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34.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III

탐서일지 #34.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III

2026-02-25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이러한 현상이 처음부터 추악하고 고통스럽다고 해서 그것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저 폭력적 예술가들과 조직자들에게서 웅대한 방식으로 작용하고 국가를 건설하는 것과 동일한 능동적인 힘이 여기에서는 내면적으로 더욱 작고 옹졸한 방식으로, 그리고 방향을 뒤로 돌려 ― 괴테의 표현을 빌리자면 ― “가슴의 미궁(das Labyrinth der Brust)” 속에서 양심의 가책을 만들어내고 부정적인 이상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 힘이 바로 자유의 본능(나의 언어로 말하자면 힘에의 의지)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조형적이고 폭압적인 성질을 지닌 이 힘이 작용하는 소재가 인간 자신일 따름이고, 인간의 동물적인 오래된 자기의 전체일 뿐이다. 저 웅대하고 더 명백한 저 현상에서처럼 다른 인간, 다른 인간들이 아닌 것이다. 이 은밀한 자기 학대, 이러한 예술가적인 잔인성, 자기라는 이 둔중하고 반항적이며 고통스러워하는 소재에 하나의 형식을 부여하여, 그것에 의지, 비판, 모순, 경멸, 부정을 새겨 넣는 이 쾌감, 자신을 괴롭히면서 느끼는 쾌감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분열시키는 영혼이 행하는 이 섬뜩하고 무서울 정도로 쾌락에 넘치는 일, 결국에는 이러한 능동적인 ‘양심의 가책’ 전체야말로 ― 아마도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 이상적이고 공상적인 사건들의 진정한 모태로서 수많은 신기한 아름다움과 긍정을 출현하게 한 것이며, 아마도 아름다움 자체를 처음으로 출현하게 한 것이기도 하다. 만일 모순된 것이 애초에 스스로를 의식하지 못했다면, 만일 추악한 것이 애초에 스스로에게 ‘나는 추악하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아름다움’이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적어도 이런 정도의 힌트를 얻은 뒤에는 사심 없음(Selbstlosigkeit), 자기 부정, 자기희생과 같은 모순된 개념들에서 어느 정도로 이상과 아름다움이 암시될 수 있는가라는 수수께끼도 그다지 풀기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다음 한 가지 사실도, 즉 사심 없는 자,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자,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자가 느끼는 쾌감은 처음부터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도 곧바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러한 쾌감은 잔인성의 일종이다.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내가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도덕적 가치로서의 ‘비이기적인 것’의 기원 및 이러한 가치가 자라나게 된 토양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서는 다음의 사실을 지적하는 것 정도로 그치겠다. 양심의 가책이야말로, 즉 자신을 학대하려는 의지야말로 비이기적인 것이라는 가치를 위한 전제가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박찬국 역, 아카넷, 2021. pp. 149-151.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60.

I. 읽은 범위에서 알 수 있는 화자 요조의 특징 · 성격과 그렇게 생각한 이유

읽은 범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요조의 모습은 지난 회차와 동일하다. 다시 한 번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이유의 경우 지난 번 독서 노트에도 충분히 기술하였지만, 이번 독서 노트의 ‘인상 깊은 부분’에 대한 서술에서도 충분히 드러나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 세계 · 타자의 위선적 · 이중적 모습에 대해 염증을 느끼면서도, 그 세계에 섞여들어가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공격하고 있음.
  • 그런데 자신을 향하는 이 공격을 해소하기보다는, 형태를 바꾸거나 고통의 원천을 자신 앞에 반복적으로 세우는 보다 은밀한 형태로 지속하고 있으며 그 계속으로부터 만족감을 느낌. (마조히스트적 행위를 지속함)
  • 세계와 자신 사이의 괴리감을 자신의 정체성 강화에 역이용하고 있으며, 이 유리감을 자신의 존재의 준거로 삼고 겉으로는 자신을 낮추고 매도하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상승을 기도하고 있음.

II. 요조에게 있어서 죄의 의미와 그렇게 생각한 이유

요조에게 있어서 ‘죄(罪)’란 ‘상환 불가능한/해소 불가능한 부채’다. 그 이유는 이하의 ‘인상 깊은 부분’에 단계적으로 충분히 서술해두었다고 생각한다.


