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33.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II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선생님: 무슨 느낌인지 알겠어. 다른 사람들은 다 위선자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 같은 위선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정신병원으로.
필자: 그런 느낌이죠. 제 비판의 핵심이 두 번째 문장에 있는 거고요.
선생님: 이건 대중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일종의 〈엘리티시즘〉. 이런 엘리트주의는 근대 초기 문학의 특징이고, 비판받는 것 중 핵심적인 것. 실제 많은 지식인들이 그런 태도를 취했고, 그런 태도조차 사실은 위선적이지. 〈대중과 함께 하겠다. 그렇지만 나는 대중을 이끄는 지도자뻘이다〉는 태도.
필자: 계몽주의의 한계로 많이 지적되는 태도기도 하죠. 다만 그 점 때문에 자살까지 이어진 것이 매우 안타까운 오사무입니다…….
선생님: 맞아. 자살은 안타까운 일이야. 그렇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절망이나 희망에 대해 모르니까 함부로 말하긴 좀 그렇군.
필자: 그렇긴 하죠…….
선생님: 자살은 절망 또는 희망 때문이거나, 덕분일 수 있다고 봄.
필자: 그의 절망과 희망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그 정체를 밝히는 작업이 남은 거죠. 음……. 오사무가 니체도 봤으면 좋았으려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 니체가 주목받은 건 그가 죽고 나서도 꽤 있다가였지. 니체가 주목받은 것은 현대 철학에 와서……. 그러니까 2차 대전 후 70년대……. 그러니까 오사무가 죽고 나서 한참 후…….
필자: 아이고……. 아무래도 저는 오사무를 조금 더 읽어야겠습니다…….
선생님: 헐! 네 호기심은 〈자살〉인 건지?
필자: 오사무가 왜 ‘포기했는가’하는 것에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오사무는 ‘반-니체’적인 혹은 지극히 ‘기독교적’인 인물이거든요.
〈논파록 #2. 다자이 오사무의 ‘직소’와 ‘죽음’〉, 「다자이 오사무, 니체, 들뢰즈 그리고 ‘잘 죽음’」 中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라는 존재를 알 수가 없어졌고,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9.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I. 자신이 생각하는 죄(罪)의 반의어(들)와 그 이유
논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笑而不答함.
II. 읽은 범위에서 알 수 있는 화자 요조의 특징 · 성격과 그렇게 생각한 이유
읽은 범위에서는 요조의 다음과 같은 면모들을 확인해볼 수 있다. 이유에 대해서는 ‘III. 인상 깊었던 부분 · 문장들과 그 이유’에서 충분히 기술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 세계 · 타자의 위선적 · 이중적 모습에 대해 염증을 느끼면서도, 그 세계에 섞여들어가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공격하고 있음.
- 그런데 자신을 향하는 이 공격을 해소하기보다는, 형태를 바꾸거나 고통의 원천을 자신 앞에 반복적으로 세우는 보다 은밀한 형태로 지속하고 있으며 그 계속으로부터 만족감을 느낌. (마조히스트적 행위를 지속함)
- 세계와 자신 사이의 괴리감을 자신의 정체성 강화에 역이용하고 있으며, 이 유리감을 자신의 존재의 준거로 삼고 겉으로는 자신을 낮추고 매도하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상승을 기도하고 있음.
III. 인상 깊었던 부분 · 문장들과 그 이유
III.1. 동양의 알세스트
1몰리에르(Molière)의 《인간 혐오자(Le Misanthrope)》의 주인공인 우울한 청년으로, 진정성과 솔직함을 추구해 시대의 악덕과 보편화된 사회적 위선을 맹렬하게 비판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정말이지 하찮은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익살로 아침부터 밤까지 인간들을 속이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니 뭐니 하는 도덕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이렇게 인간을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인간의 삶과 대립되어 밤마다 지옥 같은 괴로움을 맛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즉 제가 머슴과 하녀들의 그 가증스러운 범죄조차 아무한테도 호소하지 않았던 것은 인간에 대한 불신 때문도 아니고, 또 기독교적 박애주의 때문도 아니고, 인간이 저 요조에게 신용이라는 껍질을 단단히 닫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조차도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면을 가끔 보이셨으니까요.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인간실격(人間失格)》,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p. 31-32.
