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32.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I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Lyrics of ‘Mili – Compass’1이 곡은 어느 게임의 서사에서 테마곡으로 사용되었다. 테마곡이 삽입된 이야기장은 허먼 멜빌의 《모비 딕(Moby-Dick)》을 모티브로 삼는데, 이 소설은 단순히 대자연과 인간의 대결을 그린 것이라고 일갈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명작이다.
Bon voyage
Your mermaid’s setting sail2문제가 되는 게임의 서사를 고려하면 여기서 인어(Mermaid)는 《모비 딕》의 화자 이스마엘(Ishmael)로 볼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이스마엘은 서자로, 오랫동안 아버지와 본처 사이에 자식이 없자 들인 첩으로부터 태어났다. 추후 본처가 출산하자 그녀는 자신의 아들의 자리가 이스마엘에 의해 위협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스마엘과 그의 친모를 사막으로 추방했는데, 이 성경적 맥락 덕분에 서양 문화권에서 이스마엘은 추방자(환영받지 못하는 사람, Persona Non Grata)로 이해된다. 《모비 딕》에서의 이스마엘은 경험 있는 뱃사람이긴 하지만 포경에 관해서는 초짜인 인물로, 거대한 흰 고래 ‘모비 딕’을 쫓는 포경선 피쿼드 호에 타 그 최후까지 모두 함께하는 인물이다.
At last
Full speed towards your heart3모티브가 되는 소설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여기서의 심장(heart)란 결국 모비 딕, 거대한 고래의 심장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상상하게 되는 것이란 모비 딕, 그 거대한 고래를 숨기고 있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넓고 깊은 바다로 돌진하는 피쿼드 호다.
Full speed towards your heartI’ve had enough
I’m reclaiming myself
The aft4‘Aft’는 배 또는 항공기의 후미를 뜻하는 부분으로, 이 음악의 모티브가 《모비 딕》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배의 후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피쿼드 호와 같은 전통적인 범선에는 후미에 배가 어디로 나아갈지 결정하는 조타석이 설치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무언가를 뒤로 하고 나아가려면 결국 키를 잡을 수밖에 없지 않던가.
Leaving behind the hurt
Leaving behind the hurtWhen it snapped5‘Snapped’는 어떤 대상이 툭 소리를 내며 부러지거나 끊어진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비유적으로 참다가 결국 한계에 도달해 감정적으로 폭발해버린 상태를 이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부러진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바로 다음 행을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해본다.
My compass6나침반은 전통적인 항해술에서 배의 현재 위치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파악해,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고 어떤 대처를 취해야 할지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온 도구다. 그런 나침반이 하나뿐인데, 깊고 끝없는 바다 속으로 떨어져 아주 깊숙하게 가라앉는다고 생각해보라. 나침반이 문학에서 전통적으로 방향 · 판단 준거 · 도덕을 의미해왔다는 역사까지 고려한다면 여기서 우리가 들여다보게 되는 깊이는 나침반이 가라앉는 저 바다만큼이나 까마득하다. was swallowed by the sea7바다는 모비 딕,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피쿼드 호, 그리고 그 피쿼드 호에 탄 이스마엘과 선장 에이해브(Ahab)가 모두 있는 장소다. 너무나도 넓어서 어디에 고래가 있는지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기 어려운 광활한 공간이기도 하다. 나는 피쿼드 호 후미에서 목격하는 망망대해를 상상해본다. 잔잔한 바다여도 좋고, 거친 바다여도 좋을 것이다. 주목하고 싶은 감정은 눈 앞의 그 광경을 계속 바라볼 때 스스로를 엄습하기 시작하는 압도감 내지는 두려움이다.
My compass was swallowed by the sea
I cursed this relationship between you and me8여기서 관계의 양 당사자인 ‘you’와 ‘me’에 각각 대응시킬 수 있는 《모비 딕》의 요소는 다양하다. 만약 이 곡의 화자를 이스마엘로 본다면 ‘you’에는 바다, 모비 딕, 또는 게임의 서사까지 고려한다면 거대한 모비 딕을 자신의 손으로 기필코 죽이고자 하는 인물인 선장 에이해브까지 대응시켜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셋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 결국 한 사람에게 있어 타인은 언제나 광대한 바다이기도 하고, 모비 딕이기도 하며, 선장 에이해브 또는 그의 광기이기도 하니까.I wanted blood9나는 여기서의 ‘피(Blood)’가 누구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일지 생각해보고 싶다. 가장 쉽게는 모비 딕을 작살로 찌를 때의 피라고 볼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입은 자신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그 두 피는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I wanted black and white
Clear cut
Your evils predefined10보통 악(evils)을 우리는 보편적인 무엇 혹은 가치적 척도에 따라 판정된 부정적인 현상 · 행위 내지는 이를 행한 주체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여기서는 그 보편성이 ‘Your’라는 소유격에 의해 부정되고 악이 주관적으로 정의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Your evils predefined11“When it snapped”부터 여기까지는 모두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다른 모든 부분들은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 대목은 이미 “Leaving behind”된 시점에 대한 회상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Hold on tight12이 시점에서 이미 ‘나’는 나침반을 잃어버린 상태라는 점을 생각해보라. 이 현 시제의 명령문은 ‘나’가 그 상태에서도 다시 한 번 키를 잡고 피쿼드 호를 전진시키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모비 딕》의 마지막 장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벌어지는 거대한 고래와 피쿼드 호의 사투도 겹쳐진다.
My compass is curiosity13이 문장은 중의적이다. 호기심이 잃어버린 나침반의 역할을 대신하는 길라잡이가 되었다고 해석될 수도 있고, 동시에 화자가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간 자신의 나침반에 이끌리고 있다는 고백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음악 자체로 보기에 자연스러운 해석은 전자지만, 나는 후자의 해석을 선택하고자 한다.
My compass is curiosity
I’m piercing through the rope that strangled you and me14밧줄은 연결을 묘사하는 상징물로 널리 활용되어 왔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떠올릴 수 있는 문장은 앞쪽의 “I cursed this relationship between you and me”다. 마침 정확히 “you and me”가 겹치기까지 한다. 앞서 나는 만약 ‘me’가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 이스마엘을 가리킨다고 한다면, ‘you’는 바다 · 고래 모비 딕 · 선장 에이해브 중 하나이거나 어쩌면 그 모두일 수도 있다고 쓴 바 있다. 이는 《모비 딕》의 절정과 함께 곱씹어볼 만한데, 최후의 사투에서 선장 에이해브는 모비 딕에게 찔러넣은 작살의 밧줄에 목이 휘감겨 끌려가 그대로 바다로 떨어져 죽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정확히 바다 · 모비 딕 · 에이해브는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 장면은 또 하나의 해석 상 문제를 야기하는데, ‘me’에 대응된다고 보는 인물 이스마엘은 밧줄에 묶이거나 끌려가는 장면이 없기 때문이다. 원작 《모비 딕》에서 그는 밧줄에 휘감겨 탈출을 위해 버둥거리지 않는다. 그는 그저 최후의 생존자이자 서술의 양심으로 그려질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밧줄’은 연결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면서도, 모비 딕을 앞에 둔 ‘me’와 ‘you’가 보이는 상이한 현재를 암시하는 효과를 가지게 된다. 피쿼드 호라는 하나의 운명으로 엮였던 두 인물 중 하나는 밧줄에 휘감겨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지만, 다른 한 명은 ‘실제로 묶인 적 없었던’ 밧줄을 뚫어내고 있다. 나는 이 대조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Let us be free15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일차적으로는 밧줄이다. 그러나 밧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모비 딕》에서 이스마엘은 밧줄에 휘감기지 않았기에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가지 않고 살아남아 다시 태양을 본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High tide, Low tide
High tide, Low tide
High tide, Low tide
High tide, Low tide16에필로그. “극은 끝났다. 하지만 왜 여기에서 더 나아가야 할까? 그야 여기서 살아남은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The drama’s done. Why then here does any one step forth? ― Because one did survive the wreck).” 지금까지 고려한 것은 주로 이 음악과 원작이 상징계에서 어떻게 얽혀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이들을 기반으로 음악과 이 아래로 이어질 글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지 암시하는 일만이 남았다. 네 번의 조수를 넘어 도달한 여기에서 나는 다자이 오사무를 선장 에이해브라 부른다. 이 대응 위에서 우리는 《모비 딕》의 그 유명한 첫 문장으로 되돌아가자. 왜냐하면 그 문장은 이러하니까: “Call me Ishmael.”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독서 모임 계획서
I. 기초 정보
- 모임장: 커피사유
- 선정 도서: 다자이 오사무 作, 김춘미 易 『인간 실격』. 민음사. 2012.