III. 인상 깊었던 부분 · 문장들과 그 이유

III.1. 죄(罪)의 반의어들

“죄, 죄의 반의어는 뭘까. 이건 어렵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법이지.”

호리키가 태연히 그렇게 대답하기에 저는 호리키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가까운 빌딩에서 명멸하는 네온사인의 붉은빛을 받아 호리키의 얼굴은 무서운 형사처럼 위엄 있어 보였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져서 소리쳤습니다.

“자네! 죄라는 건 그런 게 아니야.”

죄의 반의어가 법이라니!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정도로 안이하게 생각하며 시치미를 떼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형사가 없는 곳에 죄가 꿈틀거린다지.

“그럼 뭔데? 신이야? 자네한테는 어딘지 목사 같은 구석이 있어. 기분 나쁘게.”

“자, 자, 그렇게 쉽게 처리하지 말자고. 둘이서 좀 더 생각해 보자. 그렇지만 이건 재미있는 테마 아닌가? 이 테마 하나에 대한 대답만으로도 그 사람의 전부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설마. ……죄의 반의어는 선이지. 선량한 시민. 즉 나 같은 것이지.”

“농담은 그만두자고. 선은 악의 반의어지 죄의 반의어는 아니야.”

“악과 죄는 다른가?”

“다르다고 생각해. 선악의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아. 인간이 멋대로 만들어 낸 도덕이라는 것을 말로 표현한 거지.”

“말이 많군, 그렇다면 역시 신이겠지. 신, 신. 뭐든지 신으로 해 두면 틀림없어. 아아, 배가 고픈데.”

“지금 아래층에서 요시코가 잠두콩을 삶고 있어.”

“저런, 고마워라. 내가 좋아하는 거야.”

저는 양손을 머리 뒤에 베고 벌렁 누웠습니다.

“자네는 죄라는 것에 전혀 흥미가 없는 것 같군.”

“그야 그렇지. 너 같은 죄인이 아니니까. 나는 난봉은 즐겨도 여자를 죽게 하거나 여자한테서 돈을 우려내거나 하지는 않거든.”

죽인 게 아니야, 우려낸 게 아니야 하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희미한, 그러나 필사적인 항변의 소리가 끓어올랐습니다. 그러나 아니, 내가 나쁜 거라고 금방 다시 고쳐 생각해 버리는 이 버릇.

저는 아무리 해도 정면으로 맞서서 당당하게 토론을 하질 못합니다. 소주의 음침한 취기 때문에 시시각각 마음이 험악해지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그렇지만 감옥에 가는 일만이 죄는 아니야. 죄의 반의어를 알면 죄의 실체도 파악될 것 같은데. ……신, ……구원, ……사랑, ……빛, ……그러나 하느님한테는 사탄이라는 반의어가 있고, 구원의 반의어는 고뇌일 테고, 사랑에는 증오, 빛에는 어둠이라는 반의어가 있고, 선에는 악, 죄와 기도, 죄와 회개, 죄와 고백, 죄와…… 아아, 전부 유의어야. 죄의 반의어는 대체 뭘까?”

“죄의 반의어는 꿀이지. 꿀처럼 달콤하거든. 아아, 배고파. 아무거나 먹을 것 좀 갖고 와.”

“자네가 갖고 오면 될 것 아니야!”

거의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할 만큼 격렬한 노여움의 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그래? 그럼 아래층에 가서 요시코 씨하고 둘이 죄를 저지르고 오겠어. 토론보다도 실제 답사. 죄의 반의어는 꿀에 절인 콩. 아니, 삶은 콩이던가?”

저는 거의 혀가 잘 돌아가지 않을 만큼 취해 있었습니다.

“맘대로 해. 아무 데건 가 버려!”

“죄와 공복(空腹), 공복과 콩. 나이, 이건 유의어인가?”