- 사회 속 인간관계의 위선성에 대한 지적과 염증의 표현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이어져왔다. 단언컨대 요조는 근대 동양의 알세스트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프랑스의 몰리에르가 쓴 《인간 혐오자》2몰리에르(Molière)의, 《인간 혐오자(Le Misanthrope)》. 이경의 역, 지만지드라마. 2019.에서 요조의 문제 의식과 거의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등장하니까.
자네가 어떤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고 극단적인 다정함과 친근함을 표시하며 환대와 맹세를 남발하고 유난스럽게 포옹하는 것을 보았어.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상대가 가자 그제야 그저 아무개라고 답하더군. 한참 열을 내던 게 언제냐는 듯 아주 무관심한 사람처럼 그를 소개하더군. 자기 양심을 속이면서 그렇게 비굴하게 구는 것만큼 부당하고 비열하고 파렴치한 일이 또 어디 있어.
궁정과 파리 사교계 사람들 때문에 눈이 아프고 화가 치밀어 오른단 말이야. 그자들이 하는 수작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우울해지고 아주 서글픈 생각이 들어. 가는 곳마다 보이는 것이란 비겁한 아첨과 불의, 이해타산과 배반, 사기 행각 뿐이야.
- 세계의 비합리성 앞에서 염증을 느끼는 것은 비단 작품 속 인물만은 아니다. 당장에 대학 시절 동안 내가 작성했던 글들에 등장하는 다음의 문장을 되짚어보자.
그러나 이해해주게. 너무도 오랜 시간 동안, 이를테면 4년 동안 대학의 풍토 위에서 지적 동반자를 기대한 철학자에게, 그가 몇 년을 더 기다린다 하더라도 그가 찾는 자가 나타날 수 있을지는, 그를 이해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이해하려고 시도할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이가 등장할 것인지는 믿음의 영역에서 의심의 영역의 질문이 되었고, 마침내는 체념의 영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 그래도 대학, 사상의 풍토 위에 있다고 믿은 이곳에 들어오는 이들은 그래도 질문을 던지고 내밀함을 가진 이들이라 기대한 나는 학과 동기들부터 타 과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을 수업에서 만나보았지. 그런데 내가 발견했던 것이란 질문하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는 자들, 책을 끼고 살기보다는 술이나 휴대전화를 끼고 사는 이들이었네. 학문과 사상을 하겠다고 주장해온 자들이 입장권을 얻은 뒤에는 즉시 돌변하여 질문 던지기를 게을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가 느낀 배신감은 정말 치명적인 수준이었네. 학문하는 땅 위에서 토론이 아닌 침묵이, 반박과 논쟁이 아닌 수용과 복종이 서 있는 모습을 나는 견디기 어려웠네. 그래서 그날 이후로 나는 소위 〈지식인〉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청년들, 즉 만났을 때 대학의 이름과 과를 물으면서 계속 비교하려는 욕망의 화신들을 지극히 불신하게 되었다네. 좀 더 정확히는 아예 상종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 그들의 위선, 그들의 자만, 그들의 허영 일체가 나에게 너무나 깊게 다가온 나머지, 나는 거리를 두지 않으면 심한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가 된 것이지. 그래서 나는 MT에도 가지 않았으며 개강이니 종강 파티니 하는 행사에도 가지 않은 걸세. 이성으로 세계를 지각하고 정복하겠노라 외친 이들이 정작 모여서는 이성의 마비와 집단 술게임을 벌이는 모습의 모순이 나에게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네.
