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11.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I

탐서일지 #11.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I

2024-08-25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탐서일지》를 다시 시작하며

상당히 오랜만에 다시 한 번 이 시리즈를 이어가게 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쓴 글은 2021년 9월, 그러니까 대략 3년 전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다룬 글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말이다. 물론 원래 이 《탐서일지》 시리즈가 담당하던 도서에 대한 나의 평가 · 의견에 대한 기록이 블로그의 Books 카테고리에 모아두는 글들로 옮겨갔다는 점을 고려하면, 책을 읽고 생각하는 여정을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완전히 중단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책장을 넘겨온 지난 대학 생활 동안 나의 사상은 단순히 어떤 부분이 흥미로웠고 어떤 부분에 대한 의견은 이렇다를 기록하는 것으로 충분함을 느끼는 수준을 넘어 그것에 담긴 메시지에 대한 가치 평가를 시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도서가 나에게 어떤 연유에서 ‘좋고’ 혹은 ‘나쁜지’를 평가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서평으로 독후 활동의 중심이 이동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다시 한 번 더 서평이 아닌 이 시리즈 ― 《탐서일지》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는가? 그 이유를 소명하기 위해서 나는 스스로가 어떻게 서평을 쓰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입법자1들뢰즈는 철학자를 일찍이 ‘입법자’라고 논한 적이 있다. 법률이 서로 다른 가치 중에서 무엇을 우선할지를 정하는 것처럼, 철학자 또한 서로 다른 가치 중에서 무엇을 우선할지를 결정한다.로서 나는 스스로가 매기는 가치 평가에 대하여 나름의 자부심은 물론이거니와 이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강력한 책임감을 가진다. 이를테면 내가 “이 책은 이러이러한 가치를 가진다.”라고 선언할 때, 나는 그 선언에는 반드시 스스로의 가장 정제되고 완전한 사상적 전개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즉 나는 오로지 서평을 그 책에 대한 가장 최후의 평가로서만 쓴다. 다듬어지지 않은 군더더기,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사고들은 최종적 평가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나의 사상이 온전한 종착점, 혹은 적어도 가치 평가를 시작하기에 적절한 토양에 이르기까지 기다릴 수 없는 때가 있다. 중간 기착지로서 도달한 사상적 영역이 반드시 기록되어야 하는 가치를 획득한 때나, 혹은 순간적인 직관이 아주 탁월하거나 신선한 나머지 망각하기 전에 어딘가에 보존해두어야만 하는 때가 그런 때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서평으로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음은 자명하다. 나의 사고가 도달한 지점들을 조금씩 기록해둘 또 다른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탐서일지》 시리즈를 다시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서평 쓰기를 시작하기 이전에 쭉 행해왔던 글을 읽고 나 자신이 든 생각을 기록하는 것을 다시 이어가기 위함이다.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이전에는 도서를 모두 읽은 뒤 들었던 생각들을 모조리 정리하여 기록했다면, 이제는 도서를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간간히 정리하여 기록해두는 정차역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탐서일지를 시작하며

이 글부터 시작하여 3 ~ 4회에 걸쳐 나누어 적어두게 될 『도덕의 계보』에 대한 탐서일지는 사실 지난 3년 동안에 걸쳐 나 자신이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 전반을 어떻게든 이해하기 위하여 시도한 각종 노력의 중간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COVID-19가 한참 유행하던 시절 대학의 문을 열고 들어온 나 자신이 처음으로 서양 철학에 눈을 뜬 이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결정적인 방아쇠가 되어 읽기 시작한 니체는 지난 대학 생활 동안 우울함과 명랑함 사이를 극적으로 오간 나 자신의 정신에게 있어 상당한 동인(動因)을 제공했다. 학기말마다 찾아오는 번아웃에 맞서 나는 ‘스스로를 다시 한 번 일으키기 위하여’ 니체의 저작을 다시 한 번 읽기를 시도했고, 그 다음 학기가 도래하기 전마다 매번 니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획득했다.

최초의 ‘이해하기 힘든 철학자’, 그 다음에는 ‘극복의 철학자’, ‘솔직함의 철학자’에 이어 지금의 ‘긍정의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니체 사상은 지난 대학 생활 동안 나의 철학과 공존하면서 때로는 익숙함을, 때로는 낯섬을, 때로는 ‘망치로 내려침’을 끊임없이 제공해주었다. 니체의 어록들이 책 속에서 단순히 언어로서 맴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내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을 혁신적으로 변혁함에 따라, 이제 나는 니체에 대한 나의 어느 정도의 가치 평가가 완료되기 시작했으며 그의 사상에 대한 비평 준비가 만족스러운 수준에 도달했다는 직감에 이르렀다.

그러한 직감이 가장 높은 수준으로 고조된 것이 금월, 즉 2024년 8월 경남과학고등학교 36기 동기들과 진행하는 독서 모임에서 나 자신이 논의를 주관하는 도서로서 이 책, 프리드리히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선정한 이래 총 4회의 모임 중 3회의 모임을 완료한 지금이다. 니체에 대한 강의를 들었던 2022년 가을학기, 〈서양철학의 고전〉 강좌의 중간 그리고 기말 보고서를 썼던 때보다 나는 한층 더 니체의 정수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부분적으로는 지난 2년 동안 겪었던 인생사의 굴곡이, 부분적으로는 모임을 준비하면서 읽게 된 몇 가지 철학 논문들이 이 느낌의 원천을 구성하고 있을 것이다. 이전에 도달하지 못한 영역들을 정복하고 있다는 인식이 형성되는 지금, 바로 지금이야말로 나는 마침내 니체에 대한 부분적 〈침묵〉을 중단할 때가 왔다고 확신한다.

최종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몇 차례에 걸쳐서 『도덕의 계보』에 대한 독서 모임의 장(長)으로서의 책임을 다해 내가 니체를 다시 한 번 사유하고 해석한 결과물들을 여기에 기록해두고자 한다. 주로 많은 서술들은 내가 각 모임 세션에 해당하는 책의 범위를 읽고서 생각했던 것들을 옮기는데 할애될 것이다. 주로 나의 사상은 매 독서 모임 이전에 제출하는 것이 약속되어 있는 ‘독서 노트’에 기록되었고, 그 토양은 다른 모임 구성원에게 배부한 ‘보충 자료’를 통해 확립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주로 이 둘, ‘독서 노트’와 ‘보충 자료’의 내용이 다듬어져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먼저 진행되어야 하는 것은 이 시리즈를 읽고 있는 독자들을 위하여 니체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왜 니체를 읽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개괄을 제시하는 일이다. 이를 위한 가장 적합한 수단이란 내가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을 다루겠다고 선언하기 위해 4개월에 걸쳐 준비한 〈모임 계획서〉 일 수밖에 없다. 해당 글에서 나는 ‘철학’과 ‘철학함’에 대한 나의 이해, 그리고 니체를 바라보는 나의 전반적인 시각에 대한 견해를 아주 심혈을 기울여 피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계보』를 읽으며 내가 도달한 영역들을 밝히고자 하는 앞으로의 글들 중에서 가장 첫 번째에 해당하는 이 글에서는 이 〈모임 계획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그 이후 첫 번째 모임에서 내가 던졌던 질문들 그리고 그에 대해 대답한 기록을 담은 〈독서 노트〉를 그대로 담아두고자 한다.

