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35.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IV

탐서일지 #35.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IV

2026-03-07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Mili – Not My Paradiso

Lyrics of ‘Mili – Not My Paradiso’

You said, let there be light
Deleted all the good from the dark
Picked out the sweetest fruits from the tart
To make the good even better, you had to make the evil worse

Once again I am here at your mercy
Tell me, am I naive enough to be let in?
Greetings to your virgins
Talila Lulula
And now shall we begin?
Tulilula

Stripping down all the way to our bare skins
And dance with the blind in the barden of eden
Open one of the cages
Talila Lulula
Staining one of your angels a little bit black
Goodbye, don’t miss me too much

Michaela, Bezeliela
Maalika, Uriela, Samaela
Barachiela, Jegudiela
Daniela, Gabriela, Netzacha
Raphaela, Kasdeja
Yomiela, Ariela, Beburosa
Jophiela, Mastema, Zachariela

Oh
Back to square one
It’s all-or-none for your binary mind
I frowned at the name you labeled your trophy case

Please don’t call it heaven
If your doors aren’t open for the vast majority of your creations
Does my sincerity sound threatening?
Pierce me with your judgements
I have heared it a thousand times
My heart is too broken and my tear ducts too dry
To worship your paradise

Look
The fires are so pretty
As you burned me endlessly
Our love painfully everlasting

First, you hand picked a blob of meaty clay
You gave me some limbs
You gave me some brains, a pretty face
You told me to applaud
I said, “Shouganai”1しょうがない. “어쩔 수 없잖아”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It’s not my style”
And then you decieded I’m a dekisokonai2出来損ない. ‘실패작’, ‘불량품’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 사용하는 경우라면 순하게는 ‘못난이’지만, 심하게는 ‘등신’ 정도에도 해당할 수 있다. and sent me to Hell

Good people should recycle
Please let me be recycled
From hell to paradiso

“Let us go to heaven together”
“Here, take my hand”
Kisses felt so pleasant, I almost forgot the times
You said you’re sorry
That you can’t love me the way I am
So I wish you well

Hope you can enjoy your prefect heaven without me
‘Cause I know I’m deserving of what’s given to me at the beginning of life
Searching for my paradise
This is not my heaven
This is not my heaven
Someday in my absence you’ll finally realize
We were good enough for Paradise

I said let there be light
Returning all the good from the dark
Married the sweetest fruits to the tart
Let’s make the world balanced
You can love me then

이상의 곡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을 테마로 삼는 어느 비디오 게임의 오프닝 곡으로 발표되었다. 《신곡》의 가장 유명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Lasciate ogni speranza, voi ch’entrate (모든 희망을 버려라, 들어오는 그대들이여)”.

유다는 《신곡》의 제9지옥 코키토스(Cocytus), 가장 깊은 바닥 중에서도 최하단인 유데카(Judecca)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머리 세 개 달린 거대한 루시퍼의 입에 물려 씹히고 등 가죽이 발톱에 뜯기는 그는 다자이 오사무에게 《직소》에서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대표된다. “火と水と。永遠に解け合う事の無い宿命が、私とあいつとの間に在るのだ。 (저와 그 녀석 사이에는 불과 물처럼 영원히 융합할 수 없는 숙명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직소》에서 유다에게 두 가지 호칭으로 불린다. 한 때는 그 분으로 불렸다가, 다른 한 때는 그 놈 내지는 그 녀석으로 불린다. 상이한 두 가치평가를 내포하는 이 호명은 《인간실격》의 요조에게는 다음과 같은 원소(冤訴)다. “神に問う。無抵抗は罪なりや?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죄(罪). 죄란 무엇일까? 요조는 “罪。罪のアントニムは、何だろう。(죄, 죄의 반의어란 뭘까)”라 물었다. 열거된 모든 것들. 즉, 기도(祈)도, 회개(悔)도, 고백(告白)도. 이 모든 것들은 죄의 유의어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이란 말인가? 단테의 《신곡》, 그 가장 아래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유다, 그가 배반한 예수, 그를 조망한 다자이 오사무. 이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저것이란.

이 시점에서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분명 일종의 낙원(Paradiso)일 테다. 원인은 악의 문제(problem of evil)다. 고통에 대한 원인을 찾는 것, 탓할 대상을 찾는 것. 그것의 극단에 서 있을 때 우리는 보게 된다. 모든 선을 어둠으로부터 되돌리는 것(Returning all the good from the dark), 그것이야말로 다시 사랑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사실을.


나는 아름답고 우아한 그분한테서 돈 때문에 늘 경멸받았지.

다자이 오사무,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96.

I. 《직소》에서 유다가 예수에 대해 가지는 감정 · 인상들과 그렇게 생각한 이유

I.1. ‘아름다움(美)’에 대한 사랑

나는 천국을 믿지 않아. 하느님도 믿지 않아. 그분의 부활도 믿지 않아. 그 사람이 무슨 이스라엘의 왕이겠어. 바보 같은 제자들은 그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지.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인가 뭔가를 그 사람한테서 듣고는 한심스럽게도 환호작약하고 있어. 이제 곧 그들이 실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임받을 거라고 그분은 약속하셨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쉽게 됩니까?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야. 말하는 것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엉터리야. 나는 하나도 믿지 않아. 그렇지만 나는 그 사람의 아름다움만은 믿어. 그렇게 아름다운 분은 이 세상에 없어. 나는 그분의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어. 그뿐이라고. 나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아. 그 사람을 쫓아다니다가 마침내 천국이 가까워지면 멋들어지게 총리나 부 총리가 되어 보려는 그런 치사한 마음도 없어. 다만 그 사람을 떠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단지 그분 곁에 있으면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해.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분이 설교 따위는 그만두고 나하고 단둘이서 평생 오래오래 살았으면 싶은 거야. 아아,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는 지금 현재의, 이 현세의 기쁨만을 믿어. 다음 세상의 심판 따위 나는 전혀 두렵지 않아. 그분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나의 이 순수한 사랑을 왜 받아 주시지 않는 걸까?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직소(直訴)》,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p. 177-178.
  • 《직소》에서 유다의 예수에 대한 기술 태도는 양 상극을 급격하게 오가기에 상당히 혼란스럽다. 이러한 괴리된 두 태도를 유다의 정신적 혼란 내지는 분열의 증거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이러한 결과는 유다가 예수의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싶어진다.
  • 우선 유다가 예수에 대해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부분들을 살펴보자. 이러한 대목에서는 대체로 유다가 예수를 ‘그분’이라고 높여 호칭하면서 자신은 ‘그분’이 말하는 구원이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이라느니는 모두 믿지 않지만 오직 ‘그분’의 아름다움만큼은 믿는다고 진술하고 있다.
  • 유다는 자신이 예수를 따라다니는 이유를 ‘그분’의 아름다움을 지금 이 순간 곁에 두고 계속 지켜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는 “단지 그분 곁에 있으면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예수의 행동이 위험하거나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아름다움 때문에 딱히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일들을 뒤에서 뒷받침해주는 수고까지 다음에서 확인해볼 수 있는 것처럼 아끼지 않는다.

