도사린 세상의 전부였다. 팔 년 후에도 그는 겨우 서른 두 살밖에 되지 않고 고로 얼마든지 인생을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고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염두에 둬야 하는가? 무엇을 지향해야 할까? 그저 존재하기 위해서 산다? 하지만 예전에도 이념을 위해, 희망을 위해, 심지어 환상을 위해 심지어 자신의 존재를 내놓을 각오를 했던 일이 천 번은 족히 됐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항상 부족했다. 그는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했다. 오직 자신의 소망의 힘만 믿고서 그 무렵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이 허용된 사람으로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설령 운명이 그에게 회한을, 가슴을 저미고 잠을 쫓아 버리는 타는 듯한 회한을 보냈다고 한들, 그로 인한 끔찍한 고통 때문에 눈앞에 올가미와 심연이 어른거렸다고 한들! 오, 그는 그것을 반겼으리라! 고통과 눈물, 사실 이것도 삶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자신의 범죄에 회한을 느끼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는 예전에 자신을 감옥까지 몰고 간 그 추악하고 정말 바보 같은 행동에 분개했듯 자신의 어리석음에 분개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미 감옥에 들어와 자유를 누리는 지금 자신의 모든 행동을 새로이 검토하고 숙고해 보니 그것이 예전의 그 운명적인 순간에 생각됐던 것처럼 그렇게 어리석고 추악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대체 어떤, 어떤 점에서’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나의 사상이 천지개벽 이래 이 세상에서 우글대고 서로 충돌하는 다른 사상이나 이론보다 더 어리석었을까? 진부한 영향에 구애받지 않고 완전히 독립적이고 폭넓은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볼 필요가 있고, 그렇다면 물론 나의 사상도 결코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 5코페이카짜리 은화 한 닢의 값어치밖에 없는 부정론자와 현자여, 그대들은 왜 중도에 멈추어 서는가!’

‘그래, 나의 행동이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그토록 추악하게 여겨지는 것일까?’ 그가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것이 악행이기 때문에? ’악행’이라는 말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나의 양심은 평온하다. 물론, 형사상의 범죄를 저질렀다. 물론, 법조항이 파괴됐고 피를 보았으니, 뭐 그렇다면 법조항에 대한 대가로 내 머리를 가져가시라……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물론 그런 경우라면 권력을 세습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쟁취한 인류의 은인들 대다수가 최초의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처형됐어야 마땅하리라. 하지만 그자들은 그 걸음을 견뎌 냈고 그랬기에 그들은 옳았던 반면 나는 견뎌 내지 못했고 그랬기에 나는 스스로에게 그 걸음을 허용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 즉 그것을 견뎌 내지 못하고 자수했다는 점에서만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 생각이 또 있었다. 그때 왜 자살하지 않았을까? 그때 강물을 내려다보며 서 있을 때 왜 자수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까? 정녕 살고 싶은 욕망이 그토록 강력했으며 그 욕망을 극복하기가 그토록 힘들었던 것일까? 죽음을 두려워한 스비드리가일로프도 극복하지 않았던가?

그는 고뇌하며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고, 강물을 내려다보며 서 있던 그때 이미 자신의 내면과 신념 속에 도사린 깊은 기만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예감이 그의 인생에서 맞이하게 될 미래의 전환과 미래의 부활과 미래의 새로운 인생관을 예고해 주는 전조일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이 경우 차라리 그의 입장에서 떨쳐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약하고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넘어설 힘도 없는, 본능의 둔중한 중압감만을 인정한 셈이었다. 동료 유형수들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그들 모두 얼마나 삶을 사랑하고 아끼는가! 감옥에 있으면 자유로운 상태였을 때보다 더 삶을 사랑하고 더 가치 있게 여기고 더 많이 아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중 어떤 자들, 가령 부랑자들은 어떤 무서운 고통인들, 고문인들 참아 내지 못했을까! 정녕 한 가닥의 햇살 같은 것이나 울창한 숲, 어디 미지의 깊은 숲속에서 벌써 삼년쯤 전에 점찍어 둔 차가운 샘물이 그들에게 그토록 많은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저 부랑자는 애인과의 밀회를 꿈꾸듯 그 샘물을 꿈꾸고 꿈에서도 그것과 그 주변에 돋아 있는 초록색 풀과 관목 속에서 지저귀는 해를 보지 않는가? 자세히 살펴볼수록 더욱더 설명할 수 없는 예들이 보이는 것이었다.

