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37. 한로로, 『자몽살구클럽』 I

탐서일지 #37. 한로로, 『자몽살구클럽』 I

2026-05-31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이렇듯 온갖 것이 뒤섞여서 영문을 알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삶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나면 필연적으로 인생이란 사는 보람이 없다고 선언하게 된다고 말장난을 해 보고 또 그렇게 믿는 체했는데 그것은 과연 부질없는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 두 가지 판단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척도가 없다. 다만 지금까지 지적한 혼미와 분열과 모순들 때문에 판단이 흐려져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걷어 버리고 문제의 진정한 핵심으로 곧바로 나아가야 한다. 인생을 살 만한 보람이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 그것은 필경 하나의 진리다. 그러나 너무나 자명한 이치이기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진리다. 삶에 대한 이런 모욕, 삶을 수렁에 빠뜨리는 이런 부정(否定)은 과연 삶의 무의미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삶의 부조리는 과연 희망이라든가 자살 같은 길을 통해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하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그 나머지는 치워 버린채 밝히고 추적하고 해명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과연 부조리는 죽음을 명하는가, 모든 사고의 방법론이나 초연한 정신의 유희에서 벗어나 그 무엇보다 먼저 이 문제에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객관적’인 정신의 소유자가 항상 모든 문제 속에 끌어들이는 뉘앙스나 모순이나 심리학 따위는 이러한 탐구와 열정적 관심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직 여기서 필요한 것은 하나의 부당한, 즉 논리적인 사고뿐이다. 이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되기는 언제나 쉽다. 그러나 끝까지 논리적으로 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의 흐름을 끝까지 따라간다. 그러므로 자살에 대한 성찰은 나의 관심사인 단 하나의 문제를 제기할 기회를 제공한다. 죽음에 이를 정도의 논리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휩쓸리는 일 없이, 자명함이라는 단 하나의 빛 속에서, 내가 여기 그 기원을 지적하는 추론을 진행시킴으로써만 그에 대한 답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부조리의 추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추론을 시작한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들이 그 추론을 계속하여 고수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22-24.


쉽게 정리하자면 예은이는 가짜 죽음을 원하고, 나는 진짜 죽음을 원한다. 죽음이 코앞에 들이닥칠 때 예은이는 싫다 발악하겠지만, 나는 눈 감고 저승사자를 환영할 준비가 되어있다.

한로로, 《자몽살구클럽》, 어센틱, 2025, pp. 10-11.