이제 충분한 소명이 이루어졌다. 남은 것은 이제 독자 여러분에게 지난 3년 동안 나의 철학이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안내하는 것 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독서 모임 계획서

I. 기초 정보

II. 도서 선정의 이유

Gott is tot.
신은 죽었다.

프리드리히 니체와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어록이 하나 있습니다. “신은 죽었다”라는 바로 그 말. 니체 초심자들에게는 마치 ‘신의 존재 부정’으로 들리기에 신성모독 혹은 지극한 현대주의적 발언으로 여겨지곤 하는 말. 그러나 그 뜻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사실 니체의 전반 사상에 대한 폭 넓은 이해는 물론이거니와 서양 철학의 전반적인 역사 혹은 그 기조에 대한 시야가 어느 정도 잡혀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고대 그리스로부터 뿌리가 뻗어나오는 서양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니체 철학이 좋은 시작점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상술하였듯 니체의 말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니체 철학이 서양 철학사에서의 근대 즉 후기의 철학에 해당하는 이상 니체 이전의 서양 철학자들이 역사적으로 인간 삶의 무엇에 집중해왔으며 어떤 논제들로 어떻게 토론해왔는지를, 즉 서양 철학의 계보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철학을 계보적 ·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지루할 때가 많습니다. 너무 오래 전 이야기처럼 들리는 경우도 있고, 또 정작 우리 생활과 동떨어진 이론을 설파하는 듯한 불편함마저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사실 철학함은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제도적인 철학 교육에서 널리 이용되어온 계보적 접근 그리고 그에 수반된 암기적 교육법 때문에 철학은 어렵고 재미없다는 대중적 시각이 퍼졌다는 견해가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 모임의 구성원 대다수가 대학의 서양 철학 교양 강의를 들은 경험은 물론이고 관련된 서적에 노출된 경험도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도서를 선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니체 철학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파괴력이 서양 철학의 계보를 살펴보는 전통적 접근법보다 철학 입문자들의  흥미를 이끌어가기에 적합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니체 철학이 가진 특유의 파괴력과는 별개로, 철학 자체가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 철학함이 왜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인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들뢰즈에 이르기까지의 서양 철학의 복잡한 역사와 담론들을 왜 우리가 굳이 따라가야 하는지, 일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한 소위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을 왜 우리가 익혀야 하는지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성역 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 일상적인 것들을 다시 한 번 낯설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바쁜 우리의 일상 속에서는 막연한 개념으로만 자리잡아 생각할 기회조차 별로 없는 대상들에 대해, 철학은 대담하게도 가장 근본적이고 도발적인 질문들을 제기해온 것입니다.

개인적인 흥미로 제가 니체 철학을 읽으며 논한지 이제 약 2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난해하기로 유명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해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지만, 니체의 저작들을 하나둘씩 읽어나간 저는 ‘양심의 가책’과 같이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이 흔들리는 위험한 순간들을 겪고, 또 ‘힘에의 의지’와 같이 처음 들었을 때에는 즉각적인 거부감이 일었던 개념들이 사실은 제 편견이나 사고 깊이의 부족에서 기원한 오해였다는 점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참으로 우매한 목적에서 시작했던 여정이었지만 조금씩 ‘철학’이란 무엇인지, 철학함’이란 무엇인지라는 질문에 답변해나가는 여정으로 변모하게 된 것입니다. 이 책만으로 니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며, 또한 저 자신도 니체를 전문가 수준으로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분들에게 ‘니체 사상의 정수는 이러하다’라고 자신있게 설명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 니체 철학이 지닌 그 특성과 잠언적 성격이 우리 자신의 경험과 가치 부여들을 되짚어보는데 있어 제격이라는 점만큼은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할 때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도서를 함께 읽어나가고 토론하는 경험이 우리 자신의 ‘신’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는 일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I. 주요 내용 소개

이하의 소개 내용은 역자 박찬국 교수의 해제를 참조하여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적의, 잔인함, 박해를 가하려고 하고 습격하려고 하며 변혁하고 파괴하려는 욕망, 이 모든 것이 그러한 본능의 소유자 자신을 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니체의 후기 저작에 해당하는 『도덕의 계보』에서 중요한 개념들은 다음의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 주인과 노예의 도덕; 둘. 양심의 가책의 실체; 셋. 금욕주의적 이상의 민낯.

총 3개의 논고: I. ‘선과 악’, ‘좋음과 나쁨’; II. ‘죄’ · ‘양심의 가책’ 및 기타; III.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각각에서 니체는 이른바 대중의 ‘성역’을 과감하게 때려부숩니다.2마치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전권을 주장하면서 그 성전을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들의 성소를 때려부순 사건처럼 말입니다. (예수의 성전 정화; 요한복음 2.13-22) 즉 이 책은 니체의 저작 중에서도 그 사상의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니체가 기만적이면서 병적이라고 비판하는 대상이 다름 아닌 우리에게 ‘선’으로서 너무 익숙한 〈사랑〉, 〈양심〉, 〈동정〉과 같은 전통 기독교적 가치들이기 때문입니다.

전통 기독교적 선악에 대한 관념 그리고 관련 수반 현상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타인에게 친절하고, 도움을 주며, 그들의 아픔을 동정하는 것은 선한 것이다.’, ‘반대로 타인에게 피해 · 고통을 주거나 그들을 억압 · 착취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 자신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지기만 하는 이러한 관념들을 대담하게도 니체는 부정하고 공격합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이 관념들이 역사적으로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점, 즉 〈도덕의 계보〉입니다. 니체는 (이른 나이에 교수로 임용될 정도로 고전문헌학에 빠싹하였기 때문에) 고전문헌들에서 ‘도덕 관념’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러한 선악 관념의 배후에는 특정 세력이 이 관념을 널리 전파하여 권력을 장악하려는 음험한 동기가 있지 않은가 의심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놀라우면서도 불경한(?) 생각으로까지 들리는 그의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한다’라는 관념에 대한 정면 도전은 그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니체는 아울러 ‘금욕주의’, 즉 우리의 자연스러운 욕망 · 본능은 악한 것이므로 근절하거나 자제해야 한다고 보는 태도가 병적인 것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니체는 이러한 금욕주의가 플라톤 · 그리스도교 이래로 자신 이전까지 서양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그 금욕주의가 인간의 본성과 ‘건강’에 반하도록 사람들이 행동하도록 하기 때문에, 혹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이는 거대한 정신병과 다름 없다고 표현하기까지 했습니다.