    바보 같은 녀석들. 그날그날의 빵도 못 구해서 내가 마련해 주지 않으면 모두 굶어 죽었을 게 뻔한데. 나는 그 사람이 설교를 하게 해 놓고는 군중한테서 슬그머니 연보(捐補)를 우려내고, 마을의 돈푼깨나 있는 집에서 공물을 징수하기도 하고, 잠자리부터 나날의 입을거리 먹을거리 마련까지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돌보아 주었는데도, 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바보 같은 제자들까지도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말 한마디 안 해.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그 사람은 내가 이렇게 남몰래 나날이 고생하는 걸 모르는 척하면서 언제나 분수에 안 맞는 사치스러운 얘기만 하고, 빵 다섯 쪽, 생선 두 마리 밖에 없을 때조차도 눈앞에 있는 대군중 모두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따위의 억지소리를 해서, 내가 뒤에서 정말이지 힘들게 이리저리 변통해서 간신히 그 음식을 그럭저럭 사 모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그 사람의 기적을 거들어 왔고 위태위태한 마술의 조수 노릇을 지금까지 수도 없이 해 왔단 말입니다. 이래 봬도 나는 결코 쩨쩨한 사나이가 아니야. 외려 취미가 여간 고상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나는 그분을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어린아이처럼 욕심이 없어서 내가 나날의 빵을 손에 넣기 위해 부지런히 모아 둔 돈을 한 푼도 남김없이 쓸데없는데 쓰게 만들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것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아름다운 사람이야. 저는 원래 쩨쩨한 장사꾼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영적인 사람을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제가 고생 고생해서 모아 놓은 잔돈푼을 아무리 어리석게 낭비해도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직소(直訴)》,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p. 173-174.
  • 그런데 유다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이 예수의 아름다움(美)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선 적어도 성경의 원문을 참고하지 않고 《직소》의 본문에 드러나는 내용만 토대로 파악해볼 때에는 다음과 같은 후보들을 추려볼 수 있다.
  • ① 욕심 없이 타인에게 베품: “어린아이처럼 욕심이 없어서 내가 나날의 빵을 손에 넣기 위해 부지런히 모아 둔 돈을 한 푼도 남김없이 쓸데없는데 쓰게 만들기는 하지만 말입니다.”3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74. … 이 대목 직후에 유다는 예수의 이런 ‘어린아이’ 같은 면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은 아름다운 사람이야.”라고 예수의 아름다움을 긍정하고 있다. 유다가 ‘쩨쩨한 장사꾼’, 즉 거래와 이익 관계, 물질 생활의 기본 문법인 인간의 욕심에 가장 가까운 인물임을 고려할 때 예수는 유다에게 있어 ‘욕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마치 어린아이처럼 ‘때묻지 않은’ 어떤 순백의 존재로 보였을 것으로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즉 이 대목 전후에 유다가 예수에 대해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는 무욕하는 존재로서의 예수에 대해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 ② 가면을 쓰고 선지자를 뻔뻔하게 연기함: 이를테면 “자기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임받을 거라고 그분은 약속하셨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쉽게 됩니까?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야.”4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77.부터 “저분은 쓸쓸하신 거야. 지금 극도로 마음이 약해져서 무지하고 사리에 어둡고 고루한 제자들한테라도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되신 게 틀림없어. 가엾게도. 저분은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계신 거다.”5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89.에 이르기까지의 진술을 보면 유다는 예수가 말하는 부활이니 이스라엘국의 건립 등은 모두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허풍이자 자기 자신의 쓸쓸함이나 공허함을 숨기기 위한 기만술로 보고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는 《인간실격》의 화자 요조가 말하는 ‘필사적인 익살 서비스’와 비슷한 성격으로서, 자기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쓰고 특정한 모습을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는 이러한 모습에 대해 “나는 하나도 믿지 않아. 그렇지만 나는 그 사람의 아름다움만은 믿어.”6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77.라거나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동안 저는 갑자기 오열이 강렬하게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그분을 끌어안고 함께 울고 싶어졌습니다.”7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89.라는 동경과 공감을 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예수에 대한 그의 사랑은 이러한 ‘연기’에 대한 찬미의 성격 역시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I.2. 현계초월(現界超越)의 우상(偶像)으로서의 예수

  • I.1.에서 진술된 아름다움온전한 예수를 대표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그 ‘아름다움(美)’는 예수의 여러 측면 중 상술된 ① 욕심 없이 타인에게 베품, ② 가면을 쓰고 선지자를 뻔뻔하게 연기함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만 한정된다. 이 두 측면을 벗어나는 모습에 대해 유다는 격렬하게 반발하며, 이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서 최후에는 예수를 향한 ‘그분’이라는 호칭이 ‘그놈’으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 이를 증명하기 위해 《직소》에서 유다가 진술하는 인간 예수에게서 관찰된 다음과 같은 모습들을 검토해보자. 물론 작품 중 등장하는 예수의 모습이 어디까지나 유다를 통해 지각된만큼 중립성에 문제가 있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는 어떤 인물인가’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에게 있어 예수는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분석하고 있으므로 그 과정에서 유다의 진술에만 의존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며 오히려 유일한 방법이라 할 것이다.
  • ① 여성에게 성욕을 느끼는 예수:우선 《직소》에서 유다가 그를 첫번째로 ‘용서할 수 없다’고 진술하는 다음의 대목부터 보자.