호리키는 돼먹지도 않은 소리를 하면서 일어났습니다.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언뜻 이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옙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亂麻)의 그 밑바닥……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인간실격(人間失格)》,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p. 136-140.
  • 요조와 호리키의 문답 중 반의어 알아맞추기는 대단히 중요하다. 자신이 품고 있는 죄의식을 규명하기 위해 반의어를 검토함으로써 ‘죄’의 정체를 규명하려는 요조에게 있어 그가 반의어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을 통해 그가 ‘죄’에 대해서 어떤 인식 내지는 무의식적 동인(動因)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요조가 ‘돼먹지도 않은 소리’로 제시한 반의어들의 목록을 열거해보자: 법, 선, 신, 꿀, 콩, 공복. 엄밀하게 이야기해서는 처음 셋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뒤쪽의 세 가지는 일본어의 발음을 이용한 말장난의 결과이기에 논의에서 제외해야 할 것만 같지만, 이들 모두가 다자이 오사무가 쓴 문장 가운데 있으므로 검토할 가치는 충분하다.
  • 우선 앞쪽 세 개념부터 요조가 이들은 죄(罪)의 반의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이유를 다시 되짚어보는 것으로 시작하자. ① 법(法). 요조는 이를 반의어로 제시한 호리키를 비웃으면서 “형사가 없는 곳에 죄가 꿈틀거린다지.”라고 중얼거린다. 형사는 경찰력에 속하는 사람으로, 범죄의 발생을 억제하는 국가 공권력을 구성한다. 억지력이 없을 때 ‘죄가 꿈틀거린다’는 말은 얼핏 보기에 죄의 억제자로서의 법의 성격을 강조하여 그것을 죄의 반대로 놓는 것처럼 보이지만 요조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그는 왜 법이 죄의 반의어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일까? 논의의 진전을 위해서는 ‘반의어’에 대한 요조의 다음과 같은 규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꽃의 반의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언한 바 있다: “꽃의 반의어는 말이야…… 이 세상에서 가장 꽃 같지 않은 것, 그것을 들어야지.”1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인간실격(人間失格)》,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35. 반추하건대 ‘반의어’를 ‘가장 그것 같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는 요조가 법이 죄의 반의어가 아니라고 단언했다면, 그것은 곧 ‘법이 가장 죄와 같지 않은 것이다’는 명제의 부정을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법은 왜 죄와 가장 같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이는 요조가 생각하는 죄가 법과 배타적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법은 죄를 규명하고 처벌하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서, 죄가 없다면 법은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다. 그런데 역의 관계는 제대로 성립하지 않는다. 법이 죄를 규명하기 때문에, 법이 없다면 죄 역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은 각론에 이르러 “살인을 저질렀을 때 이것을 불법으로 규정한 법문이 없다면 이것은 죄가 아닌가?”는 물음을 마주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부정된다. 죄는 법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이는 죄와 법이 상극적 ·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법의 여집합에서 벗어나는 ‘죄의 영역’이 존재하는 증거인 것이다.
  • 다음 요소인 ② 선(善)의 경우에 대해서는 요조가 그 이유를 보다 명백히 기술하고 있다. 그는 “선은 악의 반의어지 죄의 반의어가 아니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판정한 이유를 “선악의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아.”로 부언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요조가 선을 죄의 반의어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선악과 달리 죄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기 때문임을 파악할 수 있다. 즉 요조는 죄에 대한 임의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 개념을 시간에 따라 변동하는 것이 아닌 항구적이고 초월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악한 행위의 경우는 사회가 정한 도덕률을 위반하는 것에 붙은 말이지만, 죄의 경우는 사회의 도덕률과는 별개로 자신의 영역을 규정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 ③ 신(神)의 경우는 호리키가 제시한 반의어지만 조금 더 복잡한데, 왜냐하면 호리키뿐만 아니라 요조 자신도 죄에 대한 반의어의 후보로서 구원, 사랑, 빛과 함께 떠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반의어로서 이들이 부적격인 이유는 선(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는 “하느님한테는 사탄이라는 반의어가 있고, 구원의 반의어는 고뇌일 테고, 사랑에는 증오, 빛에는 어둠이라는 반의어가 있고”라 말하고 있다. 