『도덕의 계보』는 거대한 다이너마이트입니다. 불을 붙이기 전에는 무섭고, 또 폭발할 때의 진동과 소음이 너무 크기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이지만, 기존의 ‘당연한 것’, ‘자명한 것’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날려버리고 났을 때 시야가 탁 트이는 듯한 특유의 (폭발적인) 쾌감이 있는 저서입니다. 책을 함께 읽으면서 그러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IV. 작가 및 도서 판본 소개

IV.1. 작가 소개

현대 철학자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저작《니체》에 등장하는 생애 소개 부문3질 들뢰즈 저, 박찬국 역. 『들뢰즈의 니체』. 철학과 현실사. 2007. pp. 9-27.을 이하에 옮깁니다. 다만 해당 부문은 들뢰즈 자신의 철학적 견해도 섞여 있기 때문에, 배경 없이 곧바로 읽어나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해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거나 니체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있어 당장은 필요치 아니한 의견 · 설명 · 주석을 일부 중략하고 원문의 몇 가지 오류를 교정하였습니다. 역서의 전문을 부록으로 달아두니 필요하신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1844년에 뢰켄의 목사관에서 태어났다. 뢰켄은 튜링겐 지방에 있었는데, 그 당시 튜링겐은 프러시아에 의해 병합되어 있었다. 니체의 부모는 모두 루터교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섬세하면서도 교양을 갖춘 인물이었던 아버지도 목사였지만 1849년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뇌연화증, 뇌염, 뇌일혈 때문이라고 전한다). [아버지 사후에] 니체의 가족은 나움부르크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니체는 누이동생인 엘리자베트와 함께 여성적인 가족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신동이었으며 그가 어린 시절에 썼던 논문들과 음악 작곡의 습작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는 포르타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본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는 원래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전공했지만 결국에는 신학을 버리고 고전문헌학을 택했다. 그러나 고독한 사상가, ‘독립적인 사상가’ 쇼펜하우어에 의해 매료되면서 그의 뇌리에는 철학이 떠나지 않았다. 고전문학상의 여러 업적들(테오그니스, 시모니데스, 디오게네스-라에르티오스에 관한 연구)로 인해 니체는 아직 젊은 나이였던 1869년에 바젤 대학 고전문헌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니체가 바젤로 이사한 후, 이전에 라이프치히에서 만났던 바그너4낭만주의 클래식 음악의 대표 주자로 유명한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를 말한다.와의 친교가 시작된다. 바그너는 루체른 근처의 트립셴에 거주하고 있었다. 바그너와 교류했던 시기를 니체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그너는 거의 60세였으며 바그너의 아내인 코지마는 아직 30이 채 안 된 나이였다. 코지마는 작곡가인 리스트의 딸이었으며, 바그너와 결혼하기 위해서 음악가인 한스 폰 뷰로와 이혼했다. 바그너 부부의 친구들은 코지마를 자주 아리아드네라고 부르면서, 뷰로를 테세우스에 그리고 바그너를 디오니소스에 비유했다. 거기에서 니체는 어떤 종류의 사랑의 도식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사랑의 도식은 이미 그의 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더욱 더 자신의 것으로 하게 된다.5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없애려고 크레타섬에 오게 되고, 테세우스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 아리아드네는 그의 몸에 실을 묶어서 그가 미노타우로스를 없앤 후 그 실을 따라 미궁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리아드네와 테세우스는 결혼을 약속하고 아테네를 향해 떠났으나, 도중에 테세우스가 그녀를 버리고 떠나자 디오니소스가 나타나 실의에 빠진 아리아드네와 결혼했다고 한다. 혹은 테세우스가 그녀를 디오니소스와 결혼시켰다고도 전해진다; 아리아드네-테세우스-디오니소스의 3항으로 연결된 사랑의 도식이 이미 니체 자신의 것이었다는 말은, 니체가 코지마를 아리아드네로, 바그너를 테세우스로, 자신을 디오니소스로 간주했다는 것을 뜻한다. 디오니소스는 신으로서, 영웅적 인간 테세우스보다 더 높은 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아드네에 대한 디오니소스의 사랑은 반드시 테세우스가 매개된 3항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 점이 바로 니체가 자기화한 ‘사랑의 도식’의 특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아름다운 시절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때 니체는 바그너가 자신을 이용하면서 비극에 대한 니체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을 도용하고 있다는 불쾌한 느낌을 가졌다. 그리고 어떤 때 그는 자신이 코지마의 도움을 받아서, 바그너가 독자적으로 발견하지 못했을 진리에로 바그너를 이끌었다는 감미로운 느낌을 가졌다.

바젤 대학 교수에 취임한 후 니체는 스위스 시민이 되었다. 그는 1870년의 프러시아-프랑스 전쟁 동안에 간호병으로 종군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그동안에 짊어져 온 최후의 ‘짐들’, 즉 민족주의, 프러시아와 비스마르크6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총리로 재임했던 ‘철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말한다.에 대한 어떤 종류의 공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는 국가와 문화를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을 더 이상 용인할 수 없었으며 군사적인 승리가 문화의 발전을 가져온다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이때부터 이미 독일을 경멸하기 시작했으며 독일인들 사이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 (중략) …

1871년에 그는 『비극의 탄생』을 쓴다. 거기에서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의 가면 아래 참된 니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고전문헌학자들에 의해서 혹평을 당한다. 니체는 자신이 ‘반시대적인 자’라고 통감하며 독자적인 사상가와 공적인 교수직이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반시대적 고찰』 4부 「바이로이트에서의 바그너」(1875)에서 그는 바그너에 대해 분명하게 유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바이로이트 극장의 개막식, 그가 거기에서 발견했던 소란스런 분위기, 공식적인 행렬, 연설, 늙은 황제의 임석 등에서 그는 구토를 느낀다. 친구들은 니체가 변했다고 생각하면서 놀라게 된다. 니체는 점차 실증적인 과학, 즉 물리학, 생물학, 의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건강을 잃었다. 그는 두통과 위통, 시각장애, 언어장애 등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는 교수직을 포기하게 된다. “병은 나를 서서히 해방시켰다. 그것은 나에게 모든 파멸, 모든 격렬하고 위험한 분주함을 면해 주었다. … 그것은 나의 습관을 철저하게 변화시킬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 바그너는 교수로서의 니체에게 부족했던 면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교수직을 포기하면서 바그너주의도 사라졌다.

니체의 친구들 중에서 가장 충실하고 지적으로 가장 탁월했던 오버벡 덕분에 니체는 바젤 대학에서 1878년에 연금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방랑 생활이 시작된다. 니체는 쾌적한 기후를 찾아 스위스, 이태리, 프랑스 남부로 망령처럼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가구가 딸린 소박한 아파트를 빌려 살았다. 어떤 때는 홀로, 어떤 때는 친구들과 함께(예를 들면 오랜 바그너 숭배자인 말비다 폰 마이젠부르크, 니체의 오랜 제자이며 바그너를 대체할 음악가라고 니체가 기대했던 페터 가스트,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과 도덕의 해부 등의 면에서 니체가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던 파울 레). 그리고 때때로 니체는 나움부르크로 돌아가곤 했다. 소렌토에서 니체는 바그너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이때 바그너는 민족주의자이자 경건한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다. 1878년에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책에서 가치들에 대한 첨예한 비판을 개시한다. 사자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바그너는 그를 공격했다. 아울러 그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읽을 수도 없다!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쓰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방문하는 사람도 없고 음악을 듣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1880년에 그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끊임없는 고통, 매일 몇 시간에 걸쳐서 뱃멀미와 유사한 느낌이 계속된다. 몸이 반쯤 마비되어 말하기조차 어렵다. 그리고 그것을 잊게 하는 것은 격렬한 발작뿐이다(그 전의 발작 때 나는 3일 밤낮동안 구토를 계속했다. 나는 죽음을 갈망했다…). 내가 이 끊임없는 고통을 당신에게 묘사할 수 있을까. 머리와 눈을 불로 달군 집게로 괴롭히는 것 같은 끊임없는 고통, 머리에서 발끝까지 마비시키는 이러한 느낌을.”