    그분이 베다니의 시몬네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실 때 그 마을에 사는 마르다 년의 여동생 마리아가 향유를 가득 채운 석고 항아리를 들고 향연이 벌어지고 있는 방으로 살그머니 들어오더니, 갑자기 그 기름을 그분 머리에 좍 부어서 발까지 적시고 말았습니다. 그래 놓고도 그 무례함을 사죄하기는커녕 침착하게 쭈그리고 앉아서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젖은 양쪽 발을 정중하게 닦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향유 냄새가 온 방에 가득 차면서 정말이지 괴상한 광경이 벌어졌기에 저는 화가 나서 “무례한 짓을 하지 마라!” 하고 그 여동생 년한테 소리쳤지요. “이봐, 이렇게 옷이 젖으셨잖아. 게다가 이렇게 비싼 기름을 쏟아붓다니 아깝지도 않아? 넌 얼마나 바보 같은 년이냐. 이 정도 기름이면 300데나리온은 충분히 나가겠다. 이 기름을 팔아서 300데나리온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면 그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하겠나. 그런데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면 곤란하지.”라고 실컷 야단쳐 줬지요. 그러자 그분은 저를 똑바로 쳐다보시고는 “이 여인을 나무라지 마라. 이 여인은 내게 대단히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에게 돈을 베푸는 일은 이제부터 너희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나는 이제 베풀 수가 없느니라. 그 이유는 말하지 않겠다. 이 여인만은 알고 있다. 이 여인이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식을 준비해 주었느니라. 너희들도 기억해 두어라. 전 세계 어느 곳이건 나의 짧은 생애가 전해지는 곳에서는 반드시 이 여인이 오늘 한 일도 함께 전해지리라.” 하고 말씀하셨지요. 말씀을 마치셨을 때 그분의 창백한 볼은 약간 상기되어 발그스레해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과장된 연극이려니 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들을 수도 있었습니다만 그때 그분의 목소리에, 또 그분의 눈동자에 일찍이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상한 것이 느껴져서 순간 저는 당혹했고, 그분의 살짝 붉어진 볼과 눈물이 촉촉하게 고인 눈동자를 곰곰이 다시 보다가 문득 마음에 짚이는 바가 있었습니다. 아아, 재수 없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원통합니다. 그분이 이런 가난한 농사꾼 여자한테, 설마 그런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그렇지만 위험하게도 사랑 비슷한 묘한 감정을 품고 계시는 건 아닐까? 저 정도 되시는 분이 저런 무식한 촌년 따위한테 조금이라도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면 그 무슨 추태람? 돌이킬 수 없는 대추문. 저는 남의 치욕이 될 만한 감정을 냄새맡는 데는 태어나면서부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 자신은 그것을 천한 후각이라고 생각해서 싫어합니다만, 힐끗 한번 쳐다보기만 해도 남의 약점을 영락없이 간파해 버리는 예민한 재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희미하게라도 그 무식한 촌년한테 특별한 감정을 느끼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내 눈은 확실하거든. 분명히 그래. 아아, 참을 수 없어. 용서 못 해. 저는 이 지경이라면 그분도 이젠 다 글렀다고 생각했습니다. 추태의 극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까지 그분은 여자들이 아무리 사모해도 늘 아름다웠고 물처럼 고요했어. 티끌만큼도 흐트러지는 일이 없었지. 하지만 이제는 다 된 거야. 칠칠치 못하기는.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직소(直訴)》,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p. 178-180.
  • 이상의 대목에서 유다가 예수에 대해 실망하거나 참을 수 없다고 진술하는 그의 모습은 “희미하게라도 그 무식한 촌년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신 것”을 향하고 있음에 주목해보자. 유다는 “이때까지 그분은 여자들이 아무리 사모해도 늘 아름다웠고 물처럼 고요했어. 티끌만큼도 흐트러지는 일이 없었지.”라고 진술하면서 그 반대급부로서 벌어진 향유를 부은 마리아에 대해 예수가 보인 태도가 욕정으로 보이자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앞서 유다가 예수로부터 사랑한 ‘그분’의 아름다움의 제1측면: ① 욕심 없이 타인에게 베품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모습이다. 유다의 반발은 예수가 마리아가 자신에게 향유를 부은 것을 옹호했다는 그 행위 자체에 있지 않고, 그 행위 자체에 성욕이라는 이기적인 동기가 개입되었다는 점을 향한다.
  • ②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내보여버린, 가면이 깨진 예수: 다음으로는 그 유명한 ‘예수의 성전 정화 일화’를 묘사한 다음과 같은 《직소》의 대목을 보자.