신의 경우는 인격체이므로 그 반의어 역시 인격체라는 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유로 배격되고 있으며, 빛의 경우는 명백한 반의어인 어둠이 있으므로 죄의 반의어가 될 수 없다고 진술된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제시된 다른 후보들: 즉 구원과 사랑, 그리고 뒤쪽의 서술에서 추가로 제시되기까지 하는 회개, 고백의 총 4개의 개념은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통상의 그리스도교에서 이들은 죄(罪)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방식으로서 죄의 무거움으로부터 개인을 해방하는 어떠한 절차 내지는 의식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이들의 등장은 죄를 없애는 것과 동치이므로 죄의 반의어로 분류될 성격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조는 여전히 이들을 죄의 반의어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대단히 흥미롭게도 말이다.
  • 왜 요조는 죄에 대한 반의어로서 구원 · 사랑 · 회개 · 고백과 같은 ‘해소적 행위’들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가? 내 생각으로는 그가 이러한 ‘해소적 행위’들을 통한 ‘죄의 해소’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제시된 4가지 단어란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행위 혹은 행위에 의해 달성된 상태를 지시하는 개념이다. 이 행위들을 통해 만약 죄가 없어진다면 죄와 이 4가지 개념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상극에 있는 반의어로 인정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대우 명제에 따라 이 4가지 개념이 죄의 반의어가 아니라는 것은 죄와 이 4가지 개념이 양립한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요조의 거부는 죄와 이 행위 혹은 행위에 의한 상태가 양립할 수 있다는 주장이므로 ‘죄의 해소’가 이들로서 달성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 이러한 발견은 요조가 ④ 꿀, ⑤ 콩, ⑥ 공복을 죄의 반의어로 인정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해명의 기회를, 요조가 전혀 이들에 대해서는 부언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공해준다. 단순히 말장난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꿀과 콩’은 달거나 허기를 해소해주는 무엇으로서 앞서 열거된 ‘죄의 해소적 행위’에 상응하는 상징물이라고 볼 수 있고, ‘공복’은 그로 인하여 ‘죄가 해소된 상태’에 반대되는 ‘죄와 해소되지 못한 상태’의 상응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요조는 ‘죄의 소멸’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떠한 동작을 통해서도 자신이 처한 ‘죄’의 상태는 해소될 수 없다고 보고 있는 요조에게 있어 ‘꿀과 콩’은 죄와 양립할 수 있는 무엇이므로 반의어가 아니다. ‘공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공복’의 상태 또한 그에게 있어 이미 놓여 있는 것으로 죄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이기에 역시 반의어가 아니다.
  •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 요조의 ‘죄의 반의어’에 대한 언급은 인용부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다. 요조는 이 대문호가 통상의 견해처럼 ‘벌’을 죄에 대한 유의어, 즉 죄와 동반하는 그 무엇이 아닌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즉 반의어로서 제시했을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한다. 여기서는 우선 ‘벌’과 비슷한 성격인 ‘법’에 대해서는 이미 요조가 반의어로서의 가능성을 일축해버렸다는 사실이 걸리적거린다. 그러나 앞선 고려에서 우리는 요조가 인간의 자의적인 무엇을 죄에 대한 반의어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을 ‘선’에 대한 논의를 통해 파악한 바 있다. ‘법’ 역시 요조에게 있어서는 인간세(人間世)의 자의적인 무엇으로 지각되었다고 본다면, ‘벌’과 ‘법’에 대한 요조의 분리적 사고가 이해될 단초가 마련된다. 요조가 여기서 고려하는 ‘벌’이란 법적 형벌과는 무관한 무엇, 즉 법적 형벌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이 주어지지는 않는, 자신의 ‘죄’와 양립할 수 없으며 가장 잘 어울리지 않는 무엇으로서 인간 사회를 초월한 것임을 합리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III.2. 동양의 에뤽크시톤(Erysichthon)