I. 총평

  •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 소위 말하는 MZ세대들이 밥 처먹듯 외치는 자살과 관련된 밈. 수업 들어오는 선생님들마다 니네는 뭐 그렇게 못 죽어서 안달이냐,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만큼 “자살할래!”는 소녀들 사이서 이미 오래전에 고착된 유행어이다.” 맨 첫 장의 제목 ‘나는 살구 싶나’의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이 문장들은 내가 적어도 제3장까지 읽었을 때 《자몽살구클럽》에 대해 가지게 된 인상을 요약해주기에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호기롭게도 작가는 소설의 첫 머리부터 일찍이 알베르 카뮈가 ‘가장 진지한 철학적 문제(un problème philosophique vraiment sérieux)’라 선언한 자살을 다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 말지 벼랑에 몰린 열다섯의 소녀들의 초상(portrait)이 가득 담겨 있다. 작가가 이 시점에서 예시하는 것이란 결국 《자몽살구클럽》의 첫 장에 등장하는 네 명의 소녀가 ‘자살’과 ‘살자’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그리고 그 선택의 이유가 무엇이었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암시다.
  •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세 개의 장에 걸쳐 그려지는 소녀들의 초상이 어떤 화법으로 그려지고 있는지다. 개인적으로 모든 소설은 죽음과 인간이 맺는 다양한 관계를 그려내는 것에 그 미학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우선 공통적으로 전반적인 기술이 풋풋한 학창시절, 그러니까 소위 ‘여름’이라는 상징을 널리 획득한 청소년기의 파아란1이런 종류의 ‘여름’은 꼭 길게 묘사되곤 한다. 문학적 전통에 비추어 보아 풋풋한 여름 하늘의 색깔은 ‘파란색’이 아닌 ‘파아란색’라고 표현해야 적절할 것이다. 장음 특유가 가지는 그 늘어지는 듯한 불완전함은 이런 종류의 문학에 있어 필수 요소가 되고 말았다. 색채를 듬뿍 묻히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작품은 과일이 제대로 여물기도 전인, 녹색 내음으로 뒤덮인 전원이 생각나는 문체를 통해 즉각적으로 독자에게 노스탤지어(Nostalgia)를 불러온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향수는 언제나 몰려오는 회색 빛깔의 장마전선과 대조를 이룰 때 가장 아스라히 태동한다. 이 점을 너무 정확하게 알고 있던 저자는 안갯빛의 캔버스에 파아란 물감을 칠하는 것을 작품의 핵심 구도로 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세 개의 장에 걸쳐 그려진 소녀들은 ‘자살’ 위에 ‘살자’가 여러 차례 덧칠된, 위태로움 위에 여러 겹으로 거칠면서도 되직한 환상이 쌓아올려진 형태로 묘사되고 있으니까. 하지만 작가의 채색은 온전하지 못하다. 꼼꼼하게 칠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꼼꼼하게 칠하지 않아야 할 부분마저 꼼꼼하게 칠한 것이 초상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문제다. 대조가 동원된 비극적 작품에서 덧칠 기법이 흥미로워지는 이유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밝은 색상 사이에 뚫린 빈 공간을 통해 새어 나오는 뒷면이 뚜렷한 명암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만약 캔버스가 지나치게 많은 물감으로 뒤덮여 그 배후에 숨은 회색빛 바탕을 아예 덮어버린다면, 그건 실패한 채색이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까지의 《자몽살구클럽》은 첫 약속에 비추어볼 때 너무나도 단순한 채색을 가진다. 모든 초상들이 너무나도 파아랗다. 지나칠 정도로 파아란 하늘로 모든 곳이 남김 없이 뒤덮여 있다.
  • 제3장까지 독자가 확인하거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클럽의 네 구성원 중 세 명: 주인공 ‘소하’와 학생회장 ‘태수’, 그리고 영화감독이 꿈인 ‘보현’2책의 제1장부터 제3장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
    ① 나는 왜 살구 싶나
    ② 이보현은 살구 싶다
    ③ 하태수는 살구 싶다
    이 자살을 생각하게 된 동기 또는 배경이다. 첫 약속을 확인한 독자는 푸릇푸릇한 문체 사이에 간헐적으로 노출되는 균열을 통해 이를 확인하기를 기대한다. 소설은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세 인물의 가정환경을 재구성할 수 있는 파편들을 툭툭 던져준다. 보현의 경우 폐암에 걸려 죽어가는 어머니와 그녀의 치료를 위해 지게 된 막대한 빚, 그리고 그 과정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영화감독이라는 자신의 꿈과 여섯 살 배기 어린 동생이 그 초상화의 배경에 그려져 있다. 태수 뒤에는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가정 환경이, 소하의 뒤에는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술 · 여자에 찌든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모습, 어머니의 도망으로부터 온 상실감이 복합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불우한 가정환경 혹은 인물의 배경사적 설정은 독자에게 자신의 과거사에서 불행하거나 끔찍했던 순간들을 불러내는 효과를 가진다. 공감 능력이 좋은 독자라면 보현의 이야기에서 가족 또는 경제적 제약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희생하거나 포기해야 했던 경험을 즉각 회상할 것이며, 태수의 위태로운 밝은 외면으로부터 전혀 괜찮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급부로서, 혹은 그 모든 고통들을 생각의 저편으로 쫓아내기 위해 스스로에게조차 명랑함이라는 가면을 써야 했던 모든 순간들을 떠올릴 것이다. 소하의 아버지를 보면서는 저런 인간의 부류도 분명히 존재할 우리 사회를 생각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골목 가운데에서 울고 있거나 그녀와 정확히 같은 이유로3「또 궁금해진다. 