    성전에 들어간 뒤 그분은 당나귀에서 내리시더니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새끼줄을 주우시고는 그것을 휘둘러서 성전 경내에 있는 환전하는 자의 가판과 비둘기 파는 자의 의자 따위를 쳐서 쓰러뜨렸습니다. 또 매물로 나와 있던 소, 양들도 그 새끼줄 회초리로 전부 성전에서 내쫓고는, 경내에 있는 수많은 상인들을 향해 “너희들 전부 여기서 썩 나가. 나의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어서는 안 돼.”라고 새된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저 온화한 분이 술주정뱅이처럼 이런 시시한 난동을 부리다니, 아무래도 약간 돌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하고 그분에게 묻자 그분은 숨을 헐떡이면서 대답하시기를 “너희들은 이 성전을 부숴 버려라. 내가 삼 일 안에 다시 세우리라.”라고 하셔서, 아무리 우직한 제자들이지만 너무나 분별없는 그 말씀을 차마 좇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알고 있었죠. 필경 그분의 어린애 같은 허세임이 틀림없다. 그분은 신앙인지 뭔지를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없다는 기개를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새끼줄 회초리를 휘둘러서 무력한 장사치를 쫓아내다니, 참 얼마나 시답잖은 허세인가요. 나는 연민의 미소를 띠고 당신이 할 수 있는 반항이라는 게 기껏해야 이런 겁니까, 비둘기 파는 사람의 의자를 걷어차는 일 정도입니까 하고 물어보고 싶기까지 했습니다. 이제 이분은 틀린 겁니다. 자포자기한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힘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그즈음 슬슬 깨닫기 시작해서, 허점이 드러나기 전에 일부러 제사장이 자신을 체포하게 만들어서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어진 것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자 그분을 확실하게 단념할 수 있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직소(直訴)》,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p. 185-186.
  • 있었던 일에 대한 진술이 실제 성경과는 일치하는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유다가 예수의 그러한 행위에 대한 동기를 “이제는 자기 힘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그즈음 슬슬 깨닫기 시작해서, 허점이 드러나기 전에 일부러 제사장이 자신을 체포하게 만들어서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어진 것이겠지요.”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물론 예수가 성전에서 내쫓은 인물들이 유다의 직업과 같은 상인들이었다는 점이 마치 예수가 유다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느껴졌을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도 있겠지만, 이 대목에서의 실망의 주 대상은 과시 자체의 지나치게 시시할 정도로의 작은 규모 혹은 과시 대상의 초라함을 향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초라함은 이전의 ‘약속된 땅’이라던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준 아주 큰 규모의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로서의 예수와는 반대되는 모습이다.
  • 초라함 뿐만이 아닌 예수의 행위 자체가 그의 가면을 깨뜨리고 그의 공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보이고 있다고 유다가 평가한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유다는 예수가 ‘성전 정화’ 중에서 말한 저주들을 “죽고 싶어 좀이 쑤시나보군.”이라고 평가했다. 하긴 어떤 사람이 다른 종교의 성전에 나타나서는 그곳에 있는 상인들을 내쫓고는 너희들은 위선자니,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구제불능의 존재이니, 기근이나 지진이 있을 것이라니, 이 땅은 저주받아 죽음이 가득할 것이니와 같은 소리들을 퍼붓는다고 하면 이것은 정상적이거나 섬뜩한 예언이라고 지각되기 이전에 우선 체제의 위협분자 혹은 광인으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위험한 행동이 아니던가. 유다에게 있어 예수의 행위는 그가 자신이 연기하던 ‘예언자’ 내지는 ‘구세주’의 배역을 배반한 것이다.
  • 이상과 같은 모습들은 유다가 예수로부터 사랑한 ‘그분’의 아름다움의 제2측면: ② 가면을 쓰고 선지자를 뻔뻔하게 연기함과 제대로 배치(背馳)된다. 이 장면에서 보여진 예수의 모습은 ‘유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공포에 떨며 스스로의 유약함에 질려버린 한 명의 인간과 다를 바 없으며, 이러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유다는 예수의 이 측면을 경멸하는 것을 넘어 그러한 예수를 떠받들어 온 자기 자신마저 공격해버리기에 이른다.

II. 《직소》에서 묘사되는 유다 · 예수의 성격 · 특징과 전통 기독교의 묘사와의 비교

II.1. 유다의 ‘배반의 동기’에 대한 조명

  • 전통 기독교는 유다의 배신 즉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긴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성경은 유다가 상인 계급 출신이며, 예수의 열두 제자로 받아들여졌다고 이전 배경을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에 유다의 배신 장면과 그 이후의 최후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하게 다음과 같이 〈마태복음〉, 〈요한복음〉, 〈누가복음〉에 이르기까지 여러 경전에 걸쳐 기술하기에 이르고 있다.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 대해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가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26:14-25.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요한복음 13:21-30.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18.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누가복음 22:1-6.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18.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누가복음 22:19-23.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18.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마태복음 26:47-50.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그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니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한복음 18:1-11.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18.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누가복음 22:47-51.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18.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지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마태복음 27:3-8.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18.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문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사도행전 1:15-20.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18.
  • 즉 전통 기독교에서는 유다를 배신자로서 기술하는데 초점을 두기에8애시당초 기독교 문화에서는 아이의 이름을 ‘유다’라고 짓는 것 자체를 기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실제로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아이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극심한 죄인으로 유다를 여기기에 성인으로 분류되어 축일까지 가지는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단독으로 저주와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단테의 그 유명한 《신곡》에서 아래와 같이 지옥 최하층의 루시퍼의 입에 유다를 물려놓았을 정도이니까…….
    「루키페르의 얼굴에 있는 여섯 개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이것이 세 개의 턱 위에 피 섞인 침과 눈물로 고드름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 단테는 루키페르의 열린 아가리가 하나씩 모두 세 죄인을 이빨로 물어뜯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광경은 마치 삼나무를 찢어 실을 뽑아내는 것처럼 물고 있는 죄인을 가닥가닥 발기고 있는 듯했다. / 아처럼 루키페르의 아가리에 물린 세 놈은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요동을 치고 있었는데, 그 등껍질마저 홀랑 벗겨져 있었다. / 그 모습을 보고 베르길리우스가 단테에게 설명해주었다. / “저기 저 위에서 가장 큰 벌을 받고 있는 망령은 유다다. 그의 대가리는 안으로, 다리는 밖으로 삐져나와 있지 않은가. […]”」 ―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김영진 역, 자화상, 2024. p. 140.
    유다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조명하지 않는다. 그런데 다자이 오사무의 《직소》의 경우 전통적 기독교에서는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유다의 인물적 됨됨이나 배경, 심리적 상태에 주목하여 성서의 ‘공백’을 채우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 대단히 특징적이다.
  • 《직소》에서는 유다를 단순한 배반자 혹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실한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탄을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일 가정, 즉 “유다가 예수를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를 배반했다”는 가정을 과감하게 도입하기에 이른다. 그에게 사탄이 들어갔다느니와 같은 식으로 유다 자체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 성경과는 달리 《직소》에서는 유다라는 기록 속 인물에 대한 이해를 상상을 매개로 하여 시도해보고 있는 것이다.