… (중략)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 후에 니체는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1879), 『아침놀』(1880)에서 총체적인 비판이라는 그의 기획을 계속해서 수행했다. 그는 또 『즐거운 학문』을 준비한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것, 어떤 고양감, 충일감이 나타난다. 니체는 가치평가가 의미를 변경하고 어떤 다른 낯선 건강의 고지로부터 병을 판단하는 지점에까지 도달했던 것 같다. 그의 고통은 계속되지만 그의 신체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열정’에 의해서 자주 지배되었던 것 같다. 그때 니체는 위협의 느낌과 결부된 자신의 가장 높은 상태를 느끼는 것이다.

1881년 8월, 실즈-마리아에서 실바프라나 호수를 거닐면서 니체는 영원회귀라는 충격적인 계시를 받는다. 그것에 이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위한 영감을 얻게 된다. 1883년과 1885년 사이에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1부에서 4부까지 쓰게 되며 그것의 속편이 될 저작을 위한 메모들을 모은다. 그는 비판을 이전에 도달하지 못했던 수준으로까지 수행한다. 그는 그것을 가치들의 ‘전환’의 무기로 삼는 것이며, 탁월한 긍정을 위한 부정으로 삼는 것이다(『선악의 피안』(1886), 『도덕의 계보학』(1887)). 그것이야말로 제3의 변신, 혹은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불안과 격렬한 갈등을 느꼈다. 1882년에 루 살로메와의 사건이 있었다. 그녀는 파울 레와 함께 살고 있었던 젊은 러시아 여성이었지만 니체에게는 이상적인 제자이자 사랑할 만한 여성으로 보였다. 니체는 이미 적용할 기회가 있었던 저 사랑의 도식에 따라서 친구인 레를 매개로 해서 루 살로메에게 성급하게 구혼한다. 니체는 하나의 꿈을 좇고 있었다. 즉 그 자신이 디오니소스로서 테세우스의 동의 아래 아리아드네를 받아들인다는 꿈을 말이다. 테세우스는 ‘더 높은 인간’이며, 아버지의 이미지다. 바그너는 한때 니체에게 이러한 아버지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니체가 코지마-아리아드네와 결합하겠다고 분명하게 표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중략) …

말비다 폰 마이젠부르크를 후견인으로 하여 루 살로메, 파울 레 그리고 니체는 기묘한 사중주를 형성하게 된다. 그들의 공동생활은 불화와 화해의 연속이었다. 독점욕이 강하고 질투심 많은 엘리자베트는 그 사중주를 파괴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했다. 그녀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 니체는 누이동생과의 인연을 끊을 수 없었지만, 누이동생에 대한 신랄한 평가를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나의 누이동생과 같은 사람은 불가피하게 나의 사유방식과 나의 찰학에 대한 불구대천의 원수다. 이것은 사물의 영원한 본성에 기초하고 있다, “불쌍한 나의 누이여, 나는 너와 같은 영혼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꼴사납게 도덕을 가르치려드는 너의 수다에 심히 지쳤다.”). 루 살로메는 니체를 좋아했지만 그것은 연애감정은 아니었다. 그녀는 나중에 니체에 대해서 매우 아름다운 책을 썼다.7Lou Andreas Salome, 『프리드리히 니체(Frederic Nietzsche)』, 1894(프랑스어역, Grasset).

니체의 고독감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는 바그너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서는 아리아드네-코지마의 이미지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1885년에 엘리자베트는 바그너주의자이자 반유태주의자이고 프러시아 민족주의자인 푀르스터와 결혼을 하게 된다. 푀르스터는 순수한 아리아인들의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엘리자베트와 함께 파라과이로 가려고 했다. 니체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이 매부를 달갑지 않게 대했다. 어떤 다른 인종주의자에게 니체는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다. “당신의 간행물들을 나에게 보내지 말기 바랍니다. 나는 인내심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니체는 행복감과 울적함을 계속 번갈아 가면서 느끼게 되며, 행복감과 울적함이 교체되는 간격은 갈수록 짧아지게 된다. 어떤 때 그는 모든 것에 대해서, 즉 그의 재단사, 음식, 사람들의 환대, 자신이 찾는 상점들에서 자신이 행사하고 있다고 믿었던 매력에 대해서 그 이상 좋을 수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어떤 때는 절망이 그를 짓누른다. 독자가 없는 것, 죽음에 대한 생각, 배신에 대한 생각.

위대한 해인 1888년이 온다. 『우상의 황혼』, 『바그너의 경우』, 『안티 그리스도』, 『이 사람을 보라』. 이 모든 것은 니체의 창조적인 능력이 고양되고, 붕괴에 선행하는 최후의 비약을 감행하는 것처럼 진행된다. 위대한 거장의 이러한 작품들에서는 음조(音調)조차도 변하고 있다. 초인적인 것이 갖는 코믹한 성격처럼 새로운 폭력과 새로운 유머가 보인다. 한편으로 니체는 자신에 대해서 셰계적 · 우주적인 이미지, 도발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언젠가는 무시무시한 어떤 것에 대한 기억이 나의 이름과 결부될 것이다”, “오직 나로 인해서만 이 지상에 위대한 정치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니체는 동시에 현재에 집중하면서 즉각적인 성공에 관심을 갖고 있다. 1888년 말경부터 니체는 기이한 편지들을 쓴다. 예를 들면 스틘드베리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군주들의 회의를 로마에서 열도록 했습니다. 나는 젊은 독일 황제를 총살형에 처하게 할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우리는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이혼합시다… 니체 황제.” 1889년 1월 1일, 니체는 토리노에서 정신발작으로 인해 혼절(昏絶)하게 된다. 그는 계속해서 편지들을 쓰면서 디오니소스 혹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고 서명을 하거나 두 개의 서명을 동시에 한다. 코지마 바그너에게는 “아리아드네여,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디오니소스”라고 편지를 쓴다. 토리노로 달려온 오버벡은 정신착란과 과도한 흥분상태에 있는 니체를 발견한다. 오버벡은 니체를 간신히 바젤로 옮기고, 그 사이에 조용하게 된 니체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니체는 ‘진행성 마비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니체의 어머니는 니체를 예나로 옮긴다. 예나 대학병원의 의사들은 니체가 1866년부터 매독에 감염되었으리라고 추정한다. … (중략) … 니체는 어떤 때는 조용해지고 어떤 때는 발작에 빠졌으며, 자신의 저작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음악은 여전히 즐겼다. 그의 어머니는 바이마르의 자택으로 니체를 데려온다. 엘리자베트는 1890년 말에 파라과이에서 돌아왔다. 병은 서서히 진행되면서 무감각과 극도의 고통으로까지 진행된다. 그는 1900년에 바이마르에서 죽는다.