저 ‘우리’에 내가 정말 낄 수 있을지. 이름, 나이, 얼굴 하나 모르는 나를 ‘우리’라는 새 울타리 안에다 넣어줄 수 있는지. 꿈, 사랑, 희망 아무것도 갖지 못한 내게 아무런 대가 없이 ‘함께’를 기약해줄 수 있는지. / 그렇게 함께한다면 ‘우리’는 죽고 싶은 이유를 죽이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살릴 수 있을지,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 세상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엄마가 살기 위해 집을 떠난 것처럼 내가 살기 위한 방법이 언젠가 나타날 거라 스스로를 위로해 왔다. 그 언젠가가 지금이라면? 그 방법이 ‘자몽살구클럽’의 부원이 되는 거라면?」 ― pp. 20-21. 또 다른 《자몽살구클럽》을 꿈꾸고 있을 누군가들을 상상하며 개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독자의 기대에 정확히 부응하고 있으며, 노출된 뒷사정을 통해 푸르름 뒤에 숨은 위태로운 청춘, 나아가서는 위태로운 인간 일반을 그려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미 충분히 작품의 채색은 ‘비어있는’ 것 아닌가?
  •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이 작품이 처음으로 독자에게 무엇을 약속했는지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서두에 썼듯 작가는 우리에게 《자몽살구클럽》의 첫 장에 등장하는 네 명의 소녀가 ‘자살’과 ‘살자’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그리고 그 선택의 이유가 무엇이었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약속했다. 선택은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이보현은 살았고, 하태수는 죽었다. 그러나 바로 이 대조로부터 우리는 소녀들이 왜 자살했는지 또는 자살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 중심 문장은 ‘이보현은 살았고, 하태수는 죽었다’다. 문제의 핵심은 왜 이보현은 살았고, 그와 반대로 하태수는 죽었는지다. 두 사람 모두는 공통적으로 불행한 가정 · 성장 환경을 가졌다. 앞서 요약한 것처럼 보현은 폐암에 걸려 죽어가는 어머니, 막대한 치료비, 그 과정에서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자신의 위태로운 꿈 위에 서 있고, 태수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손찌검이나 매질을 당할 정도로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가정 환경 위에 서 있다. 둘 다 한 인간을 질식하기 하기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하다. 자신의 능력 혹은 젊음 특유의 왕성한 생명력이 발휘되는 경험이 필요한 성장기에 이 모두를 좌초시키는 가혹한 금지는 태양을 향해 뻗어가려던 소녀들의 고개를 저 까마득히 먼 바닥으로 향하게 하는 외력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조건 하에서, 공통적인 상처 내지는 고통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생존이 갈려버리는 이유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고통을 견디는 역치가 다르다고 추측하기에는 직접 어머니를 마주할 때를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잘 버텨냈던 태수가 반증이 된다. 태수의 지나치게 밝은 모습을 정신적 도피 행위로 해석하여 이 난점을 돌파하려고 해도 여전히 영화감독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보현이 눈앞에 나타난다. 정신분석학을 가져와서 도대체 두 사람은 뭐가 달랐기 때문에 한 명은 뛰어내려야 했고 다른 한 명은 그렇지 않을 수 있었는지를 분석해야 하나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 결국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애초에 왜 인간은 자살하는가? 왜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 누군가는 끝까지 살아남는 반면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가? 이 시점에서 소설의 실패는 명백해진다.
  • 이 실패는 문제가 되는 두 소녀의 초상이 타인인 주인공 소하가 관찰한 외면적 과정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부터 이미 예견된 실패다. 자살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결정 과정은 내면적 과정이다. 한 사람이 죽음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그녀가 어떤 환경에 노출되었는지만을 가지고서는 전혀 설명할 수 없다. 이 소설의 문체를 가져와 표현할 때, 만약 한 인간이 불우한 환경에 처했다고 죽음을 감행한다면 ‘매번 모두가 뛰어내리고 싶다고 그렇게나 노래를 불러대는 한강은 진작 변사체로 가득했을 것’이다. 정말 자살의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두루뭉실하게 견딜 수 없는 환경이 누군가를 죽음으로 몬다는 영양가 없는 오래된 통념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이 실제로 그가 자살을 감행하게 하는 행동으로 전이되는 과정, 인물이 겪는 내면적 갈등 기작과 사고의 경로들을 모조리 치열하게 추적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 없이 자살에 대해 논의한다는 것은 모든 이 세상의 ‘태수’들을 모두 파아랗게 덮어 지워버리는 조야한 덧칠만큼이나 무모하다. 인간의 내면에 대한 구조화나 이해 없이 단순히 인물이 뛰어내릴 만한 충분한 ‘떠밈’을 제공하는 불성실한 문학은 상상적 살인과 그 본질에서 별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전혀 유용하지도 않고 지루한 원론적 글보다도 더욱 위험한 독약이다.