II.2. ‘메시아(Messias)’가 아닌 왜소화된 존재로서의 예수

  • 전통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예수를 온 인류의 죄를 십자가를 통해 지고 죽은 구세주이자 하느님의 아들로 본다. 물론 조금 더 복잡하게 들어가면 예수가 기독교의 그 유명한 삼위(三位): ① 성부(聖父, The Holy Father)9기독교에서 “존재의 근원”에 해당하는 ‘하느님’의 한 상태. 구약에서 “태초에 하느님이 하늘과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고 할 때 여기서 창조의 주체가 되는 ‘하느님’이 성부(聖父)에 해당한다., ② 성자(聖子, The Holy Son)10기독교에서 “인간화된, 보이게 된 형태”에 해당하는 ‘하느님’의 한 상태. 예수 그리스도가 대표적인 성자(聖子)로,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서의 성자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의 모습을 인간에게 드러내고 그 자신의 말씀과 질서, 계시와 구원을 직접 전달하기 위해 인간의 형태로 현현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물론 ‘성자’는 ‘인간에게 보이게 된 형태의 하느님’이므로, 사물 안에 담겨 있는 의미 또한 모든 세계의 사물은 하느님이 그 의지를 담아 창조한 것이라는 점에서 착안하여 성자로도 취급된다., ③ 성령(聖靈, The Holy Spirit)11기독교에서 “힘, 작용, 방식”에 해당하는 ‘하느님’의 한 상태. 단순하게는 ‘사랑’이 곧 성령(聖靈)에 해당하며, 각 신자들에게 깃들거나 그들을 보조하여 신자들의 신앙을 공고히 하고 미덕을 가르치며 회개하는 것을 돕거나 감동 · 깨달음 등을 주는 어떠한 힘 혹은 동인으로 묘사되거나 이해되고 있다.가 모두 하나라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에 따라 하느님 그 자체이자 그 하느님의 현현이기도 하고 그 하느님의 정신 혹은 힘으로 취급되기까지 한다.
  • 전통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그 어떠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타인에게 온정을 베풀 것을 가르쳤다는 점을 대단히 많이 강조한다. 즉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사랑’이라고 할 정도로 예수의 복음주의적 성격을 대단히 강조한다. ‘보상을 받을 수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상대를 사랑할 것, 그리하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로 이어지는 예수의 말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또다시 부활한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
  • 성경에서는 예수가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로 묘사되었다는 점도 특기되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직소》에서도 등장하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즉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이 넘는 이들을 배불리 먹였다는 내용이라던가, 맹인부터 중풍병자, 몸을 쓰지 못하는 지체 장애인 그리고 나병 환자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했다던가, 물 위를 걷거나 폭풍을 잠잠케 한다거나, 야이로의 딸 혹은 그 유명한 나사로에 이르기까지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킨다거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기 자신이 부활해서 돌아온다거나 하는 불가사의하지만 신성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고 또 그렇게 믿어진다.
  • 그런데 《직소》의 경우는 이 기독교에서 묘사하는, 곧 하느님이나 다름없는 예수에 대해 신성모독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그를 철저히 세속화 내지는 인간화시킨 묘사를 채택하고 있다. 우선 대표적으로 기록된 여러 기적, 즉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대해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나듯 예수의 열두 제자 중 금전적 업무를 담당했던 유다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의 장사 수완을 동원해 겨우 여러 번 이루어냈다는 설정이 붙었다.
  • 여기에 더해 《직소》에서는 생존에 대해서는 유다에게 철저하게 의존하는 예수와 다른 제자들의 의존적이고 유약한 모습을 유다의 눈을 통해 그려내고 있기까지 하다. 전통 기독교에서 유다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성인으로 추앙받아 축일을 가지고 기념 의식까지 가지며, 그 성인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내려주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기까지 하는데, 이들을 생산적인 활동은 하나도 하지도 못하면서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한 부류로 묘사하는 장면은 정통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직소》의 신성모독적 성격은 예수를 철저히 현계(現界), 즉 욕망과 공포가 지배하는 세계 속의 존재로 설정했다는 점에 있다. 상술하였듯 《직소》 속에서 예수는 유다의 서술을 통해 현계 너머의 질서 혹은 세계에 대한 ‘허황된 이야기’를 펼치면서 추종자들을 모으면서도 동시에 아리따운 여성을 보고 혹하거나 자신이 벌인 판의 거대함에 막막함 혹은 유약함을 느끼고는 자포자기하려 하거나 상인들과 성전 근방의 사람들에게 무지막지한 저주를 무차별적으로 퍼붓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인물에 대한 소묘는 예수를 ‘인간화’했다는 점에서 보다 친숙함에 가까운 신선함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전통 기독교에서의 묘사와 비교해볼 때는 이 ‘인간화’란 예수로부터의 ‘성자’적 성격의 제거라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 즉 《직소》에서의 예수는 신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흔히 말하는 기독교 혹은 이분법적 세계관에서의 ‘육체의 세계’, ‘물질의 세계’, ‘현계(現界)’의 존재로 추락하고 있다. 《직소》에서 예수는 더 이상 하느님의 아들도 아니고, 위대한 선지자도 아니다. 그는 단지 위대한 허풍선이이자 익살꾼이고, 거대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연기하는 배우이며, 그 거짓말을 들킬까 전전긍긍하면서 외로워하고 두려움에 떠는 한 명의 인간이다.

III. 《인간실격》과 《직소》로부터 유추 가능한 다자이 오사무의 기독교 이해와 ‘죄’

III.1. 다자이 오사무의 기독교 이해

  • 우선 《인간실격》과 《직소》의 저자 다자이 오사무가 기독교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졌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우리 책의 역자가 해설에서 지적하고 있듯 《직소》는 그가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했던 작품 활동의 중기 시절 그의 부인이었던 미치코 부인에게 술잔을 기울이면서 구술하여 단숨에 완성시켰음에도, 나중에 성경과 대조하여 확인했을수도 있지만 마태복음에서만 열여덟 군데의 대목들이 인용되고 있다는 점이 하나의 증거가 된다.12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227.
  • 다자이가 기독교의 ‘복음주의적 성격’을 믿지 않는다는 점은 《인간실격》의 요조에게서 매우 명확하게 드러나고, 《직소》에서 선택된 예수의 기술에 의해 보충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인간실격》에 대해 말하자면, 이 책의 역자를 포함한 적지 않은 선행 연구들이 《인간실격》을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혹은 투영적 작품으로 지나치게 해석하는 것을 경계해야 함을 지적하기는 했으나 적어도 기독교에 대한 태도만큼은 다자이가 전혀 가장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다자이의 기독교의 이해를 짐작하는데 있어 주요하게 참고해볼 수 있다.