… (중략) …

엘리자베트는 어머니를 도와서 니체를 간호했다. 그녀는 니체의 병에 대해서 경건한 해석들을 내놓았다. 그녀는 오버벡을 신랄하게 비난했지만 이에 대해서 오버벡은 매우 품위 있게 응답했다. 그녀에게는 커다란 공적이 있다. 그녀는 니체-문고를 바이마르에 설립하는 등, 자신의 오빠의 사상을 보급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81950년 이후, 니체의 원고들은 바이마르에 있는 괴데-쉴러 문고의 오랜 건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공적들도 그 이상 있을 수 없는 배신 앞에서는 빛을 잃고 만다. 그녀는 니체를 나치즘을 위해서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모든 ‘저주받은 사상가’의 운명이 으레 그러하듯, 그의 장례행렬에 모습을 나타내면서 그의 명성을 남용하는 친척, 이것이야말로 니체의 운명이 갖는 최후의 특징이다.

IV.2. 도서 판본 소개 및 안내

프리드리히 니체는 서양 철학사에서 근 · 현대 철학의 시발점으로 평가되는 철학자인만큼 여러 니체의 저작에 대한 국역본 · 해설본 · 발췌본들이 시중에 나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2005년에 정동호 · 이진우 등이 옮긴 『니체 전집』(책사랑), 장재형의 『마흔에 읽는 니체』등이 있죠.

그러나 우리 모임에는 니체는 물론이거니와 서양 철학을 처음 접하는 구성원들이 많습니다. 열거한 책들도 훌륭하지만, 『니체 전집』처럼 원문의 의미를 최대한 살려 전달하는 것에 목적을 둔 서적은 지나치게 어렵거나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고, 『마흔에 읽는 니체』는 쉽게 읽을 수는 있지만 니체의 ‘원래 뜻’을 오해할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타협점으로서 니체에 대한 원문을 최대한 그대로 옮기는 기조를 가지되 역자가 친절하고 또한 상세하게 주석과 해석을 달아둔 『도덕의 계보』 판본 ―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찬국 교수가 비교적 최근에 옮긴 아카넷의 판본을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미 지난 2022학년도 1학기에 서울대학교 철학과의 〈서양철학의 고전〉 강좌에서 이 판본에 대한 역자의 강의를 청취하고 토론한 경험이 있습니다. 해당 강의록과 당시에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기록해두었던 각종 주석, 찾은 보충 문헌들, 또 제출했던 보고서 등이 남아 있다는 점도 이 판본으로 『도덕의 계보』를 읽기를 제안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시작하기 전에도 안내드릴 사항이지만, 이 판본은 니체의 서문 – 본문 – 역자의 해설 순으로 구성됩니다. 역자 또한 강력히 권장하고 있지만 저 또한 강조하자면, 역자의 해설 – 본문 – 니체의 서문 순으로 역으로 읽어나가는 것이 이해에 큰 도움이 됩니다. 본문의 내용은 니체 전반의 사상이나 이 즈음 니체가 가지고 있던 생각, 생애 등을 이해했을 때에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또한 니체의 서문은 본문을 구성하는 총 3개의 논고에 대한 종합 요약에 해당하기 때문에, 본고의 내용을 모두 이해한 뒤에 읽어야만 제대로 그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V. 중심 논제

V.1.

니체는 우리에게 익숙한 ‘선’의 관념, ‘양심의 가책’ 일체가 사실은 역사적 약자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강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즉 자신들이 ‘강자’로 올라서고 강자들을 ‘약자’로 전환시키기 위해 발명한 것이라고 말하며, 이 근원의 사악함과 이들 관념이 ‘인간이 자신을 공격하며 상처입게 만들기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도덕 관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을 생각해봅시다.

V.1.1.

니체의 위와 같은 ‘선’, ‘양심의 가책’에 대한 기원에 동의할 수 있나요?

V.1.2.

니체가 분석한 ‘도덕의 계보’가 옳다는 점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즉 전통 기독교적 도덕관의 ‘사악한’ 기원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이 도덕 관념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이 나쁜 것들만 있을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오늘날의 도덕 관념에 장점이 있지는 않을까요?

V.1.3.

전통적인 도덕관이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진다면, 그 장점과 단점 중 어느 것이 더 클까요? 전통적인 도덕관과 니체의 주장, 즉 ‘노예 도덕’과 ‘주인 도덕’ 중에서 우리가 만약 단 하나의 도덕관을 택해야 한다면 어떤 도덕관을 택하는 것이 옳을까요?

V.2.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간을 억압하는 정신병과 다름없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금욕주의적 이상은 육체를 비롯한 현실은 더럽고 악한 것으로 보면서, 정신과 피안의 세계는 선과 순수로 보는 이원화된 세계관을 깔고 있다고 보았기에 부자연스러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비열한 것이라고 보기까지 했습니다. 금욕주의적 이상을 이러한 시각으로 보는 니체에게 전통적 〈행복〉이란 단지 고통 없음을 지시하는 술어라 여겨지는 것이 당연했을 겁니다. 니체는 전통적 〈행복〉에 대항하는 개념으로서, 즉 자신이 생각하는 ‘고귀한 자들의 진정한 행복’ 개념으로 〈자기 초극〉을 제시합니다. 관련하여 다음을 생각해봅시다.

V.2.1.

니체가 비판하고 있는 전통적 〈행복〉은 단지 고통이 없음을 지시하는 술어에 불과한 것일까요? 니체가 전통적 〈행복〉을 오해하여 이러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V.2.2.

니체는 진정으로 ‘행복’하며 ‘강한’ 인간이란 잊어야 할 것은 빨리 잊어버리고, 어떠한 현실의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이를 극복해내는 ‘극복하는 인간’, 즉 ‘자기 초극의 인간’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니체가 제시하는 ‘초인’은 과연 정말로 행복한 인간일까요?

V.2.3.

니체는 삶의 의미가 이른바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것, 즉 더욱 강하고 위대한 인간이 되는 것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니체의 ‘삶의 의미론’에 동의할 수 있나요?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V.3.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선정한 이유는 그 철학 사상의 파괴적이면서 도발적인 성격의 도움을 얻어 ‘철학’이란 무엇인지, ‘철학함’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상술드린 바 있습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는 다음을 논의해봅시다.

V.3.1.

‘철학함’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V.3.2.

‘철학’을 어떻게 정의내리고 싶은가요? 왜 그렇게 정의하고자 하나요?

VI. 모임 계획

금월의 총 4번 이루어질 모임은 서로의 독후감을 논평하는 시간 없이 다음과 같은 계획으로 운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계획을 열거하기 전, 모임 계획과 관련한 몇 가지 부언을 아래와 같이 붙이고자 합니다.