  • 소설이 눈물겨운 비극을 구성하기 위해 각 소녀들에게 부과한 가정 환경의 묘사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다. 푸릇푸릇한 새싹이나 다름없는 소녀들의 동심 내지는 생명력이 사회의 부조리함에 의해 짓밟히는 광경을 자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소설은 여타의 작품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와 정확히 동일하게 가상적 악인들을 고안하고 데포르메(déformer) 기법4미술 · 회화에서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일부를 변형 · 과장 · 축소 · 왜곡을 가하여 표현하는 기법을 데포르메(déformer) 기법이라고 부른다. 캐리커쳐 그림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작화 기법이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대표적인 데포르메 기법에 해당한다.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살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한 인간이 어떻게 현실의 가혹함에 마주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내면적 격변을 겪는지를 기술하지 않고서는 규명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 비극적 구조의 인간을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문학 · 철학적 사고 실험에 동원하고는 한다. 모든 종류의 사고 실험에서 우리가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동일한 것을 동일하게 유지하고, 바꿔야 하는 것만 바꾸는 변인 통제다. 우리의 사고 실험은 둘 이상의 인간이 존재하는 사회를 반드시 그 배경으로 하므로, 최소한의 정확성이라도 담보하고자 한다면 무대에 존재하는 인간을 모두 충실히 재현해야만 한다. 그런데 상술하였듯 우리가 이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란 태수의 어머니는 부유하지만 딸을 심하게 매질하거나 매우 모질게 대하는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소하의 아버지는 술과 여자, 담배를 끼고 사는 폐인이자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가장이라는 점 딱 두 가지 단순한 사실들의 건조한 나열 뿐이다. 이 두 인물은 오직 두 소녀의 비극적 서사를 부여하는 딱 그 수준까지만 서술되고, 소비되며, 그 지점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퇴장한다. 소설의 그 어디에도 이 두 어른들이 왜 “평균 열다섯의 인간들이 이토록 발악하게 만든 세상을 향해” “살구 싶다!”고 외치게 만들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이나 설명이 제시되지 않는다. 이 두 인물들은 금지와 부조리의 표상으로서 단순 제시되고, 이 풋풋한 소녀들의 꿈과 삶의 갈망을 저지시키는 반동 세력이자 악인의 위치를 획득하며, 마침내는 독자로 하여금 소녀들에 완전히 이입하고 부조리한 세계의 모든 것들에 대해 함께 발악하도록 유도하는 아주 효과적인 선동가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이런 종류의 묘사는 다른 주제를 다루는 작품에서는 부분적으로라도 허용될 여지가 있을지언정,5물론 나 자신은 그 어떠한 문학 작품에서도 이러한 인물의 단순화는 치명적이라고 보지만 말이다. 문학은 결국 문자 위에서 인간을 재현하려는 시도가 아니던가? ‘자살’을 주제로 삼는 작품에 있어서는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매 순간 나이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며, 모든 어른들 또한 한때는 열다섯이었고 여섯이었으며 이 세상의 모든 청소년 또는 어린이 중 하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자명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인물 묘사를 단순화하여 어른들을 악마화하거나 무관심한 회색 인간으로 격하시키는 소설은 복잡한 뒷면 위에 칠하는 너무나도 파아란 물감으로 일그러진 기괴한 캔버스와 전혀 다르지 않다.
  •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 소위 말하는 MZ세대들이 밥 처먹듯 외치는 자살과 관련된 밈. 수업 들어오는 선생님들마다 니네는 뭐 그렇게 못 죽어서 안달이냐,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만큼 “자살할래!”는 소녀들 사이서 이미 오래전에 고착된 유행어이다.” 맨 첫 장의 제목 ‘나는 살구 싶나’의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이 문장들은 내가 적어도 제3장까지 읽었을 때 《자몽살구클럽》에 대해 가지게 된 인상을 요약해준다. 호기롭게도 작가는 소설의 첫 머리부터 일찍이 알베르 카뮈가 ‘가장 진지한 철학적 문제(un problème philosophique vraiment sérieux)’라 선언한 자살을 다루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 말지 벼랑에 몰린 열다섯의 소녀들의 초상(portrait)을 제시하지만, 모든 초상은 너무나도 조야하고 지나치게 파아란 물감으로 얼룩진 나머지 그저 파란6‘파아란’에서 노스텔지어적 효과가 제거되고 오직 있는 그대로의 색채만이 남는다면, 그건 ‘파란’일 뿐이다. 여기서는 파란(波瀾)이기도 하다. 초상(初喪)으로 내려앉아 까마득히 먼 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마지막 고민을 하는 모두를 지워버리는 감각적 유흥이 되고 말았다. 작가가 예시하는 것이란 결국 《자몽살구클럽》의 첫 장에 등장하는 네 명의 소녀가 ‘자살’과 ‘살자’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그리고 그 선택의 이유가 무엇이었을지에 대한 논의가 전혀 아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반복되어 익숙해진 구도 위에 올려둔 네 장의 초상을 우리가 원하는 자살의 초상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쉽게 정리하자면 이 소설은 가짜 자살을 원하고, 나는 진짜 자살을 원한다. 죽음이 코앞에 들이닥칠 때 소설은 싫다 발악하겠지만, 나는 눈 감고 저승사자를 환영할 준비가 되어있다.