2에뤽크시톤(Erysichthon)은 그리스 ·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데메테르 여신의 분노를 사 자신의 딸을 노예로 파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몸까지 먹어치운 비극적 인물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라 테살리아의 왕 · 지주 · 부호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부유층 출신이었던 그는 농경의 여신인 데메테르에게 바쳐진 거대한 숲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신목(神木)을 베어버리는 불경을 저질렀고, 분노한 데메테르가 배고픔의 여신인 리모스에게 청하여 그에게 영원한 배고픔의 저주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배고픔을 견딜 수 없었던 에뤽크시톤은 자신의 모든 자산은 물론 딸까지 팔아가면서 끊임없이 음식을 먹었으나 허기가 가시지 않자, 결국 사지 말단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전신을 뜯어먹고는 치아만 남게 되었다.

여기는 어디의 샛길이지?

여기는 어디의 샛길이야?

멀리서 어린 소녀의 서글픈 노랫소리가 환청처럼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불행. 이 세상에는 갖가지 불행한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불행은 소위 세상이라는 것에 당당히 항의할 수 있는 불행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 줍니다. 그러나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 없었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얘기를 하려면 넙치가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 전부가 뻔뻔스럽게 잘도 이런 말을 하는군 하고 어이없어할 것이 뻔했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말하는 ‘방자한 놈’인 건지 아니면 반대로 마음이 너무 약한 놈인 건지 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죄악 덩어리인 듯, 끝도 없이 점점 더 불행해지기만 할 뿐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없었던 것입니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인간실격(人間失格)》,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p. 150-151.
  • 영원한 배고픔에 시달려 자기 자신마저 모조리 뜯어먹은 에뤽크시톤과 요조 사이에는 기묘한 동형성이 존재한다. 이는 앞선 ‘III.1. 죄(罪)의 반의어들’에 대한 분석에서 꿀 · 콩 · 공복이 죄의 반의어로 인정되지 않은 점에 어느 정도 뿌리를 둔다고 볼 수 있다.
  • 선행 분석에서 요조가 생각하는 ‘죄’에 대해 확인할 수 있었던 중요한 결론은 그가 죄를 ‘결코 해소할 수 없는 무엇’으로 본다는 것이었다. 상기의 ‘길 잃은’ 서술은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이라고 할 만하다. 요조는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 없었고”라고 쓴다. 불행에 대해 항의한다는 것은 그 불행이 자신으로부터 기원하지 않았다는 인식을 전제할 때에 가능하다. 불행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 요조의 이 같은 진술은 자신에게 닥치는 사회적 · 신체적 상태의 불행이 자신으로부터 기원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하다. 독자의 입장에서 요조의 이러한 심리적 상태는 부분적으로는 예민한 심성에 의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유년기에 관한 서술로부터 알 수 있듯이 권위주의적이었던 가정 환경과 하인들로부터 겁탈당한 경험과 같은 성장 배경도 요조의 심리적 불안 요인에서 충분한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요조는 이들을 적어도 어느 정도는 충분히 탓할 수 있음에도 탓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 요조는 자신으로부터 ‘불행을 표할 자격’을 제거해버리고 있다. 이 행위는 자신에게 현존하는 고통 앞에서 스스로는 그 어떠한 신음 소리도 내지 않고 묵묵히 견뎌야 한다고 말하는 자기 암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서술이 가지는 이중성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만약 요조가 정말로 자신의 ‘불행’을 온전히 견디는 것이 마땅하다는 점에 동의했다고 한다면 그는 이러한 서술 자체를 할 수 없어야 했다. 