감옥을 비롯하여 자기를 에워싼 환경에서 그는 물론 많은 것을 인지하지 못했고 또 아예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왠지 그는 눈을 내리깔고 살았다. 뭘 보는 일이 너무 역겨워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많은 것에 놀라고 옛날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어쩌다 부지불식간에 인지하기 시작했다. 대ㅐ체로 가장 놀란 것은 자기와 이 모든 무리 사이에 도사린 도무지 건널 수 없는 저 무서운 심연이었다. 그와 그들은 서로 다른 종족인 것 같았다. 그와 그들은 서로를 적의에 찬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양쪽이 이렇게 갈라질 수밖에 없는 원인을 알았고 또 이해했다. 하지만 예전에는 이 원인들이 실제로 이렇게까지 뿌리 깊고 강력하리라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감옥에는 폴란드 유형수들, 정치범들도 있었다. 이자들은 이 모든 무리를 무지렁이에 노비 취급하면서 깔보고 경멸했다. 이곳에는 이런 족속을 너무나 경멸하는 러시아인도 더러 있었는데, 전직 장교 한 명과 신학생 두 명이 그랬다. 라스콜니코프는 그들이 잘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한데 그를 다들 좋아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슬슬 피했다. 결국에 가서는 그를 싫어하기도 했다. 왜일까?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들 그를 경멸하고 비웃었으며, 그보다 더 죄질이 나쁜 범죄를 저지른 자들조차 그의 범죄를 비웃었다.

“네놈은 귀족 나리잖아!” 그는 이런 말을 들었다. “그런 양반이 도끼를 들고 다니다니, 도무지 귀족 나리가 할 짓이 아니지.”

사순절의 두 번째 주, 숙사 동료들과 함께 정진할 차례가 됐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를 하러 교회에 다녔다. 무엇 때문인지는 그 자신도 몰랐는데, 한날은 말다툼이 일어났다. 다들 한꺼번에 분기탱천하며 그에게 덤벼 들었다.

네놈은 불신자야! 하느님을 믿지 않잖아!” 그를 향해 이렇게들 외쳤다. “너 같은 놈은 죽여 버려야 해.”

그들과 하느님이나 믿음에 대해 말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음에도 그들은 그를 불신자로 치부하며 죽이려 들었다. 그는 침묵만 고수할 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어떤 유형수는 숫제 발악하며 그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침착하게 말없이 그의 공격을 기다렸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얼굴선 하나 떨지 않았다. 때마침 호송병이 그와 살인범 사이를 가로막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간 피를 봤을 것이다.

그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하나 더 있었다. 왜 그들은 모두 소냐를 그토록 좋아하게 된 것일까? 그녀가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그녀를 보는 일도 드물어, 이따금씩 그녀가 잠깐씩 그를 만나러 작업장으로 나올 때뿐이었다. 그런데도 다들 벌써 그녀를 알고 있었고 또 그녀가 그의 뒤를 따라왔으며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들에게 돈을 준 적도, 특별히 뭘 도와준 적도 없었다. 그저 성탄절에 감옥 사람 모두에게 나눠 두라며 피로그와 칼라치를 가져온 일이 한 번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소냐 사이에는 시나브로 좀 더 친밀한 관계가 형성 되었다. 그녀는 그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신 써 주고 우편으로 부쳐 주기도 했다. 이 도시를 찾아온 그들의 친척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 물건은 물론 돈까지도 소냐의 손에 맡겼다. 그들의 아내나 애인도 그녀를 알고 있어서 자주 오곤 했다. 그리고 그녀가 라스콜니코프에게 가려고 작업장에 나타나거나 작업장으로 가는 죄수 무리와 마주칠 때면 다들 모자를 벗고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어머니, 소피야 세묘노브나, 당신은 상냥하고 인정 많은 우리의 어머니요!” 범죄자의 낙인이 찍힌 저 거친 유형수들이 이 작고 여윈 피조물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는데, 그녀가 미소 짓는 모습을 다들 좋아했다. 그들은 그녀의 걸음거리마저 좋아하여 그녀가 지나가면 뒤태를 보려고 몸을 돌리고 칭찬했다. 그녀의 체구가 참 자그마한 것도 칭찬했고, 무슨 건수로 칭찬해야 할지 모를 정도가 됐다. 심지어 치료를 받기 위해 그녀를 찾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37.