II. 문답들

II.1. 〈자몽살구클럽〉 음반 중 첫인상으로 가장 끌린 1곡과 그 이유

한로로 – __에게 (To. __)

가사가 전반적으로 인상깊었다기보다는 신선한 음악적 시도 때문에 가장 괜찮았던 것 같다. 평소 다양한 장르를 듣는 편이지만7물론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이 앨범이 해당하는 얼터네이티브 록(Alternative Rock) 장르는 그렇게까지는 많이 듣지는 않지만, 그래도 〈퍼플웨일(Purple Whale)〉이나 〈히미츠(Hemeets)〉와 같은 밴드 정도는 듣긴 했다. 중 · 고등학교 가곡 느낌을 거의 그대로 살린 대중음악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으니까. 가창 수행평가 때처럼 음악 선생님이 앞에서 피아노 반주를 치고, 누군가가 캐스터네츠와 트라이앵글을 규칙적으로 두들기는 오후 햇살이 가득한 음악실이 생각나는 음악이었다. 비록 이런 종류의 감각은 총평에서 내가 맹렬하게 비판했던 노스텔지어(Nostalgia)에 해당하지만, 적어도 음악 그 자체가 소설의 서사와 결합하지 않는 한 문제가 되는 조야한 덧칠만큼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II.2. 〈자몽살구클럽〉 음반 중 가장 이해가 안 되었거나 낯설었던 곡 1곡과 그 이유

한로로 – 시간을 달리네 (Goodbye, My Summer)

최대한 떼어놓고 보는 것이 음악적 가치를 온전히 평가하는데 필요했겠지만, 소설을 3장까지 다 읽은 뒤에 음악을 들으며 가사를 본 이상 가사와 분위기 자체가 소설의 문제점과 엮여서 지나치게 낯설게 보이는 것을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음악 자체만 떼어놓고 본다면 나쁘지 않은 수작이고, 듣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가사의 풋풋함에서 연상되는 파아란 색채가 소설의 특징과 결합하는 순간, 총 8연에 달하는 가사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애틋한 마음을 그려낸다기보다는 그저 포템킨 마을8‘초라한 상태를 은폐하기 위해 꾸며낸 겉치레’를 뜻한다. 이는 다음과 같이 전해지는 러시아의 민간 설화에서 기원한다.
「어느 날 예카테리나 여제가 러시아 귀족 그레고리 포템킨이 통치하고 있는 지역을 순방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이 지역은 러시아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들 중 하나였다. 포템킨은 여제가 자신에게 준 영지가 자신의 통치 아래에서 크게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면 자신의 궁정 입지와 제국의 위상이 올라갈 것이라 생각했다. 짧은 기간에 대규모의 개발을 마칠 수는 없었기에 이윽고 포템킨은 꾀를 하나 낸다. 그는 여제가 영지 곳곳을 방문하는 것이 아닌, 그의 영지를 관통하는 드네프르 강에서 바지선을 타는 것으로 순방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포템킨은 가짜 마을을 만든다. 그는 여제가 배를 타고 바라볼 강 유역에, 두꺼운 종이에 발전되어 있는 마을의 모습을 그린 뒤 마치 이곳이 부유하고 발전된 곳인 것처럼 위장했다. 여제 일행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포템킨은 그림을 철거하여 여제가 바라볼 다음 장소에 가져다 놓았고, 결국 훌륭히 여제를 속여 넘겼다.」
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II.3. 이보현이 죽고 싶은 이유와 살고 싶은 이유