저는 하느님조차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하느님의 벌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인간실격(人間失格)》,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09.
  • 물론 이상의 대목을 다자이가 정말로 ‘벌만을 믿었다’거나 ‘천국을 거부하고 지옥만을 믿었다’는 증거로 간주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이지만, 적어도 다자이가 기독교 이해에 있어서 전통 기독교에서 강조되는 ‘사랑’ 즉 ‘예수의 복음주의적 성격’과는 다른 관점에서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읽었음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그가 정말로 복음주의적 성격을 받아들였다면, 즉 조건 없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 온정을 나누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면 이러한 관점은 작품에 들어가기 대단히 어렵지 않았겠는가?
  • 《직소》에서 이러한 관점이 보충되는 이유는 다자이가 예수를 왜소화하여 기술했다는 점에 있다. II.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다자이는 예수를 성경이나 전통 기독교에서 묘사하는 성자(聖子)의 관점 대신 ‘육체의 세계’의 법칙 즉 욕망과 두려움에 휘둘리는 유약한 존재로 그려내고 있다. 이는 우리 책의 역자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 중 가장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에 주목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유다에게 주목한 것13Ibid.과 함께 생각해보면 다자이가 기독교를 수용함에 있어 “개인사적 차원(용서가 베재된 배반과 속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또 다른 증거로 충분히 채택할 수 있다.
  • 그러나 역자가 “다자이는 「인간 실격」에서 그려 낸 순수하고 무구하며 이기주의라든가 타산과는 무관한 아름다운 존재에 대한 동경을 예수라는 천상의 존재로 형상화하고, 애증에 결박된 유다를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약점을 지닌 지상의 불쌍한 존재로 그려 내고 있다.”14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228.고 뒤이은 점은 《직소》가 전통 기독교적 인물 묘사에 대해 가지는 대비점을 모두 온전히 포착했다고 하기에는 어렵다. 다자이 오사무에게 있어 기독교가 무엇이었느냐를 제대로 해명하기 위해서는 유다를 단순히 ‘인간적인 약점을 가진 지상의 불쌍한 존재’로 요약할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수의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경멸했는지를 토대로 그가 추구한 ‘이상’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 II.에서 기술한 것처럼 《직소》의 유다는 예수를 일종의 ‘순수함’ 혹은 ‘아름다움’, 또는 ‘초월’의 우상으로 파악하고 있고, 오직 그 모습의 예수만을 선택적으로 사랑하고 있다. 이는 “이기주의라든가 타산과는 무관한 아름다운 존재에 대한 동경을 예수라는 천상의 존재로 형상화하고”라는 평가와 일치한다. 그러나 예수에 대해 유다가 가지는 태도는 단순한 애증의 관계가 아니다. 애증이라는 감정이 유의미하게 해석되기 위해서는 그 감정이 향하는 대상이 동일해야 하는데, II.에서 이미 애증을 이루는 양가적 감정 ― 즉 사랑(愛)과 증오(憎)가 향하는 대상은 예수의 상이한 면들이기 때문이다.
  • 유다는 오직 예수의 “이기주의라든가 타산과는 무관한 아름다운 존재”로의 모습을 동경하고 사랑하며, 그렇지 못한 다른 모습들은 모두 경멸하거나 거부해버린다. 이는 단순히 순수함을 동경하지만 현계에 묶여 있기에 그럴 수 없음에 대한 비탄 혹은 절망감, 즉 역자의 평가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지닐 수밖에 없는 이기주의와 한계를 직시한” 것과는 다른 차원의 가치 평가를 내포하고 있다. ‘한계를 직시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그 동경과 더불어 동시에 그 동경과 반대되는 이해타산의 세계가 있다는 것, 즉 인간은 이상과 현실이라는 두 세계 모두에 발을 걸친 존재라는 점에 대해서 모조리 긍정하는 때에야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런데 《직소》의 유다와 《인간실격》의 요조는 오직 이상(또는 초월)이라는 한 세계만을 긍정하고 다른 하나, 즉 현실이라는 세계는 부정하거나 폄하해버린다. 《직소》의 유다에게 이것은 ‘우상으로서의 예수’에 합치되지 않는 예수에 대한 혐오와 복수심으로, 《인간실격》의 요조에게 이것은 주로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공포심, 나아가서는 순진한 신뢰 때문에 겁탈당한 요시코가 그에게 고뇌의 씨앗으로 자리잡은 것으로써 나타난다.
  • 이러한 《인간실격》과 《직소》의 등장인물들이 취하는 세계관은 지난 번에 읽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프리드리히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생각나게 한다. 쿤데라는 소설의 장 제목을 통해 서양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오랫동안 대립된 두 세계의 구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① 가벼움과 무거움, ② 영혼과 육체. 이 체코의 소설가는 영혼과 육체 중 무엇이 가볍고, 무엇이 무거운지를 질문하면서 니체를 호출했다. 니체는 “영혼이야말로 가볍고(진지하지 못하다, 실재하지 않는다, 거짓되다) 육체야말로 무겁다(진지하다, 실재한다, 참되다)”고 말했다. 이는 정확히 《인간실격》의 요조 및 《직소》의 유다의 대답과는 반대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 두 인물이라면 분명히 “육체야말로 가볍고 영혼이야말로 무겁다”고 말했을 것이니까.
  • “육체는 가볍고 영혼은 무겁다.”는 가치 평가는 기독교의 오래된 가치 평가라는 점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생성과 소멸, 즉 태어남과 죽음으로 가득한 우리의 물질 세계는 우리의 정신을 고정하여 의지할 만한 그 무엇이 없기에 자연히 그 너머의 항상적인 무엇, 즉 피안을 상정하도록 했으며, 이러한 사고 회로는 기독교를 하나의 상징으로 하여 서양철학의 계보를 따라 쭉 이어져 내려왔다. 다자이의 작품에서 이러한 세계관이 동등하게 발견되는 것은 다자이가 기독교를 역자의 해석처럼 “어디까지나 복음을 베재한 인간 중심적인 것”15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p. 228-229.으로 이해한 것을 넘어, 그 기독교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최소한 기호로서 수용했거나, 평소 자신의 세계관에 대한 적절한 우상 내지는 상징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을 예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 즉 다자이는 기독교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차원에서 수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첫째. 역자가 지적한 것처럼 복음주의적 성격이 배제된 배반 · 속죄라는 개인사적 차원에서의 수용. 둘째, 거부되거나 거짓된 것으로서의 육체(물질)적 세계와 승인 · 동경의 대상이자 참된 것으로서의 영혼(초월)적 세계라는 이분법적 세계 구도 차원에서의 수용.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고 싶은데, 이 후자야말로 다자이에게 있어 ‘죄’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밝히는데 있어 핵심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III.2. 다자이 오사무의 ‘죄(罪)’ 이해