- 핵심 키워드: 죄와 벌, 자살, 기만 대 직시, 구토와 실존, 이방인.
II. 도서 선정의 이유
罪。罪のアントニムは、何だろう。
죄, 죄의 반의어는 뭘까.
‘죄(罪)’. 죄란 무엇일까요?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법률로써 지정된 특정 행위를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규범을 위반하였을 때 발생하는 도덕적 상태인 것일까요?
기억이 출중한 구성원이라면 지난 해 8월에 읽었던 프리드리히 니체의 《도덕의 계보》 중 두 번째 논문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니체는 죄와 양심의 가책이 계보적으로 ‘부채 의식’에서 기원하며, 기독교를 위시한 종교는 통상 개인에게 상환이 불가능한 부채 의식을 지움으로써 인간을 왜소하게 만든다고 비판했으니까요. 프로이트의 논의를 이어 니체는 죄의식은 마조히즘(Masochism)이며, 방향이 전환된 사디즘(Sadism)이라고 봅니다. 외부에 대해 주체가 표출하는 욕망이 세계에 의해 번번히 좌절되면 그 방향이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전환되어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병리적 상태에 이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프로이트-니체의 철학적 계보가 옳다면 죄의 정체를 규명하는데 있어서는 우리 자신과 세계에 관한 다음의 세 가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① 우리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있는가? (우리는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② 이 관계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심리적 상태를 가지게 되는가? ③ 우리는 세계와 맺는 관계 속에서 어떤 태도 · 행동을 취할 수 있는가? 하나같이 크고 추상적인 질문들이라 솔직히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행히도 비슷한 문제를 고민했고 그 기록을 남긴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상기에 언급된 프로이트와 니체, 지난 여름에 읽은 알베르 카뮈,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놓인 키에르케고르, 사르트르와 같은 이들 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철학자들의 계보를 실존주의(Existent-ialism)라고 부릅니다.
이번 겨울, 우리는 실존주의 철학을 하나의 도구로 하여 죄(罪)의 문제를 살펴봅니다. 하지만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부터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질 들뢰즈의 《마조히즘》 등에 이르는 구체적이고 진지한 논의들을 살펴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어떠한 철학적 논의라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공감하지 못한다면 탁상공론으로 들릴 뿐이니까요. 우리는 소설의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는 죄(罪)와 세계의 문제에 천착한 근대 일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를, 그가 생애 전반에 걸친 총 다섯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세상을 떠나기 직전 완성된 최후작, 《인간실격(人間失格)》의 힘을 빌릴 것입니다.
처음 우리의 질문인 “죄, 죄의 반의어는 뭘까.”는 저 독백은 《인간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大庭葉蔵)가 작품 중간에 던지는 의문입니다. 하긴 우리 자신과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죄’를 규명하는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어쩌면 무엇이 죄와 비슷한지, 그리고 무엇이 죄와 다른지를 하나씩 따져보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낯선 대상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익숙한 내적 세계로 환원하는 끈질긴 ‘구애’를 보내는 것이니까요.
죄와 세계를 향한 우리의 ‘구애’, 그것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기도 · 회개 · 고백과 같이 죄와 함께 자주 들어보았던 단어들을 하나씩 불러봅니다. 이들은 죄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 것일까요? 애초에, 죄는 우리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 것일까요? 지금으로서는 요조의 입을 빌려 다시 한 번 우리의 질문을 되짚어볼 뿐입니다.
罪と祈り、罪と悔い、罪と告白、罪と…… ああ嗚呼、みんなシノニムだ、罪の対語は何だ?
죄와 기도, 죄와 회개, 죄와 고백, 죄와…… 아아, 전부 유의어야. 죄의 반의어는 대체 뭘까?
III. 문장 훔쳐보기
금월에 읽을 도서는 특성상 줄거리를 미리 알려서는 안 되는 소설이므로, 작품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여 기술한 전례의 방식 대신 아래와 같이 몇몇 문장들만을 발췌하여 소개합니다.
III.1.
그러나 이런 것은 정말이지 하찮은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 산뜻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익살로 아침부터 밤까지 인간들을 속이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니 뭐니 하는 도덕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존재인 것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31.
III.2.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스럽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p. 117-118.
III.3.
“그렇지만 감옥에 가는 일만이 죄는 아니야. 죄의 반의어를 알면 죄의 실체도 파악될 것 같은데. ……신, ……구원, ……사랑, ……빛, ……그러나 하느님한테는 사탄이라는 반의어가 있고, 구원의 반의어는 고뇌일 테고, 사랑에는 증오, 빛에는 어둠이라는 반의어가 있고, 선에는 악, 죄와 기도, 죄와 회개, 죄와 고백, 죄와…… 아아, 전부 유의어야. 죄의 반의어는 대체 뭘까?”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p. 138-139.
III.4.
불행. 이 세상에는 갖가지 불행한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불행은 소위 세상이라는 것에 당당히 항의할 수 있는 불행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 줍니다. 그러나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 없었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얘기를 하려면 넙치가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 전부가 뻔뻔스럽게 잘도 이런 말을 하는군 하고 어이없어할 것이 뻔했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말하는 ‘방자한 놈’인 건지 아니면 반대로 마음이 너무 약한 놈인 건지 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죄악 덩어리인 듯, 끝도 없이 점점 더 불행해지기만 할 뿐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없었던 것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p. 150-151.
III.5.
이제 저는 죄인은커녕 미치광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니오, 저는 결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아아, 그렇지만 광인들은 대개 그렇게들 말한다고 합니다. 즉 이 병원에 들어온 자는 미친 자, 들어오지 않은 자는 정상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호리키의 그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미소에 저는 울었고, 판단도 저항도 잊어버렸고, 자동차를 탔고, 여기에 끌려와서 정신 이상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나가도 저의 이마에는 광인, 아니 폐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겠지요.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60.
IV. 작가 소개
이하에는 우리 책의 역자인 김춘미 교수가 쓴 작품 해설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생애와 관련된 부분만을 뽑아 재구성한 ‘부록 I’을 압축하여 옮깁니다. 역자의 해설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세계를 일본인의 기본 정서 · 심리, 전후 일본의 상황과 연계지은 높은 완성도의 글이기에 가급적 우리 모임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부분들만을 삭제한 ‘부록 I’을 권장드리고 싶습니다만, 글이 너무 긴지라 아래에는 이를 상당히 축약하고 ‘다섯 번의 자살 시도’로 요약되는 다자이의 생애만을 요약해 옮겼습니다. 보다 풍부한 논의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부록 I’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자이 오사무(본명 쓰시마 슈지(津島修治), 1909~1948)는 삼십구 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애에서 다섯 번 자살을 시도하고, 결국 다섯 번째 시도에 생을 마감하였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처절한 자기 파멸로 치닫게 하였을까? 이 문제를 푸는 것이 다자이를 해독하는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실격」은 다자이가 평생 동안 겪은 충격적인 사건들을 허구화한 작품이며 어떤 면에서는 자기 해명의 책으로 불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죽음을 지향한 원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 아울러 책에 함께 실린 「직소」는 성경 속 예수와 유다에 대한 다자이 나름의 조명을 통해, 다자이에게 있어 기독교 특히 예수의 의미를 풀어볼 수 있는 단편으로서 그가 죄와 세계에 대해 가진 생각들을 풀어볼 수 있는 주요한 참고작이라 할 수 있다.