[미공개] Epistolam ad ‘Mea’ #1. 2024. 9. 25. 中과연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라는 저 문장은 그 뮤지컬 안에서만 적용되는 문장일까? 나는 오늘날 정치인들이 과거의 과오로부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찰 뿐인 궤변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고 온갖 법 기술들을 동원하여 최대한 시간을 끄는 모습을 본다. 그 모습이 참혹하여 고개를 돌리면 공사 현장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들이, 외롭게 작은 방에서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소식이 신문 한 귀퉁이를 자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 그렇다면 과연 그 누가 자신의 취득물을, 자신의 〈노동〉으로 번 대가를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 나는 이 희미하지만 논리적 추론을 통해 당연귀결되는 이 짐작을 모르지 않는다. 고개를 돌리고 싶은 생각도 또한 없다. 그렇기에 나는 동생을, 나아가 지난 연휴 ‘더 많은 복지는 오히려 더 많이 일한 이들의 〈정당한〉 몫을 일하지 않는 〈쓸모 없는〉 이들에게 헌납하는 꼴이다.’라고 말씀하신 아버지를 상기할 때마다 다시금 불편해진다. 결국 이러한 현실 앞에서 유약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뮤지컬의 주인공처럼 그저 광기 어린 웃음으로, 웃는지 우는 것인지 모를 그 웃음으로 한바탕 애탄하는 것뿐일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3. 2025. 2. 4. ~ 2025. 2. 25. 中
- 비교 대상에 놓인 두 사람, 즉 알세스트와 나 자신을 요조와 견주어 봄으로써 알게 되는 것은 이 염증의 표현들에는 위선성 혹은 불일치성에 대한 언급이 공통된다는 사실이다. 하긴 타인의 모습, 그리고 그 타인들로 구성된 사회의 모습의 이중성이 너무나도 괴리적으로 다가온 나머지 한 개인의 내면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수준이 될 때에서야 문장으로 그 억눌러온 고름이 터져나오는 법 아니겠는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작금의 세태,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의 너무나도 태연한 모습과 그런 모습들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뒤섞인 이 복잡한 실타래를 상기에 열거된 세 사람은 복잡하게 넘나들고 있다.
III.2. 죄(罪)와 마조히즘(Masochism)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고 싶어 하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아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 낸 것입니다. 여기 장래 나의 동료가 있다고 생각한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해서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왠지 모르지만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케이치에게 말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인간실격(人間失格)》,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p. 46-47.
- 굳이 더 멀리 갈 것도 없이 두 해 전 8월, 이 독서 모임에서 《도덕의 계보》를 같이 읽을 적에 그 ‘두 번째 논문’에 대해 내가 달아두었던 아래와 같은 해설만을 살펴보아도 충분할 것 같다.
니체는 선조들의 ‘가치평가’, 선조들의 ‘입법’에서 기원하였을 전통과 풍습에 대해 복종하면서도 여전히 가지고 있는 ‘부채 의식’이 선조들이 ‘신’의 영역으로 마침내 올라섰을 때 ‘그 어떠한 대상물로도 이를 변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상, 그리고 이에 따라 자신은 ‘파산한 채무자’이며 따라서 ‘구제불능의 죄인’이라고 여기게 되는 그리스도교에 이른다고 본다. 처음에는 단순한 채무자의 ‘책임 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종국에는 이 책임 의식이 ‘결코 변제받을 수 없는 부채에 대한 의식’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영원히 탈출할 수 없는 빚더미 위에 올라앉은 인간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 존재하는 ‘잔인함’의 방향을 틀어 스스로를 단죄하고 고통 위에 자발적으로 올라가도록 하는 ‘병’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니체가 보는 〈양심의 가책〉인 것이다.