모임의 각 회차에서 각 구성원은 반드시 적어도 필수 읽어올 범위까지는 도서를 읽어와야 합니다. 권장 읽어올 범위는 해당 회차에서의 논의나 이해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 호스트가 읽어올 것을 권장하는 도서의 범위로, 읽어오는 것이 강제되지는 않으나 다만 권장됩니다.

모임의 원활한 진행을 보조하면서 구성원들이 도서와 모임에서 진행할 토의 · 토론의 주요 논점을 미리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각 회차마다 구성원들이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내용을 정해두었습니다. 우리 모임의 규칙에 의거하여 이 내용들이 누락되었다고 해서 불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나, 모임에서 논의할 부분들을 미리 생각해보고 준비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책을 읽을 때 해당 내용을 생각해보고 독서 노트에 정리하여 올리는 것이 강력하게 권장됩니다.

아울러 철학 초심자가 많은 우리 모임의 상황을 고려하여, 모임을 준비하거나 니체의 주요 사상에 대하여 톺아보고자 할 때 참고 가능한 추천 참고 문헌이 회차별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해당 문헌에 대한 참고는 전적으로 구성원의 자유이며, 필수는 아닙니다. 그러나 니체 사상의 핵심과 정수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므로 추천 참고 문헌은 가급적 탐독하기를 권장합니다.

이제 각 회차별로 나누어 모임의 구체적인 계획을 읽어올 범위와 독서노트에 포함해야 할 내용, 모임에서 진행할 것들의 순서대로 아래와 같이 밝힙니다.

VI.1. 제1회차: “철학과 니체”
  • 필수 읽어올 범위: 역자의 해제, 본 모임계획서의 ‘III. 주요 내용 소개’ 및 ‘IV.1. 작가 소개’
  • 권장 읽어올 범위: 역자의 해제, 본 모임계획서의 ‘III. 주요 내용 소개’ 와 ‘IV.1. 작가 소개’의 원문인 ‘부록 1.’ (더 많은 논의를 하고 싶다면, 첫 번째 논문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의 #13.까지)
  • 구성원들이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내용
    • 철학함,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定義).
    • 서양 · 니체 철학에서 궁금한 부분 적어도 1개 이상.
  • 중심 논제 V.3.1; V.3.2. ‘철학함’과 ‘철학’에 대한 구성원들의 초기 정의(定義)을 청취.
  • 공동으로 VII.3.의 서울대학교 온라인 공개 강좌 박찬국 교수의 『현대철학사조: 현대철학의 거장들』강좌의 「4-1. 니체의 삶과 문제의식」 영상 강의를 시청 후 자유 토의 및 질의응답.
  • 서양 철학과 니체 철학에 초심자가 많으므로, 필수 읽어올 범위의 내용에서 이해되지 않거나 서양 · 니체 철학에서 궁금한 부분 자유 질의 응답.
  • 니체를 함께 살펴보면서 알고 싶거나 이해하고 싶은 부분들을 각 구성원들이 공유하기.
  • (과반 이상이 권장 범위에서 ‘더 많은 논의를 하고 싶다면’ 부분까지 읽어온 경우)  본인이 분석한 니체가 생각하는 기존 ‘선과 악’ 개념의 비판점이 무엇인지 공유하기.
VI.2. 제2회차: “주인도덕과 노예도덕: 기독교적 선과 악”
  • 필수 읽어올 범위: 첫 번째 논문 〈’선과 악’, ‘좋음과 나쁨’〉 끝까지.
  • 권장 읽어올 범위: 두 번째 논문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14까지.
  • 구성원들이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내용
    • 자신이 파악한 니체가 생각하는 기존 ‘선과 악’ 개념의 비판 · 한계점.
    • 자신이 정리한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의 뜻.
    • 중심 논제 V.1.2; V.1.3.에 대한 자신의 입장(찬/반 중 택 1)과 주요 근거 1개 이상.
  •  (만약 제1회차에 과반 이상이 권장 범위에서 ‘더 많은 논의를 하고 싶다면’ 부분까지 읽어오지 못한 경우) 본인이 분석한 니체가 생각하는 기존 ‘선과 악’ 개념의 비판점이 무엇인지 공유하기.
  • 자신이 정리한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에 대한 정의 공유,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가 수립될 때까지 토의.
  • 중심 논제 V.1.2; V.1.3. 니체의 ‘선과 악’ 개념에 대한 찬/반 토론하기.
VI.3. 제3회차: “죄 그리고 양심의 가책”
  • 필수 읽어올 범위: 두 번째 논문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 끝까지.
  • 권장 읽어올 범위: 세 번째 논문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10까지.
  • 추천 참고 문헌: VII.3. 온라인 강좌『현대철학사조: 현대철학의 거장들』의「4-2.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사상, 운명애, 초인」
  • 구성원들이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내용
    • 자신이 파악한 니체가 ‘양심의 가책’을 비판한 이유.
    • 중심 논제 V.1.1.에 대한 자신의 입장(니체의 입장에 동의/비동의 중 택 1)과 주요 근거 1가지 이상.
    •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관련하여 자유롭게 인터넷으로 문헌을 조사해보고, 궁금해진 내용 1개 이상.
    • 중심 논제 V.2.3.에 대한 자신의 입장(찬/반 중 택 1)과 주요 근거 1가지 이상.
  • 자신이 파악한 니체가 ‘양심의 가책’을 비판한 이유를 공유하기.
  • 중심 논제 V.1.1. 니체의 ‘양심의 가책’, ‘선과 악’ 개념에 대한 동의 여부 찬/반 토론하기.
  • 기타 ‘양심의 가책’과 관련된 니체 주장에 대한 자유 토론 및 질의 응답.
  • 니체의 ‘힘에의 의지’ 등과 관련된 개념에 대한 자유 질의 응답. (니체 사상에서 가장 오해가 많은 부분이므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함. 관련하여 VII.2. 오영진의 논문을 참조하면 좋을 것.)
  • 중심 논제 V.2.3. 니체의 ‘힘에의 의지’ 동의 여부 찬/반 토론.
VI.4. 제4회차: “금욕주의적 이상, 니체 그리고 다시 철학”
  • 필수 읽어올 범위: 세 번째 논문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끝까지.
  • 권장 읽어올 범위: 세 번째 논문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저자 서문 끝까지. (완독)
  • 추천 참고 문헌: VII.3. 온라인 강좌의 다음 목록에 열거된 차시 강좌들.
    • 4-2.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사상, 운명애, 초인
    • 4-3. 예술, 초인의 육성, 니체의 사회사상
  • 구성원들이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내용
    • 자신이 파악한 니체의 〈초인 Übermensch〉의 의미와 그가 〈초인〉을 강조한 이유.
    • 자신이 이해한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강조한 이유.
    • 중심 논제 V.2.1. V.2.2.에 각각에 대한 자신의 입장(찬/반)과 주요 근거 각 1가지 이상.
    • 모임을 마치는 지금 시점에서 다시 정의해보는 자신만의 ‘철학함’과 ‘철학’에 대한 정의(定義).
  • 기독교적 가치 평가에 대한 니체의 비판에 대한 자유 질의응답과 토의.
  • 중심 논제 V.2.1; V.2.2에 대한 찬/반 토론.
  • 중심 논제 V.3.1; V.3.2. 책을 마무리하면서 변화한 ‘철학함’과 ‘철학’에 대한 정의(定義), 느낀점 공유.