다자이가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한 것은 1929년 12월 10일 밤, 히로사키 고교 3학년 재학 중의 일이다. 그는 일본 본토 북단에 위치한 아오모리현 쓰가루군 가네기 시에서 대지주 쓰시마 겐에몬의 11남매 중 열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병약했기에 일찍이 모친으로부터 떨어져 유모와 숙모의 손에서 큰 다자이는 귀족원 의원이었던 아버지가 주도하는 엄격한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대가족에 둘러싸인 유년기를 보냈다. 천성적으로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 때문에 타인에 대한 시선을 놓친 적이 없는 다자이는 고교 시절 시대적 사조였던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면서 자신의 출신 성분에 깊은 절망을 느꼈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것이 유년기의 경험과 결부되어 자살로 이어졌으리라 추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 · 중등학교 때 높은 학업 성취도를 유지함에 따라 가족들로부터 높은 기대를 받은 오사무는 중학교 때부터 문학에 빠져든 끝에 작품 활동으로 점차 관심이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 전통 인형극 음악인 기다유부시를 배우면서 어린 기녀 하쓰요와의 교제를 시작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다자이가 수면제를 과복용하여 첫 번째 자살 미수 사건을 일으킨 밤은 2학기 학기말 고사가 시작된 전날이었다. 따라서 첫 번째 자살 소동은 집안 식구들과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게 된 데에 대한 회피책으로서의 자살극으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할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 자살 시도는 도쿄 대학 불문과에 입학한 1930년의 일이다. 대학 시절 오사무는 선배를 통해 마르크스주의 학생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이 와중 히로사키 고교 시절 교제하던 기녀 하쓰요가 도쿄로 도망쳐와 다자이는 집안으로부터 책임을 추궁당한다. 큰형 분치는 둘의 결혼을 인정하고 다달이 생활비를 대주는 대신 당시 비합법이었던 좌익 운동에서 손을 끊을 것, 분가 그리고 제적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한다. 다자이에게 있어 생가는 출신 성분에 대한 절망의 원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깊은 애정과 긍지를 느끼는 심리적 안식처였기에 큰형을 통한 생가로부터의 의절은 상당한 충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인간 세상에 적응할 줄 모르는 생활 무능력자라고 인식한 이 시기의 다자이는 온 집안의 귀염둥이 막내에서 하루아침에 집안의 망신이 되었다는 자괴감, 그리고 하쓰요와의 관계에 따라 이제는 한 가정의 장으로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매우 불안했을 것이다. 이해 11월 19일자로 분가해서 제적된 호적 등본을 받은 다자이는 동월 29일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카페 여급 아쓰미와 가마쿠라 해변에서 수면제를 먹고 동반 자살을 기도한다. 이는 아쓰미만 사망에 이르고 다자이는 자살 방조죄로 구류되었으나 생가의 도움으로 기소 유예가 되는 결말로 이어진다. 집안 식구들을 실망시킨 것과 생가로부터 의절 당한 것에 낙담하여 저지른 자살 소동이 오히려 집안의 신임을 완전히 잃게 만든 셈이다. 이 때 그가 여자를 죽게 만들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심리적으로 치유하기 어려운 죄책감을 갖게 하였고, 이는 「인간 실격」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들어간다.
세 번째 자살 시도는 1935년 3월의 일이다. 대학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다자이는 집안으로부터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좌익 운동과 여자 문제, 그리고 창작에 몰두하느라 거의 학교에 나가지 않는다. 내년에는 학교를 졸업하겠다고 형을 속이며 집안에서 학비를 타는 생활을 이어나가던 다자이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가마쿠라 산에서 목을 매 죽으려다 실패한다. 이 시기의 자살 시도는 단순히 그가 졸업 가망이 없어졌다고 해서 벌인 일은 아니다. 「만년(晩年)」 등의 집필에 매달리고 있던 그는 졸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 시기 다자이에게 있어 작품 활동은 명예 회복을 시켜주고 왜 자신이 학업에 전념하지 못했는가를 증명해 줄 유일한 돌파구이자 희망이었다. 그는 빈축을 사면서까지 아쿠타가와상 수상을 계속 시도할 정도로 절박했다. 좌익 운동의 동지, 집안 식구, 아쓰미…… 이들 모두를 배반했다는 의식을 가진 그는 “죽는 게 최선이야. 아니, 나만이 아니야. 적어도 사회 진보에 마이너스가 되는 자는 전부 죽어야 해.”(「잎」)라고 쓸 정도로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심정이었던 다자이에게 있어 자살은 일종의 처세술 같은 면이 컸다. 작품이 잘 진척되지 않아 자기 증명이 불가한, 도저히 타개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혔을 때 죽음으로 면책받으려고 하는 처세술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네 번째, 다섯 번째 자살 시도는 이전의 자살 시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것으로 분리해서 논해야 한다. 1935년 4월, 맹장염 수술 후 복막염을 일으켜 중태에 빠졌던 다자이는 회복기에 사용한 마악성 진통제에 중독된다. 1936년 그는 중독 치료를 위해 정신병원에 수용되는데, 단순히 중독 치료를 위해 일반적인 병원에 입원하는 것으로 믿었던 그는 아내와 스승에게 배신당했다는 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이 입원은 동년 10월 13일부터 11월 12일까지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다자이의 극심한 인간 불신은 물론, 그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깨닫는 데 결정적으로 일조한다. 「인간 실격」에 쓰인 “인간이 아닌” 존재로서의 자기 인식은 그의 이 같은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자살 시도는 1937년 3월 여름에 벌어진다. 그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사이에 아내 하쓰요가 다자이와 막역한 지인이었던 한 화가와 불륜을 저지른 사건이 이유였다. 다자이는 하쓰요와 함께 수면제를 과다복용하고 동반 자살을 기도했지만 두 번째 자살 시도와 유사하게 자신은 실패하고 그녀만 떠나보낸다. 두 번째 자살 시도의 결말 때문에 아쓰미에게 죄의식을 가져왔던 다자이에게는 이제 자기가 하쓰요를 버렸다는 생각까지 추가되었고 그는 극심하게 괴로워한다. 정신병동에 수감되어 인간 실격자가 되었다는 인식과 자기혐오, 그때 그를 데리고 간 누구보다도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은 하쓰요의 불륜으로 인해 「인간 실격」에 그려진, 그가 무엇보다도 아끼고 동경하던 ‘순수한 것’, ‘무구한 것’, ‘신뢰’를 산산조각 나게 만든 치명타였다고 할 수 있다.