  • 《인간실격》의 요조와 《직소》의 유다가 가지는 공통점,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다자이의 수용에 대한 상기의 이해는 다자이가 가지는 죄(罪)에 대한 이해란 요조에 대한 나의 입장과 동일하게 상환 불가능한 부채 개념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 《인간실격》에 등장하는 요조가 죄(罪)를 ‘상환 불가능한 부채’라고 생각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독서 노트를 통해 충분히 소명하였으므로 넘어가기로 하고, 여기서는 나머지 두 가지 요소, 즉 《직소》의 유다와 기독교에 대한 다자이의 수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 《직소》의 유다에게 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인간실격》의 요조와 마찬가지로 이 인물이 세계를 어떻게 나누고 지각하는지다. 지난 독서 노트에서 요조의 특징으로 열거한 다음의 두 가지는 유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① 세계 · 타자의 위선적 · 이중적 모습에 대해 염증을 느끼면서도, 그 세계에 섞여들어가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공격하고 있음; ② 세계와 자신 사이의 괴리감을 자신의 정체성 강화에 역이용하고 있으며, 이 유리감을 자신의 존재의 준거로 삼고 겉으로는 자신을 낮추고 매도하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상승을 기도하고 있음.
  • ① 세계 · 타자의 위선적 · 이중적 모습에 대해 염증을 느끼면서도, 그 세계에 섞여들어가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공격하고 있음: 《직소》에서 유다는 예수의 ‘순수하지 못한 모습’, 즉 육체적 세계의 법칙에 해당하는 욕망이나 그 육체적 세계 너머의 어떤 피안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세계의 공포나 감정에 휘둘리는 것에 대해 염증을 느낀다. 이는 《직소》에서 묘사된 예수가 유다가 동경하는 ‘초월적 모습’과 ‘비초월적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중적 존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인간실격》의 요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세계 · 타자의 위선적 · 이중적 모습에 대해 염증을 느낀다는 평가를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한편 유다는 예수를 동경하면서도, 예수가 유다 자신은 상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헌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목격하다가 마침내는 결국 자기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는 낙인까지 찍자 그를 배반한다고 《직소》가 기술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되어야 한다. 이는 유다가 자기 자신의 태생에 의해 동경의 대상인 예수에게 원래부터 거부되고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인간실격》의 경우는 ‘순수 세계’에 속하는 자가 ‘현실 세계’에 섞여 들어가기를 바라지만 《직소》의 경우는 이와는 반대로 ‘현실 세계’에 속하는 자가 ‘순수 세계’에 섞여 들어간다는 점에서 반대가 아니냐는 비판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직소》에서 예수는 어디까지나 유다의 시각에서 조명되었을 때 ‘순수 세계’에 해당한다. 작품 내 기술에서 유다의 평가를 제거하는 경우 예수는 어디까지나 ‘현실 세계’에 휘둘리는 인물이며, 유다가 견딜 수 없는 것은 ‘순수 세계’에 있어야 하는 그의 우상으로서의 예수가 ‘현실 세계’로 추락하는 장면이다. 그러므로 《인간실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직소》의 유다도 ‘순수 세계’를 꿈꾸고 동경하는 인물로서 처음부터 출발하는 것이며, 둘 모두는 ‘현실 세계’와 ‘순수 세계’의 모순 속에서 갈등하다가 파멸을 맞는 것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 ② 세계와 자신 사이의 괴리감을 자신의 정체성 강화에 역이용하고 있으며, 이 유리감을 자신의 존재의 준거로 삼고 겉으로는 자신을 낮추고 매도하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상승을 기도하고 있음: 이 점은 《직소》의 유다에게 있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유다의 서술은 큰 틀에서 볼 때 그가 왜 예수를 배반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한 편의 거대한 설명서 혹은 자기합리화의 기록으로 보인다. 즉 전반적인 《직소》의 내용은 유다라는 인물에 대해 예수에 대한 인신매매라는 범죄를 저지른 동기가 기록된 피의자 신문조서처럼 느껴진다. 반복적으로 유다는 예수가 ‘장사치’라는 이유로 자기 자신을 승인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자신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가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말한 예수에 대한 증오심을 ‘자신이 동경한 예수의 순수한 모습’과 ‘그렇지 못한 예수의 모습’을 모두 목도한 자신이 느끼는 괴리감을 강화 준거로 삼아서 자신은 마땅히 예수를 팔아 넘겨 죽여버려야 한다고 합리화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유다는 “꽃은 시들기 전까지가 꽃인 것이다. 아름다울 때 잘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예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순수함’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그의 쇠퇴가 더 진행되기 이전에 그를 팔아 넘겨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까지 하지 않던가. 즉 《직소》에서 유다는 자기 자신을 ‘돈밖에 모르는 장사치’로, 그가 동경하는 것과 반대편에 있는, 그가 경멸하는 모습으로 격하시킴으로써 그 자신을 동경하는 ‘순수함’을 위해 희생하는 순교자로서의 정체성 강화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인간실격》에서의 요조가 자신을 규정짓는 방식과 동일하다.
  • 상기에서 살펴본 《인간실격》과 《직소》의 등장인물의 특징은 기독교의 이분법적 세계관에 대한 다자이의 수용 때문에 ‘죄’에 대한 개념이 ‘상환 불가능한 부채’로 그에게 간주되었을 가능성을 지지하게 된다. 두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모두 이분화된 세계, 그것도 자신이 속한 물질 · 욕망 · 육체의 세계를 부정적으로 보고 ‘그 너머의’ 정신 · 영원 · 영혼의 세계를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면서, 육체의 세계 너머의 영혼의 세계를 간절히 갈구하는 태도를 동일하게 가진다. 그런데 이는 육체의 세계에 묶인 인간에게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영원 · 영혼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유일하게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것이란 그의 육체가 있는 바로 이 세계, 다자이의 작품에서 인물들이 혐오하거나 언제나 거부하는 바로 그 세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자이의 인물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고, 바로 이 영원히 불가능한 도약 내지는 전이 때문에 요조와 유다는 모두 고통받고 있다. 이 고통은 모두 공통적으로 결과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힐난으로 이어져서 요조의 경우는 자신을 인간실격자로 매도하는 것으로, 유다의 경우는 자신을 수전노이자 장사치로 매도하는 결말로 매듭지어지고 있다. 이는 정확히 니체가 지적했던 ‘마조히즘’으로서의 ‘죄의식’ 형성의 기작에 해당한다. 즉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다자이의 둘 이상의 작품에서 모두 ‘상환 불가능한 부채’로서, 좀 더 정확히는 ‘상환이 불가능하기에 방향을 돌려 자기 자신을 공격함으로써 발현’하는 ‘죄의식’이다. 둘 이상의 작품에서 이 같은 인식이 공통되는 이상 다자이 오사무가 생각했던 ‘죄’ 혹은 ‘죄의식’도 이러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러한 분석에는 요조와 유다가 그러할 것처럼 다자이 자신이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 보이지만, 그가 실제로 이를 인식했는지와는 별개로 그가 창조한 인물과 별개의 인식을 두 작품의 공통된 작가가 가졌을 가능성은 낮지 않을까 싶다.

