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38. 한로로, 『자몽살구클럽』 II

탐서일지 #38. 한로로, 『자몽살구클럽』 II

2026-06-08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Hans Holbein (1947~1543) – The Ambassadors (from Google Arts and Cultures)

라캉은 예술 또한 창작 과정을 통해 실재와의 만남을 체험하면서 작품을 통해 작가가 느낀 것을 보여주려는 노력이기에 승화의 일환으로 본다. 창작 작업은 인식에 포착되지 않고 언어로 지명할 수 없는 상징계 속의 실재를 표현하고 체험하려는 몸부림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실재는 결여의 효과로, 그리고 죽음 충동의 대상으로 주체에게 체험된다. 라캉이 상징계의 작용에서 벗어나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실재를 표현한 것으로 든 그림이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의 「대사들The Ambassadors」(1533)이다.

라캉에 따르면 「대사들」에서 홀바인이 왜상歪像; anamorphosis 기법을 사용해 표현한 오브제objet인 해골은 실재에 속하는 물Ding의 상징으로 시선의 교차를 통해 우리에게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숨겨지기도 한다. 그것은 대상을 관조하는 평범한 시선에는 보이지 않으며, 삐딱하게 보기, 즉 일상의 평범한 시선을 비트는 때만 비로소 눈에 드러난다. 「대사들」의 예처럼 예술작품은 대상을 묘사하고 충실하게 전달해주는 것보다, 그것을 통해 대상의 전혀 다른 면목(죽음)을 느끼게 해줄 수 있다. 라캉이 예술작품을 승화의 예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김석, 《프로이트 & 라캉: 무의식으로의 초대》, 김영사, 2010. pp. 165-168.

나의 과거, 나의 현재, 나의 미래를 모조리 망치는 아빠를 향한 분노는 새벽이 무르익을수록 겉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나는 곰팡이 번진 천장을 바라보며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했고, 세워서는 안 될 계획을 세웠다.

한로로, 《자몽살구클럽》, 어센틱, 2025, pp. 186-187.