불행과 죄의식에 단단히 사로잡힌 그를 지탱한 것은 문학에 대한 열정과 자신의 인생을 적나라하게 그려 냄으로써 자신과 같은 약자에게 봉사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네 번째 자살 시도 이후 미치코 부인과 결혼하고 일시적 소강 상태를 얻어 낙관적인 수작들을 발표하며 비교적 밝고 건전한 작품들을 많이 쓰지만, 패전 이후의 일본은 다시 그에게 환멸과 실망만을 안겨준다. 인간 실격자라 자조하며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획득한 깊이 있는 인생 통찰이 당대 사회상에 대해 느끼게 한 분노는 그대로 그를 좌절과 자포자기로 이끌었다.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자살 시도는 1948년에 일어난다. 정신병원에 입원하던 시기 발견된 폐결핵이 이 시기 각혈을 할 정도로 악화된 것도 한몫했는지 모르나, 그의 자기 파멸에의 지향은 6월 13일, 마지막까지 떠나지 않고 그의 곁을 지키던 야마자키 도미에와 약을 먹고 다마강 수원지에 투신함으로써 완결된다.
V. 중심 질문들
금월의 독서모임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직소》의 서사 및 인물을 통해 자기 자신과 세계의 관게를, 그 과정 속에서 ‘죄의 반의어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합니다. 따라서 이번 독서모임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래와 같이 정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각자 생각해보고 나름대로 내린 결론 도는 그 과정 중에서 마주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 V.1.1. ‘죄(罪)의 반의어’는 무엇인가? (주문(主問))
- V.1.2. 오바 요조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은 무엇이라 생각하고 있는가? (일반 인물 분석)
- V.1.3. 오바 요조가 가지는 ‘죄의식’이란 무엇인가? 이 인물에게 있어 죄(罪)란 무엇인가? 즉, 요조는 자신이 말하는 죄(罪)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죄와 인물의 관계 분석)
- V.1.4. 《직소》에서 묘사되는 예수와 유다는 각각 어떤 인물인가? 유다는 예수에 대해 어떤 감정과 인상을 가지는가? (기독교적 인물에 대한 해석 분석)
- V.1.5. 《인간실격》과 《직소》의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는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저자에게 있어 죄(罪)란 무엇인가? (죄와 저자의 관계 분석)
- V.1.6. 나에게 있어 죄(罪)란 무엇인가? (죄와 나의 관계 분석)
VI. 모임 계획
금월의 총 3번 이루어질 모임은 서로의 독후감을 논평하는 시간 없이 다음과 같은 계획으로 운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계획을 열거하기 전, 모임 계획과 관련한 몇 가지 부언을 아래와 같이 붙이고자 합니다.
모임의 각 회차에서 각 구성원은 반드시 적어도 필수 읽어올 범위까지는 도서를 읽어와야 합니다. 권장 읽어올 범위는 해당 회차에서의 논의나 이해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 호스트가 읽어올 것을 권장하는 도서의 범위로, 읽어오는 것이 강제되지는 않으나 다만 권장됩니다.
모임의 원활한 진행을 보조하면서 구성원들이 도서와 모임에서 진행할 토의 · 토론의 주요 논점을 미리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각 회차마다 구성원들이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내용을 정해두었습니다. 우리 모임의 규칙에 의거하여 이 내용들이 누락되었다고 해서 불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나, 모임에서 논의할 부분들을 미리 생각해보고 준비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책을 읽을 때 해당 내용을 생각해보고 독서 노트에 정리하여 올리는 것이 강력하게 권장됩니다.
이번 독서모임은 문학 작품을 다루지만, 실존주의의 맥락 속에서 소설의 내용을 조명하고자 하므로 철학 초심자가 많은 우리 모임의 상황을 고려하여, 실존주의와 관련해 참고할 수 있는 추천 문헌이 회차별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해당 문헌에 대한 참고는 전적으로 구성원의 자유이며, 필수는 아닙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시공간을 산 일본의 문호 다자이 오사무의 문제 의식과 서양의 한 철학 사조가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를 짐작하는데 큰 도움이 되므로 가급적 탐독하기를 권장합니다.
이제 각 회차별로 나누어 모임의 구체적인 계획을 읽어올 범위와 독서노트에 포함해야 할 내용들을 순서대로 아래와 같이 밝힙니다.
VI.1. 제1회차: “인간실격(人間失格) I”
自分には、人間の生活というものが、見当つかないのです。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 필수 읽어올 범위: 〈인간 실격〉의 ‘서문’ ~ ‘두 번쨰 수기’ (88쪽까지)
- 권장 읽어올 범위: 필수 읽어올 범위에 더해, 본 모임계획서의 ‘IV. 작가 소개’ (가능하다면, 본 모임계획서의 ‘부록 I.’)
- 추천 참고 문헌
- VII.1. 도서 中 〈알베르 카뮈 著, 유기환 易. 『이방인』. 현대지성. 2023.〉
- VII.2. 철학저널 및 학위논문 中 〈이경희,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에 나타난 절망과 죄의 문제: 키에르케고르의 관점으로 읽기.」〉
- 구성원들이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내용
- 자신이 생각하는 죄(罪)의 반의어(들)와 그 이유. (중심 질문 V.1.1.과 V.1.6.)
- ‘두 번쨰 수기’까지의 부분들에서 알 수 있는 화자 요조의 특징 · 성격과 그렇게 생각한 이유 (중심 질문 V.1.2.)
- 그 외 기타 독서 범위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이나 문장들과 그 이유
- 독서노트의 내용을 공유하고, 자유 토의.
- ‘두 번째 수기’까지의 부분들에서 알 수 있는 화자 요조의 특징 · 성격들을 종합하고 정리.
VI.2. 제2회차: “인간실격(人間失格) II”
果して、無垢の信頼心は、罪の原泉なりや。
과연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요?
- 필수 읽어올 범위: 〈인간 실격〉의 ‘세 번쨰 수기’ ~ ‘후기’ (168쪽까지)
- 권장 읽어올 범위: 필수 읽어올 범위에 더해, 본 모임 계획서의 ‘부록 I.’ (가능하다면, 책의 말미에 실린 역자의 해설 전체)
- 추천 참고 문헌
- VII.1. 도서 中 〈프리드리히 니체 著, 박찬국 易. 『도덕의 계보』. 아카넷. 2021.〉의 「두 번쨰 논문: ‘죄’ · ‘양심의 가책’ 및 기타」(pp. 97-167.)
- VII.1. 도서 中 〈알베르 카뮈 著, 김화영 易. 『시지프 신화』. 민음사. 2016.〉의 「부조리와 자살」 및 「부조리의 벽」 (pp. 15-49.)
- VII.2. 철학저널 및 학위논문 中 〈황혜경,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에 나타난 구원요구와 마조히즘.」〉
- 구성원들이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내용
- 《인간실격》 전체의 내용으로부터 알 수 있는 화자 요조의 특징 · 성격과 그렇게 생각한 이유 (중심 질문 V.1.2.)
- 자신이 파악한 요조의 특징 · 성격을 고려했을 때, 요조에게 있어서 죄(罪)의 의미와 그렇게 생각한 이유 (중심 질문 V.1.3.)
- 그 외 기타 독서 범위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이나 문장들과 그 이유
- 독서노트의 내용을 공유하고, 자유 토의.
- 《인간실격》 전체에서 알 수 있는 화자 요조의 특징 · 성격들을 종합하고 정리.
- 요조에게 있어서 죄(罪)의 의미에 대한 논의.
VI.3. 제3회차: “직소((直訴: 駆込み訴へ)”
火と水と。永遠に解け合う事の無い宿命が、私とあいつとの間に在るのだ。
저와 그 녀석 사이에는 불과 물처럼 영원히 융합할 수 없는 숙명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 필수 읽어올 범위: 〈직소〉 전체 (196쪽까지)
- 권장 읽어올 범위: 필수 읽어올 범위와 동일. 필수 범위가 짧은 만큼 많은 생각을 하고 독서노트를 자세히 작성할 것을 기대.