서술 자체가 이미 자신이 ‘불행한 것’에 대한 문제 의식 내지는 그 고통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가 ‘불행을 표하면 안 되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 전부가 뻔뻔스럽게 잘도 이런 말을 하는군 하고 어이없어 할 것이 뻔했습니다”라는 말까지 쓰면서 이어가는 자기 독백을 단순한 자책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요조가 자신의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적극적 시도다. 이러한 시도 자체는 고통에 직면하면 자연히 비명을 지르는 인간의 본성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러나 상당한 문제는 그가 이러한 정당화를 위해 자신을 고통을 느껴야만 하는 존재로 격하시킨다는 것에 있다. 그는 우선 자신의 불행, 감각적인 불만족의 상태를 타인의 것과 일차적으로 분리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이 분리된 상태를 자신이 이미 ‘해소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 자신의 ‘죄’와 연계짓는다. 이는 불행에 대한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불행의 ‘부조리함’3여기서 사용되는 〈부조리〉는 전적으로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서 사용된 의미와 동일하다.을 제거해버리지만 그 대가로 요조는 ‘구제불능의 죄인’으로 추락한다.
  • 이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요조의 의지가 병적인 형태로 발현한 것으로 보인다. 요조는 고통을 거부하고 싶지만 거부할 수 없다. 이 시점에서 그는 각혈을 시작했고, 변변찮은 직업도 없으며 고향 가족으로부터는 절연 협박까지 당했다. 요조의 생각과는 달리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엄밀하게 따져보면 요조 자신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음이 명백하다. 물론 그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나쁜 건강 상태는 그 자신이 약물을 오남용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오남용에 이른 구체적인 경위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의 상태가 여기에 이른 과정에 대해서는 그가 보낸 유년기 그리고 그의 상태를 알아보지 못한 주변인들의 책임이 상당하다. 화가라는 꿈을 짓밟으면서 먼 학교로 보낸 아버지와 가족들은 요조의 무직 상태와 방황에 대해 책임이 있음에도 카페 여급과 동반 자살을 기도했다는 것을 결정적 계기로 삼아 의절을 통보하고 다시 그가 ‘바른 길’ 즉 학교로 돌아오는 것을 은밀히 유도하지 않았던가. 가족들과 요조의 주변인들은 그의 상태에 대해 주목한 적이 있긴 했었나? 나는 그들은 요조가 작품 중에서 만난 수많은 여성들보다도 훨씬 그의 내면이나 인물됨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 이미 경제적 · 사회적인 조건은 물론이거니와 심적으로도 상당히 지쳐버린 요조에게 있어 외부로서의 저항은 이 시점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지각되고 있다. 이미 요조는 ‘몰래 그림 그리기’, ‘공산주의 조직과 함께하기’, ‘학교에 가지 않고 호리키와 놀러다니기’와 같은 활동을 통해 가족과 기성 사회가 자신에게 강요한 어떤 질서에 대해 충분히 반항했고, 쓰네코부터 요시코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을 통해 호리키와 같이 자신을 전혀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관심조차 제대로 가지지 않는 타인들에 대해 충분히 반항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언제나 요조 나름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켰고, 나아가서는 그가 처한 환경 및 그 자신의 심적 상태의 악화로 되돌아오기만 했다.
  •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외부로의 저항 내지는 표출, 즉 자신의 상태에 대한 외부-탓하기가 무용하다는 것을 체득한 주체는 언제나 고통의 합리화의 마지막 보루로서 자신을 동원한다. 나는 요조의 경우가 정확히 여기에 해당한다고 본다. 고통이라는 ‘허기’를 너무나도 참을 수 없었던 나머지 결국은 자기 자신마저 갉아먹어버리게 된 동양의 에뤽크시톤이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III.3. 무저항에 대한 선고