‘약자’ 또한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니체는 이들의 힘에의 의지는 이들이 굴종하고 지배받은 역사에 의하여(즉, 관습과 전통,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성역’에 기꺼이 도전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에 맹목적으로 복종한 역사에 의하여) 오랜 시간 타(他)라는 올바른 방향으로 제대로 표출될 수 없었으므로, 그리고 바로 이 역사에 의하여 그들이 가지게 된 ‘강자’, 즉 지배 계급에 대한 원한에 의하여 뒤틀린 나머지 먼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 즉 자신에 대한 지배의 원천되는 자들에 대한 부정의 질을 부여하고 이들을 ‘악’으로 규정한 뒤, 그런 뒤에야 그 반대로서 ‘선’한 자, 즉 자기 자신을 상정하였고 피지배계급으로서 끊임없이 시달린 억압과 지배받음으로부터의 고통을 오히려 스스로 원하는 마조히스트가 되는데 일조하게 되었다고 본다. 즉 니체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통상의 도덕 · 사회적 규범 · 법률에 반하는 행위를 하였을 때 가지게 되는 〈양심의 가책〉이란 약자들이 이러한 절대성에 도전하지 아니하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고통에 원한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 역설적이지만 역사와 ‘노예도덕’의 발전에 따라서 오히려 죄의식과 ‘인간성의 내면화’가 고도화됨에 따라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나아가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는 것’으로 이어진 결과물이라고 보고 있다.
- 요조는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말했다. 요조에게 있어 ‘도깨비 그림’이나 ‘지옥의 말’이란 전후 맥락으로 보아 그가 염증을 느낀 타자와 그 타자들로 구성된 사회 일반이다. 요조는 이전까지 이들 앞에서 ‘익살’ 즉 가면을 쓴 필사적인 연기를 통해 사회 부적응자의 낙인을 피하고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살아남을 수 있도록 노력해온 개인적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자. 그렇다면 이 ‘도깨비 그림’과 ‘지옥의 말’을 그가 기꺼이 그리겠다고 할 때 그것은 이 ‘익살’과 같은 쪽에 놓인 것인가, 아니면 반대쪽에 놓인 것인가를 우리는 마땅히 검토해야 한다.
- 이 검토에서 우리는 요조가 화가와 자신을 암묵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고 싶어 하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아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라고 진술한다. 이러한 기술은 표면적으로는 화가의 심리 그리고 행위에 대한 기술이지만, 그 기술이 작중 요조가 보인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자신을 향한 진술이라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그렇다면 요조는 자신의 두려움에 대해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라고 규정한 상태에서, 이 화가들은 자신과 달리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이라 표현한 것이 된다.
- 그런데 여기서 ‘본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문제의 심리적 긴장 상태를 해소하는가? 즉 화가들과 요조가 만약 그들이 피로를 느낀 세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그들이 세계에 대해 가지는 실망감을 해소해주는가? 그렇지 않다. 표현 행위를 통해 이들은 일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 즉 억압된 감정의 배출에 따른 쾌를 느낄 수 있겠지만 그 감각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다. 여전히 이들에게 있어 타인은 ‘도깨비’ 내지는 ‘요괴’이고, 이 인식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반복적으로 그들의 화폭에 반영된다. 세계 앞에서 느끼는 답답함과 낯섬, 구토감은 하나도 해소되지 못하고서 계속하여 그림 위에 올라 되새겨지는 셈이다. 그렇다면 요조의 다짐이란 실질적 해법이라기보다는 단기적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며, 그 미봉책이라는 것도 자신이 불쾌함을 느끼는 대상들을 끊임없이 자신 앞에 세우고 묘사함으로써 쾌감을 얻는 방식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는 고통을 느끼는 대상에 스스로를 반복적으로 노출함으로써 은밀한 만족을 얻는 것을 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III.3. 이방인(L’Etranger)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자 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또 ‘범인(犯人) 의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인간 세상에서 평생 동안 범인 의식으로 괴로워하겠지만 그것은 조강지처 같은 나의 좋은 반려자니까 그 녀석하고 둘이 쓸쓸하게 노니는 것도 제가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또 속된 말로 ‘뒤가 켕기는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 상처는 제가 아기였을 때부터 저절로 한쪽 정강이에 생긴 것이 크면서 치유되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져 뼈에까지 닿아서 밤마다 겪는 고통이 변화무쌍한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퍽 기묘한 표현입니다만) 그 상처가 점차 혈육보다 더 정답게 느껴지고 그 통증이 상처와 살아 있는 감정, 사랑의 속삭임으로까지 느껴졌던 저라는 남자에게 예의 지하 운동 그룹의 분위기는 묘하게 마음이 놓이고 편안했습니다. 즉 운동 본래의 목적보다 그 운동의 표피가 저한테 잘 맞았던 것입니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인간실격(人間失格)》,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p. 60-61.