9이하의 모든 논의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원문 인용을 제외하고는 ‘살 싶다’를 ‘살 싶다’로 정정하여 적을 것이다. 총평에서 충분히 설명했듯 나는 이 소설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이다. 죽음과 삶이라는 무겁고 진지한 문제를 지나치게 가볍고 불성실하게 소비하는 것을 나는 견딜 수 없다.

총평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작가가 기술해 놓은 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주인공 소하의 시선을 통해 전달된 사실을 통해,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서술자라고 가정하고 추론을 진행해볼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이미 구멍이 뚫린 인물을 가지고 실험을 계속하는 것은 위험하다. 나는 상상적 살인을 거부한다.

II.4. 하태수가 죽고 싶은 이유와 살고 싶은 이유

상기와 동일함.

II.5. 이보현과 하태수의 ‘살고 싶다’는 같은 의미인가

  • 해석의 층위에 따라 바뀐다. 작가의 의도 층위, 그러니까 작가가 의미한 ‘살고 싶다’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나는 같다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작가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고통받는 모든 종류의 청소년들과 사회 초년생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비록 그 방식에 대단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여름의 푸르름이 그러하듯, 그 어떤 생명체도 죽음을 바라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 싶어하고, 인정받기를 바라며, 가능하다면 고통을 피하고 쾌락 내지는 성취감을 누리고 싶어한다. 작가는 아마도 이러한 보편성, 그리고 이러한 보편성에 기초한 연대감을 전달하는 장치로서 두 인물 모두가 같은 ‘살구 싶다’를 말하게 했을 것이다.
  • 하지만 내가 해석하는 층위에서는 두 ‘살고 싶다’는 다르다고 본다. 결정적으로 두 사람은 똑같이 외쳤으면서 다른 결말을 맞았기 때문이다. 보현은 살아남았고, 태수는 죽었다. 의미가 동등했다면, 정말로 내면에서 같은 과정을 거쳐서 그 문장이 탄생했다고 한다면 태수가 죽을 수는 없다. 보현과 태수는 다른 심리적 · 내면적 과정을 겪었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굳이 조야한 추론을 이어가자면, 태수는 《자몽살구클럽》에서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는 있다. 부원들이 알아차리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는 했다. 태수는 교무실과 마지막 순간 몇 번을 제외하고 나면 늘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쾌활하게 행동하고 웃었으니까. (독자는 제3장의 초반 즈음부터 짐작할 수 있는데, 보통 가장 도피의 강도가 심할수록 자신의 감정부터 철저하게 격리한다는 것 그리고 미적으로 파멸은 가장 고점에서 이루어질 때 가장 자극적이고 강렬하다는 경험칙 때문이다) 나는 자살의 문제에 대해 주목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의 ‘살고 싶다’가 어떻게 다른지를 대조하는 작업을 깊게 파고 들어야 한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두 사람의 문장이 어떻게 다른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여전히 삶과 죽음을 가르는 그 차이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어떤 기작에 의해서 활성화되는지에 대해서 판단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수색 작업으로 우리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죽음과 자살의 복합성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자살의 문제를 위로를 위시한 상품으로 소비하는 모습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키울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II.6. 소하는 아직 살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반면, 이보현과 하태수는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 차이는 뭘까