I. 총평

  • 존속살해(尊屬殺害), 자신 또는 배우자의 부모를 살해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 결과적으로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을 맞췄다. 일주일 전에 주인공 소하가 아버지를 살해할 것이라는 예감에 휩싸였으니까. 이 예감은 어떻게 겉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던 것일까. 나는 한 가지 가능성에 집중해보기로 한다. 책의 초반과 말미에 걸쳐 반복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해본다. 작가가 약속한 네 명의 소녀들의 자살 위 초상1여기서 ‘초상’은 제1차 독서모임의 독서노트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다.이 그려지는 화풍이 이 소설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 초반과 말미에 걸쳐 반복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하나씩 따져보기 시작하면, 일차적으로 우리는 ‘자살’이라는 테마와 ‘청소년기’라는 파아란 테마 두 가지가 서로 뒤덮인 복잡한 양상을 떠올리게 된다. 지난 독서노트에서 지적했듯 작품은 마지막 순간까지 파아란 색체, 즉 ‘살자’를 어떻게든 ‘자살’이라는 엄중한 주제 위에 칠하기 위해 온힘을 다하고 있다. 시각적인 비유로 말하는 경우 우리가 목격한 광경은 ‘지나칠 정도로 파아란 하늘로 모든 곳이 남김 없이 뒤덮여 있다’는 말로 기술할 수 있겠지만, 존속살해의 테마가 등장한 이상 우리는 정신분석학적인 도구를 사용해 새로운 표현을 도입해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유명한 존속살해의 설화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을 가진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 아니던가.
  • ‘지나칠 정도로 파아란 하늘로 모든 곳이 남김 없이 뒤덮여 있다’는 말을 라캉(Jacques Lacan) 철학의 용어들을 빌려와 바꾼다면 아마 다음의 번역문이 탄생할 것이다: ‘실재계가 상징계로 지나칠 정도로 남김없이 뒤덮여 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실재계(The Real)는 언어나 이미지로 결코 포착하거나 상징할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세계 구조로, 규범과 언어로 대표되는 상징계(The Symbolic)나 이미지로 대표되는 상상계(The Imaginary) 중 그 어느 것으로도 완전히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이 실재계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무질서한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에 라캉은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상상계로, 사회적 관습과 금지를 체득하는 과정에서 상징계로 진입함으로써 실재계로부터 유리된 인간은 어떠한 계기로 상징계와 상상계의 촘촘한 그물망을 뚫고 올라온 실재계를 인식하는 순간 버틸 수 없어서 다양한 정신증을 나타낸다고 설명하기에 이른다.2여기에 대한 설명은 장용순, 《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세계관》 (이학사, 2023)에 훌륭한 도식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다.
  • 라캉 정신분석학에서 실재계가 지나칠 정도로 상징계로 남김 없이 뒤덮여 있는 경우 발생하는 정신적 반응은 강박증이다. 자신이 정한 어떤 규범에서 벗어나는 무엇이 발견되는 순간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그것을 퇴출하거나 치우려고 하는 강박증은 소설 전반에 걸친 작가의 고집으로 완성되고 있다. 작가의 상징계는 ‘청소년들에게 위로를’이다. 그 자신도 외전에서 기술하고 있듯 ‘〈자몽살구클럽〉은 우리의 곁을 이미 떠나버린 태수들과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소하들, 꿈을 망설이는 보현이들과 꿈이 없는 유민이들, 이 아이들이 무사히 자라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 그렇게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책’3한로로, 《자몽살구클럽》, 어센틱, 2025, p. 196.이니까. 작가는 의도적으로 네 명의 소녀들에게 자원을 집중적으로 할애하고, 나머지 배경은 흐릿하게 처리하여 책의 시작점을 끝까지 밀고 나가려 한다. 하지만 이 야심찬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독서노트에서 지적하였듯 주변의 어른들이 흐릿하게 처리되면서, 소하에게 남은 선택지가 단 하나를 제외하고서는 모두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 다시 한 번 태수의 어머니와 소하의 아버지를 떠올려보자. 둘 모두는 파멸로 치달은 부모-자식 관계의 비극적 상징이며, 동시에 작품에서 철저하게 주변화된 사람들이기도 하다. 지적한 바 있듯 이 두 인물은 오직 태수와 소하라는 두 소녀들에게 있어 비극적 서사를 부여하는 딱 그 수준까지만 서술되고, 소비되며, 그 소비의 효용이 다한 시점에서 작가에 의해 퇴장당한다. 소녀들에게 있어 이 어른들은 자신의 욕망을 번번이 좌절시키는 부당한 억압의 화신이요, 부조리이며, 동시에 자신들이 “살구 싶다!”고 외치는 세상 그 자체이기도 하다. 소설은 소녀들을 철저히 옹호하기 위한 목적 아래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땋아내고 있으므로, 독자는 소녀들이 겪어야 하는 부당한 모든 폭력들과 금지들에 대해 강력한 문제 의식을 느끼게 된다. 고압적인 태수의 어머니가 자식의 죽음으로 인해 얻은 극도의 슬픔, 그리고 알코올 중독에 가정 폭력을 일삼는 소하의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마지막 장면 모두가 일차적으로 독자들에게는 그들의 업보로 인해 소녀들이 외친 “살구 싶다!”가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마침내 가닿은 결과로 이해되게 되니까.