VII.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들

VII.1. 도서
  • 질 들뢰즈 著, 박찬국 易. 『들뢰즈의 니체』. 철학과 현실사. 2007.
  • 프리드리히 니체 著, 박찬국 易. 『이 사람을 보라』. 아카넷. 2022.
VII.2. 철학 저널 및 학위논문
  • 오영진, 「니체와 로렌스: “권력에의 의지”의 역사.」 D.H. 로렌스 연구; 20.1 (2012)
  • 박찬국, 「니체 사상에 대한 종합적 소개 및 연구.」 철학사상. 2005.
  • 문성학, 「니체의 기독교 비판; 그 정당성에 대한 검토.」새한철학회 논문집 철학논총; 16.99. 2. (1999)
VII.3. 영상 강의
  • 박찬국 · 서울대학교 한국형 온라인 공개강좌(K-MOOC), 『현대철학사조: 현대철학의 거장들』 강좌 「모듈 IV. 니체」. 서울대학교 K-MOOC. 2020.
VII.4. 개인 저작물들

부록 I. 질 들뢰즈, 《니체》, 〈생애〉 전문

이하의 내용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저작《니체》 에 등장하는 생애 소개 부문9질 들뢰즈 저, 박찬국 역. 『들뢰즈의 니체』. 철학과 현실사. 2007. pp. 9-27.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책에는 저자의 주석에는 표식 없이, 역자의 주석에는 [역주]로 표시하여 구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주석을 몇 가지 추가하였기 때문에 저자의 주석은 [저자 주], 역자의 주석은 [역자 주]로 표기하고, 제 주석은 별도의 표기 없이 달아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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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자료 1: 박찬국, 《들뢰즈의 니체: 니체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는가》

이하의 글은 현대 철학자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쓰고 박찬국 교수가 옮긴 《들뢰즈의 니체》10질 들뢰즈(Gilles Deleuze) 作, 박찬국 易. 《들뢰즈의 니체》. 철학과 현실사. 2007. pp. 167-185.의 후미에 역자가 니체 사상의 전반과 그에 대한 들뢰즈의 시각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며 붙인 해설의 전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역자의 설명이 니체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을 온전히 담았다기보다는 동양철학과 주로 연관지어온 역자 특유의 시각을 좀 더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힘에의 의지’와 관련된 요약 설명에서 들뢰즈의 관점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표현인 ‘힘에의 의지의 건강성’이 다소 부적절한 용어 선정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보충 자료로 가져올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도서인 《도덕의 계보》에서는 니체의 ‘도덕 비판’에 중심을 두었기에 니체 철학의 전반에 대한 내용이 군데군데 생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1또한 부언하자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질 들뢰즈 관점에 대한 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는) 니체 사상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니체 사상을 정치적인 것으로 보고 니체가 ‘반민주주의적’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 기술이 역자의 해설에 붙어있다는 점에서 오류까지 범하고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니체가 비판한 것은 삶에 반대되는, ‘삶을 재단하는’ 철학 혹은 절대성 혹은 일률성이었지 사회에서 합의한 통치의 방식까지 비판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니체의 전기 사상에 해당하는 ‘예술 철학’이라던가, 니체의 후기 핵심 사상인 ‘영원회귀와 초인’이 대표적입니다. 들뢰즈는 니체의 예술 철학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이 글 역자의 해설에도 니체의 예술 철학에 대한 내용은 다소 생략되어 있으나, ‘이원론’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여 니체가 비판한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이해하는데 있어 이만한 요약문이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아래와 같이 보충 자료로서 제시하니 많은 참고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이하에서 박찬국 교수의 원 주석은 [원주]로, 제 주석은 [사족]으로 표기하여 구분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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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노트 1: 제1차 독서 모임 – “철학과 니체”

인간의 삶. 이것은 니체에게서 가치의 유일한 척도이자,
그 자체로는 더 이상의 다른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마지막 척도로 제시된다.

백승광,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2005. pp. 107-108.
[박찬국, 〈니체 사상에 대한 종합적 소개 및 연구〉, 철학사상, 2005.에서 재인용]

I. 〈철학〉 그리고 〈철학함〉이란

I.1. 〈철학〉

철학이란, 모든 질문을 던진 자들의 역사이다.”

  • 따라서 철학은 사실 학문 전체를 포괄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운명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사건들에 맞닥뜨릴 때 자연히 떠오르는 질문들 그리고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것이 학문 전체이기 때문이다.
  • 다만 좁은 의미에서의 철학은 철학 특유의 ‘제한 없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성역 없이 질문을 던진 자들의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I.2. 〈철학함〉

철학함이란, 성역 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 혹은 그것을 배우는 것이다.”

  • 철학은 모든 질문에 대한 역사이므로 철학함은 무엇이든지 간에 질문을 던지는 것 그리고 그에 대답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을 굳이 배우지 않고도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수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나름대로 답을 찾지 않던가? 그러나 철학은 질문을 던지는 영역에 제한을 두지 않는 그 자유가 특징이다. 시험에서 던져지는 문제들, 일상 · 경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넘어서서 우리는 삶에 관한, 우리 자신의 존재에 관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 따라서 철학을 한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낯설게 일상을 만나며 다시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상 속에서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질문을 던질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을 철학은 다시 사고와 비판의 대상으로 되돌린다. 우리의 안과 바깥 모두에서 의심과 사유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대상에게 다시 한 번 질문을 제기하는 것, 그것이 철학을 한다는 것이며 바로 그 환원을 배우는 것이 철학인 셈이다.
  • 낯설게 일상을 만나는 것,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영역들을 흔들고 일일이 재방문하는 것 그것이 철학이라면 철학에게 성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사유로부터 삶에 이르기까지 철학은 인간의 모든 것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 그러므로 철학함은 성역 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본질적으로 정의할만하다.

II. 서양 · 니체 철학 전반을 향한 나의 호기심과 질문들

결국 궁극적인 질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여기서 ‘어떻게’란 결국은 삶에서 무엇을 볼 것인지 즉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엇을 ‘가치’로 볼 것인지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긍정하고 무엇을 부정할 것인지의 문제. 즉, ‘가치 평가’의 문제.