- 추천 참고 문헌
- VII.4. 개인 저작물들 中 〈논파록 #2. 다자이 오사무의 ‘직소’와 ‘죽음’〉
- (이 모임이 모두 끝난다면) 이 모임 계획서의 ‘부록 II’.
- 구성원들이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내용
- 《직소》에서 묘사되는 유다와 예수의 성격 · 특징과, 전통 기독교의 묘사와 다른 부분들 (중심 질문 V.1.4.)
- 《직소》에서 유다가 예수에 대해 가지는 감정 · 인상들과 그렇게 생각한 이유 (중심 질문 V.1.4.)
- 《인간실격》과 《직소》로부터 알 수 있는 다자이 오사무의 기독교 이해와 그의 ‘죄’에 대한 생각,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 (중심 질문 V.1.5.)
- 자신에게 있어 ‘죄(罪)’란 무엇이며, 그 반의어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 (중심 질문 V.1.1과 V.1.6.)
- 독서노트의 내용을 공유하고, 자유 토의.
- 《직소》에서 나타나는 예수와 유다의 묘사를 실제 기독교 성경의 묘사와 대조.
- 《직소》의 유다에게 있어 예수는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논의.
- 《직소》와 《인간실격》을 바탕으로 저자 다자이 오사무에게 있어 죄(罪)의 의미에 대한 논의.
- 자신에게 있어 죄(罪)란 무엇이며, 그 반의어는 무엇인지에 대한 최종 응답.
VII.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들
VII.1. 도서
- 알베르 카뮈 著, 김화영 易. 『시지프 신화』. 민음사. 2016.
- 알베르 카뮈 著, 유기환 易. 『이방인』. 현대지성. 2023.
- 프리드리히 니체 著, 박찬국 易. 『도덕의 계보』. 아카넷. 2021.
VII.2. 철학 저널 및 학위논문
- 부경희,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인간실격(人間失格)』 고찰: 요조(葉藏)의 자의식(自意識)을 중심으로.」 제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 이경희,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에 나타난 절망과 죄의 문제: 키에르케고르의 관점으로 읽기.」 리터러시연구. 14.5. 2023. pp. 493-519.
- 이서규, 「카뮈의 부조리철학에 대한 고찰.」 철학논집. 35. 2013. pp. 139-178. (지난 번 모임에서 읽었던 《시지프 신화》에 드러나는 카뮈의 실존주의적 입장에 대한 좋은 요약.)
- 황혜경,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에 나타난 구원요구와 마조히즘.」 픽션과논픽션. 1. 2019. pp. 89-105.
VII.3. 영상 자료
- 민음사TV,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인간 실격』 이해하기 | 다자이 오사무의 삶과 작품 세계.」 2022. Web. Accessed on 5 Jan 2026. (출판사의 소개 영상) https://youtu.be/TJtXyhcbpBE.
VII.4. 개인 저작물들
- 커피사유, 〈인간 실격: 직시하지 못한 다자이 오사무〉. Web. Accessed on 5 Jan 2026.
(《인간실격》을 처음으로 읽은 2023년 1월에 남긴 서평) https://stevenoh0908.pe.kr/blog/book/인간-실격-직시하지-못한-다자이-오사무. - 커피사유, 〈논파록 #2. 다자이 오사무의 ‘직소’와 ‘죽음’〉. Web. Accessed on 5 Jan 2026. (오사무의 《직소》 속 예수와 유다를 중심으로 모 선생님과 논의한 기록) https://stevenoh0908.pe.kr/blog/knowledges/논파록-2-다자이-오사무의-직소와-죽음.
- 커피사유, 〈논파록 #3. 니체와 오사무의 ‘합’〉. Web. Accessed on 5 Jan 2026.
(‘생’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중심으로 오사무와 니체에 대해 모 선생님과 논의한 기록) https://stevenoh0908.pe.kr/blog/knowledges/논파록-3-니체와-오사무의-합. - 커피사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0. 2024. 9. 8. ~ 2024. 9. 19.〉. Web. Accessed on 5 Jan 2026. (오사무와 니체, 알베르 카뮈의 접점: “자살의 문제”) https://stevenoh0908.pe.kr/blog/shorts/인간적인-너무나-인간적인-10-2024-9-8-2024-9-19.
- 커피사유, 〈《인간실격》과 실존적 지탱에 대한 소고〉. Web. Accessed on 5 Jan 2026.
(이 논의의 핵심 주제에 대한 생각을 담은 소고. 자신의 생각이 잡히기 이전에 읽는 것을 권장하지 않음) https://stevenoh0908.pe.kr/blog/chalkboard/《인간실격》과-실존적-지탱에-대한-소고.
부록 I. 김춘미, 《인간실격 · 직소: 작품 해설》
이하에는 우리 책의 역자인 김춘미 교수가 쓴 작품 해설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생애와 관련된 관련 부분만을 뽑아 재구성해 옮깁니다. 역자의 서술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세계를 전근대 일본 사회의 상황과 일본인의 기본 정서 · 심리와 연계지은 해석을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임은 스스로의 실존주의적 내면을 들여다보는 창으로서 다자이 오사무를 살펴보고 있으므로, 아래의 글에서는 활동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역자의 해석과 인용은 의도적으로 삭제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원문이 다루지 않고 있는 다자이 오사무의 유년기나 가치관 등과 관련한 내용들을 관련 문헌들에서 보충하였음도 밝혀 둡니다. 기독교와 전후 일본 사회에서 다자이 오사무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에 대한 역자의 견해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래 글의 전문에 해당하는 우리 책의 197-230쪽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부록 II. 커피사유, 《『인간실격』과 실존적 지탱에 대한 소고》
이하에는 금월의 독서 모임을 설계하는데 중심이 된 제 소고를 옮깁니다. 글에는 ‘죄(罪)’와 ‘죄의 반의어’에 대한 제 생각은 물론, 인간실격에 대한 제 실존주의적 해석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부록 II는 금월의 모임 중에는 읽지 마시고, 모임을 모두 마친 뒤에 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신 경우에만 읽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죄의식을 통한 마조히즘에 대한 실존주의의 견해들
- 지그문트 프로이트: 마조히즘은 자아 내부에 있던 성적 욕망이 아버지로 대표되는 초자아의 억압 · 금지에 부딪혀 충족되지 못하고 주체 내부로 돌아와 자아를 공격함으로써 발생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죄의식 · 양심의 가책은 외부로 표출되지 못한 인간 특유의 힘에의 의지가 방향이 전환되어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현상이다. 즉, 자아 내부의 욕망이 외부의 억압에 부딪혀 주체 내부로 돌아와 공격하는, 일종의 사디즘의 방향 전환이 죄의식과 그에 동반되는 마조히즘이다.
- 질 들뢰즈: 마조히즘은 사디즘의 방향 전환, 즉 자아가 초자아에게 당하는 침략 혹은 억압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가 초자아에게 항거하는 반항의 일환으로, 자아가 초자아를 놀리고 무력화시키는 작업이야말로 마조히즘이다.
- 장 폴 사르트르: 마조히즘은 주체가 자신이 승인받기 위해 타자의 욕망 대상으로 주체 스스로를 사물화(객관화)시키는 작업이다. 즉, 주체가 타자와의 관계를 정립함에 있어 주체가 타자에 의해 스스로를 사물로써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다. (스스로를 핍박하거나 공격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나 자신이 아닌 것으로 먼저 격하되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라!)
죄(罪)란 무엇인가?