그는 사순절이 끝날 무렵과 성주간 내내 병원에 누어 있었다. 이미 건강이 회복된 다음, 신열에 시달리며 혼미 상태로 누워 있을 때 꾼 꿈이 떠올랐다. 병을 앓는 그의 머릿속에 어른거린 환몽인즉, 전 세계가 아시아의 오지에서 유럽으로 들어온,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어떤 무서운 돌림병의 희생양이 될 운명에 처한 것이었다. 몇몇 선택된 극소수만 빼고 다들 파멸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새로운 선모충이, 인체에 기생하는 미생물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 미생물은 지능과 의지를 부여받은 영적 존재였다. 그것이 몸 안으로 침투하면 그 사람들은 즉시 귀신에 들린 듯 미쳐 갔다. 하지만 이렇게 감염된 사람들은 여태껏 유례가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대단히 현명한 자로, 진리에 있어 확고부동한 자로 간주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판결, 학문적 결론, 도덕적 신념과 믿음 등을 그 어느 때보다 더 확고부동한 것으로 간주했다. 마을이면 마을, 도시면 도시, 민족이면 민족이 모조리 다 감염되어 미쳐 갔다. 다들 불안에 떨었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누구나 자기 하나만 진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여 남을 보면서 괴로워하고 자기 가슴을 치면서 울며불며 손을 쥐어틀었다. 누구를 어떻게 심판해야 할지 몰랐고,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서로 합의를 볼 수 없었다. 누가 유죄이고 누가 무죄인지 결정할 줄로 몰랐다. 사람들은 무슨 터무니없는 적의에 사로잡혀 서로를 죽였다. 서로에 맞서 완전한 군대를 결성했지만 진군하기가 무섭게 갑자기 자기 편을 못살게 굴기 시작했고 대열은 흐트러지고 병사들은 서로를 향해 덤벼들어 서로 찌르고 베고 물고 뜯고 잡아먹었다. 도시에서는 하루종일 경종을 울리며 모두를 소집했지만, 누가 무엇을 위해 부르는지도 모른 채 다들 불안에 떨기만 했다. 원래 종사하던 생업도 내팽개쳤는데, 누구나 자기 생각이며 개선 사항을 제안하는 바람에 서로 합의를 볼 수 없었던 까닭이다. 농사일도 중단되었다. 어디선가는 사람들이 떼 지어 몰려들어 함께 무슨 합의를 하고 서로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했지만, 이내 자기들이 방금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뭔가를 벌여 주먹다짐과 칼부림이 일어났다. 화재가 시작되고 기근이 시작됐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이 파멸해 갔다. 돌림병은 기세등등해져 점점, 점점 더 멀리 처져 갔다. 전 세계를 통틀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사람은 몇 명에 불과했는데, 그들이야말로 인류의 새로운 종과 새로운 삶을 시작할, 대지를 갱신하고 정화할 소명을 부여받은 순결하고 선택된 자들이었으나 아무도 그 어디서도 그 사람들을 보지도, 또 그들의 말과 목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위 공상은 나의 대믿음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공상으로 보인다. 그렇다는 점에서, 공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적인 공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위의 공상에서 문제의 근원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함’에 있었다. 이해가 없다면 타협도 있을 수 없다. 타협은 상호 간의 의견 교환에서 출발하는 법이고, 남의 의견을 들으려면 자신의 의견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견해가 기본이 되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더더욱 토론과 토의의 중요성, 그리고 나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견해를 기본적으로 다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는다. 이것은 비단, 아마도, 모두가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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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사유 주) 문맥을 고려할 때, 여기서의 ‘이론’이란 ‘이론(異論)’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