결국 이 질문이 나온 배경은 소설의 실패에 있다는 것이 내가 여기서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소설이 ‘왜 똑같이 불우한 두 사람 중 어느 하나는 죽었고 다른 하나는 죽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에 소설에 기초하여 논의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질문은 본질적으로 왜 누군가는 자살을 행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술했듯 나는 아직도 그 답을 알지 못한다. 이 질문은 나를 5년 전부터 따라다니던 지독한 질문이지만(왜 ‘나는 자살하지 않는가’를 포함해서), 여전히 논리적으로 완결되고 흡족한 설명은 완성하지 못했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이런 종류의 ‘여름’은 꼭 길게 묘사되곤 한다. 문학적 전통에 비추어 보아 풋풋한 여름 하늘의 색깔은 ‘파란색’이 아닌 ‘파아란색’라고 표현해야 적절할 것이다. 장음 특유가 가지는 그 늘어지는 듯한 불완전함은 이런 종류의 문학에 있어 필수 요소가 되고 말았다.
  • 2
    책의 제1장부터 제3장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
    ① 나는 왜 살구 싶나
    ② 이보현은 살구 싶다
    ③ 하태수는 살구 싶다
  • 3
    「또 궁금해진다. 저 ‘우리’에 내가 정말 낄 수 있을지. 이름, 나이, 얼굴 하나 모르는 나를 ‘우리’라는 새 울타리 안에다 넣어줄 수 있는지. 꿈, 사랑, 희망 아무것도 갖지 못한 내게 아무런 대가 없이 ‘함께’를 기약해줄 수 있는지. / 그렇게 함께한다면 ‘우리’는 죽고 싶은 이유를 죽이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살릴 수 있을지,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 세상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엄마가 살기 위해 집을 떠난 것처럼 내가 살기 위한 방법이 언젠가 나타날 거라 스스로를 위로해 왔다. 그 언젠가가 지금이라면? 그 방법이 ‘자몽살구클럽’의 부원이 되는 거라면?」 ― pp. 20-21.
  • 4
    미술 · 회화에서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일부를 변형 · 과장 · 축소 · 왜곡을 가하여 표현하는 기법을 데포르메(déformer) 기법이라고 부른다. 캐리커쳐 그림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작화 기법이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대표적인 데포르메 기법에 해당한다.
  • 5
    물론 나 자신은 그 어떠한 문학 작품에서도 이러한 인물의 단순화는 치명적이라고 보지만 말이다. 문학은 결국 문자 위에서 인간을 재현하려는 시도가 아니던가?
  • 6
    ‘파아란’에서 노스텔지어적 효과가 제거되고 오직 있는 그대로의 색채만이 남는다면, 그건 ‘파란’일 뿐이다. 여기서는 파란(波瀾)이기도 하다.
  • 7
    물론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이 앨범이 해당하는 얼터네이티브 록(Alternative Rock) 장르는 그렇게까지는 많이 듣지는 않지만, 그래도 〈퍼플웨일(Purple Whale)〉이나 〈히미츠(Hemeets)〉와 같은 밴드 정도는 듣긴 했다.
  • 8
    ‘초라한 상태를 은폐하기 위해 꾸며낸 겉치레’를 뜻한다. 이는 다음과 같이 전해지는 러시아의 민간 설화에서 기원한다.
    「어느 날 예카테리나 여제가 러시아 귀족 그레고리 포템킨이 통치하고 있는 지역을 순방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이 지역은 러시아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들 중 하나였다. 포템킨은 여제가 자신에게 준 영지가 자신의 통치 아래에서 크게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면 자신의 궁정 입지와 제국의 위상이 올라갈 것이라 생각했다. 짧은 기간에 대규모의 개발을 마칠 수는 없었기에 이윽고 포템킨은 꾀를 하나 낸다. 그는 여제가 영지 곳곳을 방문하는 것이 아닌, 그의 영지를 관통하는 드네프르 강에서 바지선을 타는 것으로 순방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포템킨은 가짜 마을을 만든다. 그는 여제가 배를 타고 바라볼 강 유역에, 두꺼운 종이에 발전되어 있는 마을의 모습을 그린 뒤 마치 이곳이 부유하고 발전된 곳인 것처럼 위장했다. 여제 일행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포템킨은 그림을 철거하여 여제가 바라볼 다음 장소에 가져다 놓았고, 결국 훌륭히 여제를 속여 넘겼다.」
  • 9
    이하의 모든 논의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원문 인용을 제외하고는 ‘살 싶다’를 ‘살 싶다’로 정정하여 적을 것이다. 총평에서 충분히 설명했듯 나는 이 소설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이다. 죽음과 삶이라는 무겁고 진지한 문제를 지나치게 가볍고 불성실하게 소비하는 것을 나는 견딜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