- 기독교의 입장: 인간은 처음부터 가장 선조인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야훼의 뜻을 정면으로 위반하였고, 따라서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으로 이어진 태초의 원죄(原罪)를 가진다. 즉,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이다. 인간은 아담과 이브의 설화처럼 소위 악(惡)의 유혹에 손쉽게 넘어가 죄를 손쉽게 짓고 산다. 이 죄는 유한자이자 필멸자인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완벽히 끊어낼 수 없으며, 또한 인간의 양심만으로는 죄의 여부에 대해 완벽한 판단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벗어날 수 없는 죄와 그 속의 인간의 긴장 관계는 오직 신의 은혜 · 자비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신과 그의 은총에 대한 굳건한 믿음에 서서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여야 한다. 자신의 양심에 따라 불신자들이 행동하는 경우도 그 양심은 불완전하며, 유일한 준거 기준이자 선 자체인 야훼에 대한 오만한 도전이므로 죄가 된다.
- 프리드리히 니체의 입장: 우선 죄의식은 기본적으로 부채 의식이다. 고대 역사를 살펴보면 원초의 경우 지배-피지배자의 관계 혹은 채권-채무자의 관계에서 채무자에 대해서 채권자는 그의 신체나 권리 · 재산의 일부에 대한 처분권을 획득했고, 채무자는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가 되었다. 기독교는 이러한 원초적 죄의식을 교묘하게 발전시킨다. 이들의 전통적인 죄에 대한 견해는 정복의 질서에서 패배한 피지배계급과 성직자계급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지배계급에 대해 꾸민 일종의 복수이자 계급 역전의 술책이기 때문이다. 상기의 죄에 관한 견해는 인간을 태초부터 상환 불가능한 부채 의식에 속박시키고, 구제불능의 죄인으로 만들어 모든 인간을 ‘신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로 격하시킨다. 지배계급을 피지배계급과 마찬가지의 지위로 끌어내리고 있으며, 성직자계급은 이 와중에 신과의 매개로 스스로를 지목함으로써 은밀한 관계의 역전을 꾀한다. 이들은 이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선하기 때문에 저항하지 않고 이렇게 고통받을 뿐이며, 지배계급의 경우 신의 질서를 모르고 오만하게 행동하므로 필연히 처벌받을 악이라는 자기기만을 행하기까지 한다.
- 지금까지의 나의 입장: 죄는 부채 의식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견해에 동의함) 그러나 인간을 괴롭게 하는 죄의식은 상환이 불가한 부채 의식이다. 상환이 가능한 부채는 상환을 통해 그 고통과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만, 상환이 처음부터 불가하게 설계되어 있는 경우는 그 구덩이에서 헤어나올 수 없고, 외부에 대한 책임 지우기가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주체는 좌절 경험의 누적으로 원인을 내부에서 찾게 된다. (외부에 대한 공격, 즉 사디즘의 실패가 방향을 전환하여 마조히즘으로 전환됨, 프리드리히 니체와 프로이트의 견해에 동의함) 그러나 인간이 가지는 상환 불가의 부채란 통상 그 자신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주체는 타자로부터 완벽하게 독립되어 있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명한다. 대체로 주체에게 부과되는 상환 불가한 부채는 외부에 의하여 강제된다. 그러나 주체는 부조리하고 자신의 아우성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세계에 소리를 치더라도 그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주체는 체념하고, 그 방향성을 외부에서 내부로 돌릴 뿐이다. 주체에게 죄의식에 대한 책임이 있다면 오직 바로 이 방향 전환에 대한, 책임이 있을 뿐이다. 즉, 주체는 체념과 그 체념을 죽음 충동으로 전환한 것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
죄(罪)의 반의어는 무엇인가?
罪。罪のアントニムは、何だろう。 (…) 罪と祈り、罪と悔い、罪と告白、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人間失格)》 中
罪と…… ああ嗚呼、みんなシノニムだ、罪の対語は何だ?
죄, 죄의 반의어는 무엇일까. (…) 죄와 기도, 죄와 회개, 죄와 고백,
죄와…… 아아, 전부 유의어야. 죄의 반의어는 대체 뭘까?
기도 · 회개 · 고백은 모두 상기의 문장대로 죄와 유의어이다. 이 셋은 죄의식의 현존을 전제한다. 자기 자신은 누군가에게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부채를 지고 있다는 인식을 전제할 때에서야 죄는 성립하며 기도와 회개, 그리고 고백이 가능하게 된다.
오사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저 유명한 소설 《죄와 벌》에서 벌(罰)이 죄의 유의어가 아닌 반의어로 제시되었을 가능성을 작중 화자 요조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죄가 있는 곳에 당연히 벌이 있어야 한다는, 공적(公的)으로는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에서처럼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일종의 수단이라는 성격에 따르는 저 인식, 사적(私的)으로는 자신이 당한 위난에 대한 복수심에 기원하는 저 징악(懲惡)의 인식은 죄와 벌을 부여하는 대상이 타자 또는 외부라는 점에서는 유의어로 분류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나 그 부여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즉 실질적 부여가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지를 보면 둘은 반의어다. 죄(罪)의 경우는 상술되었듯 외부의 억압에 의해 사디즘이 방향을 전환하여 마조히즘으로 전환됨으로써 발생하는 감각이다. 출발점은 외부에 의해 강제된 갚을 수 없는 부채에 대한 인식의 조건이겠으나, 그러한 인식에 저항하는 대신 이를 수용해버린 주체에 의해서 죄는 완성된다. 반대로 벌(罰)의 경우는 주체의 수용과 무관하게 외부에서 주어지기만 해도 곧바로 완성된다. 형벌과 개인적 복수는 그 벌의 대상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집행되며 언제나 주체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져 완성된다.
《인간실격》의 화자인 요조의 심리와 배경을 고려하여 죄(罪)/벌(罰)의 반의성을 논의해보면, 두 과정의 현시성(現時性)이 그 핵심이 된다. 자신을 구제불능의 죄인이자 실세계(實世界)에 대한 영원한 이방인으로 여기는 요조에게 죄(罪)란 당장 지금 주어져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고통 뿐만이 아니라 공포의 감정을 느낀다고도 진술한다. 공포는 죄에 의한, 갚을 수 없음에 대한 끊임없는 인식이 자신을 힐난하는 마조히즘적 기작에 의한 고통과는 분리되어야 한다. 이는 기약을 알 수 없는 어느 때에 채무자가 자신에게 닥쳐 고통을 가할 것임을, 즉 채무 상태에 따를 것으로 생각되는 벌(罰)을 인식함으로써 발생하는 감정으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지 현재에 진행되고 있는 과정으로 발생하는 고통이 아니다. 죄(罪)는 요조를 지금 진행되는 기작에 의해 고통스럽게 하지만, 벌(罰)은 요조를 나중에 진행될 기작에 의해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요조는 자신의 죄에 대한 구원을 바라기에 신에게 기도도 하며(“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회개 · 고백도 한다(“남들한테 호감을 살 줄은 알지만 남을 사랑하는 능력에는 결함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등등). 그러나 여기서 기도 · 회개 · 고백은 작품 내의 시점에 곧바로 그 죄의 파괴적 기작과 동시에 지금 일어나는 것이다. 요조가 두려워하는 벌(罰)은 현재 주어지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를 구제 불능의 죄인이라 여기기에 다가올 벌만을 두려워하며 벌벌 떨고 도피하는데 급급한 요조에게 있어서 벌은 피하고 싶은 미래의 고통이면서도 동시에 그가 갈구하는(그렇게 하여야 채무 상태가 해소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죄(罪)란 결국 벌이 주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요조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지 않던가), 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싶으면서도 현재 그가 가장 멀리 떨어진, 작품의 마지막까지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죄의 가장 반대에 있으며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된다.