- 요조는 이 대목에서 세계를 두 부류로 나누고 있다. ① ‘합법의 세계’, 그리고 ② ‘비합법의 세계’. 전자는 소위 ‘양지’에 해당하고 후자는 ‘음지’에 해당한다 할 것인데, 그는 스스로를 ‘음지의 사람’으로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합법의 세계’는 요조의 반대에 있는 세계, 즉 그가 속하지 못하는 다수의 세계라 할 것이고(법률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다수에 의해 제정되므로) ‘비합법의 세계’는 요조와 같은 쪽에 있는 세계, 즉 그가 속하는 세계라고 정리할 수 있다.
- 요조는 ‘음지의 세계’에 속하는 사람들, 즉 다수로부터 환대받지 못하고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으며 퇴출이 논의되는 소위 ‘실격자(失格者)’들을 보면 ‘정다운 마음’을 느낀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정다운 마음’은 그가 목격하는 타인들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어서 요조는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마음”이었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실격자들과 함께 그 ‘다정한 마음’을 받는 대상에 자기 자신을 놓고 있는데, 이는 자신에 대한 대상화(Objectification)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정다운 마음은 ‘패자’, ‘악덕한 자’, ‘떳떳하지 못한 놈’을 대상으로 삼는 마음임에 다시 주목해보자. 자기 자신을 이러한 사람들과 같은 위치로 두는 요조는 이 술어들에 ‘비참한’, ‘범인(犯人, Criminal) 의식’, ‘통증’이라는 날카롭기 그지 없는(통찰력의 차원에서의 ‘날카로움’이 아닌, 힐난의 의미에서의 ‘날카로움’의 차원에서) 표현들을 결부시키면서도 비교적 담담하고 체념어린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 의의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말들을 쓰면서도 정작 자신은 멀쩡해보이는 이러한 태도는 스스로를 일시적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제3자로 격하시키는 유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 요조가 이 진술에서 자신을 대상화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다시 한 번 그의 진술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는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마음”을 느낀다고 쓰고 있다. 이는 요조가 자기 자신을 ‘연민’을 가장한 혐오의 대상으로 격하시키면서 그것으로부터 ‘황홀함’이라는, 그 행위의 잔인함과는 괴리된 감정을 가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황홀함은 그가 자기 자신을 죄(罪)를 저지른 범인(犯人)으로 생각하면서도 그것에 익숙해졌고 그 통증이 이제는 살아 있는 감정이나 사랑의 속삭임으로 여겨지기까지 하는 그의 병리적 상태를 적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 이러한 그의 상태는 그의 유년기 시절 다케이치에게 도깨비 그림과 지옥의 말을 그릴 것이라고 진술하면서 은밀히 꾀한 자기 희롱의 연장선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앞서 III.2.에서 진술한 것처럼 요조는 고통을 느끼는 대상 즉 자신이 이해할 수 없으며 답답함과 고립감을 느끼는 타자들 앞에 자신을 끊임없이 세우고, 그들과 상종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일종의 ‘차이와 고립으로부터 오는 쾌감’을 지속적으로 스스로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와 고립’이란 결과적으로는 요조 자신이 세계에 대한 부적응자, 즉 이방인(異邦人)이라는 정체성을 강화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으로, 표면적으로는 자신을 매도하는 행위 속에 숨겨진 일종의 분리적 정체감의 과시를 통해 최종 달성되는 것이다. 그가 ‘지하 운동 그룹’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잘 맞는다고 쓸 때, 그 문장 자체를 쓰인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는 대단히 어려워 보인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몰리에르(Molière)의 《인간 혐오자(Le Misanthrope)》의 주인공인 우울한 청년으로, 진정성과 솔직함을 추구해 시대의 악덕과 보편화된 사회적 위선을 맹렬하게 비판하는 인물이다.
- 2몰리에르(Molière)의, 《인간 혐오자(Le Misanthrope)》. 이경의 역, 지만지드라마.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