II.1. 니체 철학을 향한 질문들
  • “니체는 바람직한 정치체제를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 박찬국 교수는 니체 사상을 반민주주의적-이라고 평가하면서 급진적 귀족주의, 즉 ‘주인도덕’에 의거하여 ‘고귀한 자’들이 ‘저열한 자’들을 지배하는 정치체제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다. (Ref. 박찬국 교수의 강의록과 현대철학사조 강좌) 그러나 니체가 ‘주인도덕’을 논의한 것은 기독교적 ‘평등’이 함의하는 ‘동일화’, ‘탈-개성화’를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니체가 거부하고자 한 것은 동일한 질서에 종속되어 스스로 사유하고 극복하는 힘을 잃은 개인 그리고 오직 이 의미에서의 ‘유약한 개인’이었다. 니체는 주인도덕 하에서의 ‘약자’더라도 ‘강자’들을 보면서 느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키고자 하는 태도를 가져야한다고 역설했다. 니체가 말하는 ‘강자’란 사회 질서의 지배자라기보다는 사회 가치의 지배자라는 점에서, 그리고 모든 ‘약자’들이 ‘강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서 귀족이 권력을 획득하고 사회를 통치해야 한다는 귀족주의는 니체의 도덕관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니체가 민주주의의 박애와 평등이라는 기초적인 가치에 대해 첨예한 비판을 개시한 것은 그것들이 함유하고 있는 ‘절대성’ 그리고 ‘동일성’을 거부하기 위함이었지 정치 체제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고 보기 어려워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니체의 다른 저작들을 일체 읽지는 못한 나의 생각이므로, 만약 다른 저작에 니체가 자신의 정치체제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면 확인하고 평가해보고 싶다.
  •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감의 부재에 관한 원인은 정말 니체가 지적한대로 현존하지 않는 ‘절대성’을 우리가 의미로 간주하기 때문인 것일까? 변화를 긍정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과연 ‘유희하는 인간(또는, 초인)’이 될 수 있을까?”
    ― 니체 철학은 기독교적 가치관 아래에서 인간의 추악한 면이자 단점으로 치부되었던 공격성이나 잔인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긍정하고 있다. (‘주인도덕’은 그 긍정 위에서 세워진 새로운 도덕관이다) 즉 우리가 스스로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혹은 숨기거나 개선해야 한다고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가치 전환을 행하고 있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가치의 전환을 통하여, 즉 부정되어왔던 것들을 긍정하는 것을 통하여, 그리고 변화를 긍정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과연 스스로를 사랑하는 인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당초 니체는 정말 인간의 모든 ‘단점’을 긍정하려고 했던 것일까? 니체가 과연 인간의 게으름, 비겁함, 유약함을 긍정했을까? 니체는 이들을 ‘절대성’에 지배받는 약자들의 특성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약자’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이 가치를 창조하는 주체가 된다면 자연히 우리는 게으름, 비겁함, 유약함으로부터 벗어나서 가장 주체적이고 자신감에 찬 당당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일까?
  • “도가 사상과 니체 철학은 삶 앞에서 인간이 가져야 하는 태도(i.e.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를 동일하게 정의(판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점이 있는가?”
    ― 하단 ‘II.2. 서양 철학을 향한 질문’ 참조.
II.2. 서양 철학을 향한 질문
  • “서양 철학은 동양 철학과 어떤 점에서 어떻게 다른가? / i.e.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은 각각 어떤 질문들을 던져왔고 어떤 대답을 했는가? 같은 질문들이 있다면 그 대답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 반-니체적이라고 판단해서 (또는, 니체적 기준에서 비겁하다고, 삶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도피의 철학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거부해온 동양 철학 일체에 비교적 최근 관심이 생겼다.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노자를 비롯한 도가 사상인데,  게임 〈나인 솔즈(Nine Sols)〉가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는 것처럼 선 · 악의 구분은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모호한 것이라 주장한 점이 니체의 선악 가치 비판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또 죽음 앞에서 ‘삶’ (또는, 절망 앞에서의 ‘희망’)이라는 인간의 여정에 대하여 도가 사상은 마치 의지를 제한 ‘받아들이기’를 요구하고 있는 반면 니체는 의지를 포함한 ‘받아들이기’ (운명애) 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니체 철학 이전 니힐리즘에 빠진 유럽 사람들에게 쇼펜하우어 등의 철학이 유행했고 이들 철학을 비롯하여 정신분석학의 라캉이나 미셸 푸코 등에게 동양 철학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동양 철학의 어떤 부분을 이들이 참고한 것이며 어떤 부분을 계승했고 또 어떤 부분에는 반대하였는지가 궁금하다. 물론, 가장 궁금한 것은 니체 철학과 도가 사상이 삶에 대해서 인간이 가져야 하는 태도(i.e.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를 동일하게 판정하고 있는지의 여부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들뢰즈는 철학자를 일찍이 ‘입법자’라고 논한 적이 있다. 법률이 서로 다른 가치 중에서 무엇을 우선할지를 정하는 것처럼, 철학자 또한 서로 다른 가치 중에서 무엇을 우선할지를 결정한다.
  • 2
    마치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전권을 주장하면서 그 성전을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들의 성소를 때려부순 사건처럼 말입니다. (예수의 성전 정화; 요한복음 2.13-22)
  • 3
    질 들뢰즈 저, 박찬국 역. 『들뢰즈의 니체』. 철학과 현실사. 2007. pp. 9-27.
  • 4
    낭만주의 클래식 음악의 대표 주자로 유명한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를 말한다.
  • 5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없애려고 크레타섬에 오게 되고, 테세우스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 아리아드네는 그의 몸에 실을 묶어서 그가 미노타우로스를 없앤 후 그 실을 따라 미궁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리아드네와 테세우스는 결혼을 약속하고 아테네를 향해 떠났으나, 도중에 테세우스가 그녀를 버리고 떠나자 디오니소스가 나타나 실의에 빠진 아리아드네와 결혼했다고 한다. 혹은 테세우스가 그녀를 디오니소스와 결혼시켰다고도 전해진다; 아리아드네-테세우스-디오니소스의 3항으로 연결된 사랑의 도식이 이미 니체 자신의 것이었다는 말은, 니체가 코지마를 아리아드네로, 바그너를 테세우스로, 자신을 디오니소스로 간주했다는 것을 뜻한다. 디오니소스는 신으로서, 영웅적 인간 테세우스보다 더 높은 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아드네에 대한 디오니소스의 사랑은 반드시 테세우스가 매개된 3항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 점이 바로 니체가 자기화한 ‘사랑의 도식’의 특징이었다.
  • 6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총리로 재임했던 ‘철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말한다.
  • 7
    Lou Andreas Salome, 『프리드리히 니체(Frederic Nietzsche)』, 1894(프랑스어역, Grasset).
  • 8
    1950년 이후, 니체의 원고들은 바이마르에 있는 괴데-쉴러 문고의 오랜 건물로 옮겨졌다.
  • 9
    질 들뢰즈 저, 박찬국 역. 『들뢰즈의 니체』. 철학과 현실사. 2007. pp. 9-27.
  • 10
    질 들뢰즈(Gilles Deleuze) 作, 박찬국 易. 《들뢰즈의 니체》. 철학과 현실사. 2007. pp. 167-185.
  • 11
    또한 부언하자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질 들뢰즈 관점에 대한 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는) 니체 사상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니체 사상을 정치적인 것으로 보고 니체가 ‘반민주주의적’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 기술이 역자의 해설에 붙어있다는 점에서 오류까지 범하고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니체가 비판한 것은 삶에 반대되는, ‘삶을 재단하는’ 철학 혹은 절대성 혹은 일률성이었지 사회에서 합의한 통치의 방식까지 비판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