즉 요조의 기도: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에 대한 나의 대답은 무저항은 죄가 아닌 잘못이라는 것이며(죄와는 달리 잘못은 청산 가능한 부채 혹은 문제이므로), 만약 그의 질문에서 주어와 목적어가 뒤바뀌어 “죄는 무저항입니까?”라는 질문이 주어진다면 무저항이 곧 죄는 아니지만, 죄를 완성하는 데 있어 무저항은 포함된다는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의 절망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 앞의 인간이 택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한 실존주의의 견해들
- 쇠렌 키에르케고르: 인간은 양극적 두 요소의 분열을 지양하고 통합적 일치를 추구하는 존재다. 그는 무한성을 탐하는 유한자이고, 가능성을 탐하는 필연에 묶인 자이며, 영원성을 탐하는 시간에 묶인 자다. 즉 인간의 정신은 무한성/유한성, 가능성/필연성, 영원성/시간성이라는 모순적 요소들을 끌어안는 존재다. 인간의 절망은 이 요소들의 통합에서 균형이 무너져 주체가 어느 하나에 몰두하여 정신에 분열이 일어난 상태다. 이러한 절망은 그 절망의 상태에서 그가 욕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우선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절망의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욕구하는 ‘반항적 절망’. ② 절망의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기를 욕구하지 않는(욕구하기를 포기하는) ‘나약한 절망’. 후자인 ‘나약한 절망’의 경우 그 절망이 무엇을 향한 절망인지에 따라 또 두 가지로 세분할 수 있다. ⓐ 전체적으로 자신이 처한 유한성과 필연성이라는 한계에 묶인 세계에 대한 절망인 ‘지상적인 것에 대한 절망’. ⓑ 유한성과 필연성이라는 한계에 묶인 스스로에게만 국한된 개별적인 절망인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유한성과 필연성에 묶였으면서도 무한성과 가능성을 탐하는 존재이므로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유한성과 필연성에 묶인 세계에 염증을 느끼는, 소위 절망하는 인간이다(절망의 보편성). 절망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① 지상적인 것에 대한 절망 → ②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 ③ 반항적 절망으로 이어진다. 즉 우선 세계의 유한성/필연성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한 뒤에, 무한성/가능성에 대한 욕망이 좌절된 경험의 원인을 이러한 세계 속에 위치한 자기 자신으로 결부시킨 뒤, 그것이 주는 고통을 이기다 못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회복하려는 강력한 추동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절망은 인간이 혼자의 힘으로 벗어나기는 어려운 조건 상태이다. 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자기와 자기 자신이 맺는 관계를 자기 자신과 신의 관계로 확대하는, ‘신을 통한 자기회복’이다. 필멸자인 자신이 아닌 영원성, 즉 신을 척도로 삼고서 자신이 신 앞에 현존한다는 것을 의식하면, 자신과 세계에 대해 갈구한 영원성과 존재 의의, 무한한 실재성을 획득함으로써 절망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다.
- 장 폴 사르트르: 인간의 의식은 자신이 처한 세계와 그 속에 위치한 사물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며 절망하는데, 이는 일종의 ‘구토(Nausée)’로 실존적 불쾌감에 해당한다. 즉 인간의 절망 내지는 실존적 절망이란 세계에 대한 의미를 바라는 자기 자신의 기대가 배신당하는 것으로 인해 발발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 세계에 대해 주어진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부터 의미를 부여할 책임이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인식의 전환에 도달할 수 있다. 즉, 구토에서부터 자유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전환에 도달하고 나면 인간은 의미가 없는 세계 인식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으로 의미를 창조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세계 위에 형식과 의미를 창조하는 실천적 행위와 현실에 대한 능동적 참여로써 절망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 있다.
- 알베르 카뮈: 인간의 절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장 폴 사르트르와 의견을 같이 한다. 즉, 인간은 의미를 바라는 자기 자신의 욕망이 침묵을 지키는 세계에서 좌절됨에 따라 절망하며, 이 합리를 지향하는 인간 대 불합리하고 침묵하는 세계의 이항 구도가 부조리다. 주체는 이 부조리의 두 항 중 어느 하나를 폐기하거나 모두를 폐기하지 않는 총 세 가지의 방법을 택할 수 있다. 우선 ‘인간’이라는 좌항을 폐기함으로써 문제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 이것이 ‘육체적 자살’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침묵하는 세계’라는 항을 제거함으로써 문제로부터 도피할 수도 있다. 이는 키에르케고르가 답으로 제시한 ‘신’ 또는 사르트르가 제시한 ‘자유’ 혹은 ‘의미 창조’가 해당한다. 사르트르가 제시한 의미의 창조는 유지되어야 할 긴장 상태인 부조리를 해소해버리는 것이다. 바람직한 태도는 부조리를 유지하면서 ‘그 속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세계를 정당화하지 않고, 결론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질문을 질문인 채로 남겨두는 것. 세계의 있는 그대로를 폐기하거나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기꺼이 살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 반항, 그러나 의미를 창조하지 않는 반항을 인간은 택할 수 있다.
- 지금까지의 나의 입장: 사르트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접했기에 카뮈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오해하고 있었으나, 개인적 입장은 사르트르의 입장에 조금 더 가깝다. 주체의 절망은 설명과 합리, 즉 자신의 세계 안으로 끌어들여 친숙하게 만들고 싶은 타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배반하고 낯선 것으로 남아 있으려 해서, 즉 침묵을 지키기에 발생한다. 의지할 수 있는 타자를 구성하는 것은 카뮈가 지적하였듯 자기기만이자 비약이다. 주어진 부조리 속에서 있는 그대로 서 있는 것이 중요하므로 신이나 외부 형이상학 · 도덕률에 의존하는 것은 도피이지 직시가 아니다. 그러나 텅 빈 캔버스를 보는 인간은 그 캔버스가 비어있다는 사실로부터 그 안에 무엇이든지 스스로 그려낼 수 있다는 자각에 도달하게 된다(사르트르). 무너진 폐허 위에서 그는 의욕할 수 있음을, 오히려 자신을 억눌러오던 모든 것들의 기만성과 공허함을 인식함으로부터 오는 특유의 자유 내지는 힘에의 의지를 느끼고 그것의 충만함에 따라 행동할 열정을 느낀다(니체). 이 열정에 따르는 것은 부조리의 해결이 아니다. 의미의 직조와 창조 과정에서 주체는 자신의 입법/가치 부과에 저항하는 타자를 만나고 그 의미의 부여가 실패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의미의 부여라는 과정을 통해 역으로 주체는 세계의 무의미함과 잔인할 정도의 침묵을 매 순간 인식하게 된다. 도피는 그가 창조를 멈추고 어제의 자신의 저작으로 도피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것이지, 바위를 밀어올리는 저 시지프스의 위대한 노동의 순간 즉 부조리한 바위와 경사, 그리고 그의 운명과의 대결이 펼쳐지는 저 순간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미를 생산하는 행위는 세계에 대한 정당화 작업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언제나 정당화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카뮈의 제안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그가 제시한 의미를 부과하지 않는 묘사하는 예술의 경우라 하더라도 이미 기의에 묶인 기표들의 묶음을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의미에 어느 정도 결속되어 있으므로 불가능하다. 오히려 카뮈가 제시하는 ‘희망 없는 인간’은 그것이 ‘반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는 하였으나 스스로가 부조리의 이항 구도 중 하나를 구성함에도 불구하고 그 구도에서 분리된 인식을 전제하므로 형이상학적 분리를 선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허무주의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니체의 말세인에 가장 가깝다. 진실한 반항은 그 부조리의 이항 구도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며, 계속해서 패배하게 될 여정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을, 저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구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이 곡은 어느 게임의 서사에서 테마곡으로 사용되었다. 테마곡이 삽입된 이야기장은 허먼 멜빌의 《모비 딕(Moby-Dick)》을 모티브로 삼는데, 이 소설은 단순히 대자연과 인간의 대결을 그린 것이라고 일갈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명작이다.