IV. 나에게 있어서 ‘죄(罪)’와 그 반의어

결과적으로 나에게 있어서 ‘죄(罪)’의 의미란 요조와 다자이에게 있어 정의한 것과 동일하게, 상환 불가능한 부채다. 보다 정확하게는 앞서 여러 번 표현한 것처럼 원래부터 상환 불가능한 조건(생성/소멸하는 육체의 세계가 유일하고 또한 진실된 세계임에도 이를 견디지 못하고 영원한 세계를 참된 것이라고 덥석 믿어버리고 그곳으로의 전이를 당위로 여기는 것) 때문에 그 괴리에서 고통이 발생하고, 그 고통을 참다 못해 스스로를 공격해버리는 것으로서 발생하는 감각 혹은 자기-공격의 통증이 죄(罪)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 ‘죄(罪)’의 반의어는 이러한 육체/정신의 세계에 대한 전통적 가치 평가에 대한 전도다. 죄는 “육체는 가볍고, 영혼은 무겁다”는 평가와 항상 짝지어지는 것으로, 그 반대 명제인 “영혼은 무겁고 육체는 가볍다”와는 공존할 수 없다. 영혼의 세계가 의미의 부재를 견딜 수 없는 인간이 날조한 거짓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세계임을 인식하는 인간은 육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생성 · 소멸의 모습을 더 이상 더럽거나 불결한 그 무엇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게 된다. 그것은 오히려 다원적인 세계, 다채로운 색상으로 칠해지는 캔버스와 유사해 보인다. 이러한 세계관 혹은 가치관의 전도에서 자신을 짓누르던 저 죄의 정체란 자기 스스로가 행하는 학대였음을 깨달은 인간은 그 학대 행위를 중단하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러하므로 가치의 전도야 말로 ‘죄(罪)’의 반의어이며, 실존주의가, 아니 어쩌면 인문학이 도달해야 하는 단 하나의 임계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しょうがない. “어쩔 수 없잖아”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
  • 2
    出来損ない. ‘실패작’, ‘불량품’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 사용하는 경우라면 순하게는 ‘못난이’지만, 심하게는 ‘등신’ 정도에도 해당할 수 있다. ↩︎
  • 3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74. ↩︎
  • 4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77. ↩︎
  • 5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89. ↩︎
  • 6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77. ↩︎
  • 7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189. ↩︎
  • 8
    애시당초 기독교 문화에서는 아이의 이름을 ‘유다’라고 짓는 것 자체를 기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실제로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아이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극심한 죄인으로 유다를 여기기에 성인으로 분류되어 축일까지 가지는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단독으로 저주와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단테의 그 유명한 《신곡》에서 아래와 같이 지옥 최하층의 루시퍼의 입에 유다를 물려놓았을 정도이니까…….
    「루키페르의 얼굴에 있는 여섯 개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이것이 세 개의 턱 위에 피 섞인 침과 눈물로 고드름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 단테는 루키페르의 열린 아가리가 하나씩 모두 세 죄인을 이빨로 물어뜯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광경은 마치 삼나무를 찢어 실을 뽑아내는 것처럼 물고 있는 죄인을 가닥가닥 발기고 있는 듯했다. / 아처럼 루키페르의 아가리에 물린 세 놈은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요동을 치고 있었는데, 그 등껍질마저 홀랑 벗겨져 있었다. / 그 모습을 보고 베르길리우스가 단테에게 설명해주었다. / “저기 저 위에서 가장 큰 벌을 받고 있는 망령은 유다다. 그의 대가리는 안으로, 다리는 밖으로 삐져나와 있지 않은가. […]”」 ―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김영진 역, 자화상, 2024. p. 140. ↩︎
  • 9
    기독교에서 “존재의 근원”에 해당하는 ‘하느님’의 한 상태. 구약에서 “태초에 하느님이 하늘과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고 할 때 여기서 창조의 주체가 되는 ‘하느님’이 성부(聖父)에 해당한다. ↩︎
  • 10
    기독교에서 “인간화된, 보이게 된 형태”에 해당하는 ‘하느님’의 한 상태. 예수 그리스도가 대표적인 성자(聖子)로,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서의 성자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의 모습을 인간에게 드러내고 그 자신의 말씀과 질서, 계시와 구원을 직접 전달하기 위해 인간의 형태로 현현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물론 ‘성자’는 ‘인간에게 보이게 된 형태의 하느님’이므로, 사물 안에 담겨 있는 의미 또한 모든 세계의 사물은 하느님이 그 의지를 담아 창조한 것이라는 점에서 착안하여 성자로도 취급된다. ↩︎
  • 11
    기독교에서 “힘, 작용, 방식”에 해당하는 ‘하느님’의 한 상태. 단순하게는 ‘사랑’이 곧 성령(聖靈)에 해당하며, 각 신자들에게 깃들거나 그들을 보조하여 신자들의 신앙을 공고히 하고 미덕을 가르치며 회개하는 것을 돕거나 감동 · 깨달음 등을 주는 어떠한 힘 혹은 동인으로 묘사되거나 이해되고 있다. ↩︎
  • 12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227. ↩︎
  • 13
    Ibid. ↩︎
  • 14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 228. ↩︎
  • 15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김춘미 역, 민음사, 2022. pp. 228-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