이제 저는 죄인은커녕 미치광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니오, 저는 결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아아, 그렇지만 광인들은 대개 그렇게들 말한다고 합니다. 즉 이 병원에 들어온 자는 미친 자, 들어오지 않은 자는 정상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호리키의 그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미소에 저는 울었고, 판단도 저항도 잊어버렸고, 자동차를 탔고, 여기에 끌려와서 정신 이상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나가도 저의 이마에는 광인, 아니 폐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겠지요.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인간실격(人間失格)》,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60.
  •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이 독서 노트의 가장 위에도 적힌 바 있는 이 질문은 작품의 말미에 요조가 간절하게 묻는 문장이다. 독자는 이 질문의 성격을 여러 층위에서 기술할 수 있다. 가장 간단하게는 그저 요조의 ‘질문’으로 있는 그대로 간주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복잡하게는 독자가 요조에 동화되어서 이 질문 자체를 자기 자신이 신에게 묻는 무엇으로 간주하는 방안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질문이 책의 바깥에 존재하는 판단 주체인 독자 자신에게 요조가 묻는 것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 경우에 대해 우리는 요조라는 한 인물을 피고석에 두고서 그와 관련된 사건 기록들을 모조리 읽어온 한 명의 판관이 되니까 말이다. 우리에게 제기되는 질문은 요조, 그가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판정하는 형사적 물음으로 충분히 간주될 수 있다.
  • 판결을 내리기에 앞서 우리는 으레 형사 법정의 주심(主審)이 그러하듯 그의 ‘죄’ 내지는 책임의 전제가 되는 사실 관계부터 판정해야 한다. 그가 주장하는 ‘무저항’은 기술된 내용들을 토대로 어느 정도는 사실로 확인된다. 요조는 적극적으로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닥치는 불행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다른 누군가에게 제대로 책임을 돌리거나 타인 내지는 세계 자체를 제대로 저주하는 구체적 행위로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괴로워하면서도 언제나 작품 안에서 그 고통을 감내했을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요조는 소극적으로는 저항했다. 그는 타인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세계에 대해 저주를 퍼붓는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상술한 바 있듯이 ‘방황’이라고 간주되곤 활동들 즉 호리키와의 교제, 다양한 여성편력, 그림을 통해 자신에게 닥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들은 계속해왔다.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사실관계가 이러한 이상 요조의 행동들은 완벽한 ‘무저항’으로 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적극적 행동으로서의 ‘저항’이 없었다는 점에서 좁은 범위에서의 ‘무저항’으로는 인정할 수 있다.
  • 문제가 되는 사실관계에 대한 검토 다음으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이러한 ‘무저항’이 요조에게 상황에 대한 책임을 성립시키는지의 여부다. 요조에게 닥친 이러한 불행 혹은 고통의 상황은 주지한 바 있듯 그에게 온전히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인간실격자’라는 낙인을 받았다고 자조하는 상황에 그가 몰리기까지는 가정과 사회가 이미 그의 소극적 저항을 충분히 무시한 역사가 지대하게 기록했음이 빼곡하게 기록된 조서를 우리는 확인한 바 있다. 그의 고통에 대해서는 요조가 간주한 것처럼 그 자신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 그러나 ‘무저항’이 ‘죄’를 성립시키는지의 여부에 대한 판단으로 나아가는 경우는 논의가 달라져야만 한다. 앞서 살펴본 바 있듯 ‘죄’란 요조에게 있어 ‘상환 불가능한 부채’ 내지는 ‘해소될 수 없는 그 무엇’에 해당한다. 우리는 앞에서 요조는 자기 자신이 처한 불행의 화살을 이러한 ‘죄’로 모조리 연계함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비극적 서사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의 연계란 원래는 바깥을 향했던 고통에 대한 포효를 자신 안으로 돌린, 병적이고 마조히즘적인 자기-구원의 발현이다. 이 구원 아닌 구원은 요조 자신으로부터 ‘구원의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식으로 요조 자신의 고통을 합리화했고, 따라서 요조는 ‘고통’의 무의미성에 따른 고통으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그 대가로서 ‘영원한 죄인’이 되었다.
  • 따라서 문제가 되는 요조의 ‘죄’를 성립시키는데 있어 핵심적인 기여는 요조 자신이 바깥을 향한 표출을 자기 안으로 돌려버린 것, 또다른 의미에서의 ‘무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지점에서 판관인 우리에게 요청되는 저 질문: “무저항은 죄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같은 결론에 이른 논리에 의거하여 우리는 요조에 대해서는 유죄(罪)를 선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제가 되는 ‘죄’는 다시 한 번 강조해두듯 ‘해소될 수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요조의 ‘무저항의 결과물’, 자신을 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자신에 대한 파괴로 이어진 바로 이 상황은 요조 자신이 그 방향을 다시 외부로 되돌림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 ‘상환 불가능성’을 핵심적인 속성으로 두는 ‘죄’는 요조에게 있어 성립하지 않는다.
  • 우리는 요조에게 다음과 같이 주문(主文)을 선고한다. 요조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그러나 그의 ‘죄’에 대해서는 요조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여기서 책임이라 함은 그가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자신에게 온전히 연계하는 방식으로 자기 파괴를 꾀한 것에 대한 책임을 말한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인간실격(人間失格)》,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35.
  • 2
    에뤽크시톤(Erysichthon)은 그리스 ·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데메테르 여신의 분노를 사 자신의 딸을 노예로 파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몸까지 먹어치운 비극적 인물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라 테살리아의 왕 · 지주 · 부호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부유층 출신이었던 그는 농경의 여신인 데메테르에게 바쳐진 거대한 숲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신목(神木)을 베어버리는 불경을 저질렀고, 분노한 데메테르가 배고픔의 여신인 리모스에게 청하여 그에게 영원한 배고픔의 저주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배고픔을 견딜 수 없었던 에뤽크시톤은 자신의 모든 자산은 물론 딸까지 팔아가면서 끊임없이 음식을 먹었으나 허기가 가시지 않자, 결국 사지 말단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전신을 뜯어먹고는 치아만 남게 되었다.
  • 3
    여기서 사용되는 〈부조리〉는 전적으로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서 사용된 의미와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