- 2문제가 되는 게임의 서사를 고려하면 여기서 인어(Mermaid)는 《모비 딕》의 화자 이스마엘(Ishmael)로 볼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이스마엘은 서자로, 오랫동안 아버지와 본처 사이에 자식이 없자 들인 첩으로부터 태어났다. 추후 본처가 출산하자 그녀는 자신의 아들의 자리가 이스마엘에 의해 위협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스마엘과 그의 친모를 사막으로 추방했는데, 이 성경적 맥락 덕분에 서양 문화권에서 이스마엘은 추방자(환영받지 못하는 사람, Persona Non Grata)로 이해된다. 《모비 딕》에서의 이스마엘은 경험 있는 뱃사람이긴 하지만 포경에 관해서는 초짜인 인물로, 거대한 흰 고래 ‘모비 딕’을 쫓는 포경선 피쿼드 호에 타 그 최후까지 모두 함께하는 인물이다.
- 3모티브가 되는 소설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여기서의 심장(heart)란 결국 모비 딕, 거대한 고래의 심장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상상하게 되는 것이란 모비 딕, 그 거대한 고래를 숨기고 있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넓고 깊은 바다로 돌진하는 피쿼드 호다.
- 4‘Aft’는 배 또는 항공기의 후미를 뜻하는 부분으로, 이 음악의 모티브가 《모비 딕》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배의 후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피쿼드 호와 같은 전통적인 범선에는 후미에 배가 어디로 나아갈지 결정하는 조타석이 설치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무언가를 뒤로 하고 나아가려면 결국 키를 잡을 수밖에 없지 않던가.
- 5‘Snapped’는 어떤 대상이 툭 소리를 내며 부러지거나 끊어진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비유적으로 참다가 결국 한계에 도달해 감정적으로 폭발해버린 상태를 이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부러진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바로 다음 행을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해본다.
- 6나침반은 전통적인 항해술에서 배의 현재 위치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파악해,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고 어떤 대처를 취해야 할지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온 도구다. 그런 나침반이 하나뿐인데, 깊고 끝없는 바다 속으로 떨어져 아주 깊숙하게 가라앉는다고 생각해보라. 나침반이 문학에서 전통적으로 방향 · 판단 준거 · 도덕을 의미해왔다는 역사까지 고려한다면 여기서 우리가 들여다보게 되는 깊이는 나침반이 가라앉는 저 바다만큼이나 까마득하다.
- 7바다는 모비 딕,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피쿼드 호, 그리고 그 피쿼드 호에 탄 이스마엘과 선장 에이해브(Ahab)가 모두 있는 장소다. 너무나도 넓어서 어디에 고래가 있는지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기 어려운 광활한 공간이기도 하다. 나는 피쿼드 호 후미에서 목격하는 망망대해를 상상해본다. 잔잔한 바다여도 좋고, 거친 바다여도 좋을 것이다. 주목하고 싶은 감정은 눈 앞의 그 광경을 계속 바라볼 때 스스로를 엄습하기 시작하는 압도감 내지는 두려움이다.
- 8여기서 관계의 양 당사자인 ‘you’와 ‘me’에 각각 대응시킬 수 있는 《모비 딕》의 요소는 다양하다. 만약 이 곡의 화자를 이스마엘로 본다면 ‘you’에는 바다, 모비 딕, 또는 게임의 서사까지 고려한다면 거대한 모비 딕을 자신의 손으로 기필코 죽이고자 하는 인물인 선장 에이해브까지 대응시켜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셋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 결국 한 사람에게 있어 타인은 언제나 광대한 바다이기도 하고, 모비 딕이기도 하며, 선장 에이해브 또는 그의 광기이기도 하니까.
- 9나는 여기서의 ‘피(Blood)’가 누구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일지 생각해보고 싶다. 가장 쉽게는 모비 딕을 작살로 찌를 때의 피라고 볼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입은 자신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그 두 피는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 10보통 악(evils)을 우리는 보편적인 무엇 혹은 가치적 척도에 따라 판정된 부정적인 현상 · 행위 내지는 이를 행한 주체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여기서는 그 보편성이 ‘Your’라는 소유격에 의해 부정되고 악이 주관적으로 정의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11“When it snapped”부터 여기까지는 모두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다른 모든 부분들은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 대목은 이미 “Leaving behind”된 시점에 대한 회상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 12이 시점에서 이미 ‘나’는 나침반을 잃어버린 상태라는 점을 생각해보라. 이 현 시제의 명령문은 ‘나’가 그 상태에서도 다시 한 번 키를 잡고 피쿼드 호를 전진시키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모비 딕》의 마지막 장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벌어지는 거대한 고래와 피쿼드 호의 사투도 겹쳐진다.
- 13이 문장은 중의적이다. 호기심이 잃어버린 나침반의 역할을 대신하는 길라잡이가 되었다고 해석될 수도 있고, 동시에 화자가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간 자신의 나침반에 이끌리고 있다는 고백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음악 자체로 보기에 자연스러운 해석은 전자지만, 나는 후자의 해석을 선택하고자 한다.
- 14밧줄은 연결을 묘사하는 상징물로 널리 활용되어 왔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떠올릴 수 있는 문장은 앞쪽의 “I cursed this relationship between you and me”다. 마침 정확히 “you and me”가 겹치기까지 한다. 앞서 나는 만약 ‘me’가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 이스마엘을 가리킨다고 한다면, ‘you’는 바다 · 고래 모비 딕 · 선장 에이해브 중 하나이거나 어쩌면 그 모두일 수도 있다고 쓴 바 있다. 이는 《모비 딕》의 절정과 함께 곱씹어볼 만한데, 최후의 사투에서 선장 에이해브는 모비 딕에게 찔러넣은 작살의 밧줄에 목이 휘감겨 끌려가 그대로 바다로 떨어져 죽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정확히 바다 · 모비 딕 · 에이해브는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 장면은 또 하나의 해석 상 문제를 야기하는데, ‘me’에 대응된다고 보는 인물 이스마엘은 밧줄에 묶이거나 끌려가는 장면이 없기 때문이다. 원작 《모비 딕》에서 그는 밧줄에 휘감겨 탈출을 위해 버둥거리지 않는다. 그는 그저 최후의 생존자이자 서술의 양심으로 그려질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밧줄’은 연결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면서도, 모비 딕을 앞에 둔 ‘me’와 ‘you’가 보이는 상이한 현재를 암시하는 효과를 가지게 된다. 피쿼드 호라는 하나의 운명으로 엮였던 두 인물 중 하나는 밧줄에 휘감겨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지만, 다른 한 명은 ‘실제로 묶인 적 없었던’ 밧줄을 뚫어내고 있다. 나는 이 대조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 15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일차적으로는 밧줄이다. 그러나 밧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모비 딕》에서 이스마엘은 밧줄에 휘감기지 않았기에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가지 않고 살아남아 다시 태양을 본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16에필로그. “극은 끝났다. 하지만 왜 여기에서 더 나아가야 할까? 그야 여기서 살아남은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The drama’s done. Why then here does any one step forth? ― Because one did survive the wreck).” 지금까지 고려한 것은 주로 이 음악과 원작이 상징계에서 어떻게 얽혀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이들을 기반으로 음악과 이 아래로 이어질 글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지 암시하는 일만이 남았다. 네 번의 조수를 넘어 도달한 여기에서 나는 다자이 오사무를 선장 에이해브라 부른다. 이 대응 위에서 우리는 《모비 딕》의 그 유명한 첫 문장으로 되돌아가자. 왜냐하면 그 문장은 이러하니까: “Call me Ishma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