  • 그러나 세계는 소녀들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청소년들만으로도, 아이들만으로도 구성되지 않는다. 한때는 소년 · 소녀였을 오늘날의 어른들도 언제나 소설의 관심사가 되는 우리 사는 세계에 분명히 존재한다. 작가는 열다섯 소녀들의 내면과 경험의 복잡함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태수의 어머니와 소하의 아버지와 같이 몰이해를 일삼고 무책임한 어른들도, 음악 선생님과 소하의 어머니가 유일하게 말을 했던 목욕탕 아주머니와 같이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되는 어른들도 모두 그 열다섯 소녀들이 겪는 내면과 경험의 복잡함을 있는 그대로 가지는 인간이다. 태수 · 보현 · 유민 그리고 소하 이 네 명의 여학생들이 ‘살자’와 ‘자살’ 위를 아슬아슬하게 거닐며 떨고 있는 것처럼 태수의 어머니도, 소하의 아버지도, 음악 선생님도, 소하의 어머니도, 목욕탕 아주머니도 모두 ‘살자’와 ‘자살’ 위를 아슬아슬하게 거닐며 떨고 있는 사람이다.
  • 작가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는 것은 곧 실재하는 세계의 모습 중 일부를 억누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라캉 식의 표현이 ‘실재계가 상징계로 지나칠 정도로 남김없이 뒤덮여 있다‘는 문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실재계를 상징계로 완전히 덮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던가? 물론 가능하지 않다. 프로이트의 환자 안나 O(Anna O)가 그랬듯 억압된 실재는 회귀하기 마련이다. 역동적인 실재계는 상징계의 처절한 방어를 뚫고 결국 솟아올라 우리에게 도달하고 만다. 통증4나는 몸보다도 마음이 아팠다. 피 섞인 딸보다 한 병의 술을 더 소중히 여기는 아빠가 혐오스러웠다. 그런 아빠의 행동이 새삼스럽지 않다는 점은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어린 내가 잠든 척했던 이 좁은 방 밖에서 엄마는 똑같이 처맞았을 것이고, 똑같이 잠 못 들었을 것이고, 똑같이 아빠를 증오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엄마가 떠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오로지 아빠 잘못이다. 나는 아빠 때문에 엄마를 잃었다. 아빠만 아니었어도 엄마와 떨어질 일 없었다.」 ― p. 186.이, 일시적 실명5「누워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벽을 더듬어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실 바닥에 퍼질러 자고 있는 아빠가 욱신거리는 시야에 들어섰다. 몸의 방향을 부엌으로 틀었다. 도착한 싱크대 아래 서랍을 열어 식칼을 꺼냈다.」 ― p. 187.이, 그리고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왈칵 쏟아지는 눈물6「맨발로 뛰쳐나간 거리도 어제와 다를 것 하나 없었다. 잔인한 세상은 또 한 바퀴 돌아 오늘을 무사히 찾아와 있었다. 기어오르는 아침 햇살의 따스한 기운을 받아낸 눈물이 들꿇었다.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여름 하늘에 제물로 바쳐 기도했다.」 ― pp. 192-193.이 나타난다. 어머니와 함께 있음으로 인해 얻을 수 있었던 쾌락이 금지된 유일한 원천이자, 타협할 수 없으며 이해할 수도 없는 아버지와 세계의 질서는 이제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상징계의 억압을 뚫고 올라온 실재계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뿐이다. 어쩔 수 없었던, 싶었던 억압된 오이디푸스가 마지막에 도달 가능한 결말은 오직 하나 뿐이다.
  • “나의 과거, 나의 현재, 나의 미래를 모조리 망치는 아빠를 향한 분노는 새벽이 무르익을수록 겉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나는 곰팡이 번진 천장을 바라보며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했고, 세워서는 안 될 계획을 세웠다.” 소하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도망쳤다. 그녀는 싶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마찬가지로 그녀의 아버지 또한 싶었을 것임을 안다. 오이디푸스의 존속살해(尊屬殺害)는 바로 이 지점에서 진정한 비극이 된다.

II. 문답들

II.1. 〈자몽살구클럽〉 음반 중 처음 들었을 때와 가장 다르게 들린 곡 1곡과 그 이유

한로로 – __에게 (To. __)

첫 번째 독서노트에서 나는 이 곡이 소설의 서사와 결합하지 않는 한 문제가 되는 ‘조야한 덧칠’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 추론했다. 하지만 소설 자체가 이 곡 자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이 발견된 이상 의견을 철회해야 할 것 같다. 음악적으로 신선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음악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캐스터네츠와 트라이앵글을 치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이 소설이 세계와 대면하는 인간의 운명을 특정한 세대에만 맞추는 데 급했다는 인상이 다시금 떠오르게 된다. 소설의 내용은 노래 제목의 빈 칸에 죽은 태수를 넣도록 독자에게 종용하지만, 나는 그 종용을 우리가 가장 크게 경계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해본다.

II.2. 〈자몽살구클럽〉 음반 중 책 전체 또는 결말과 가장 닮았다고 느낀 곡 1곡과 그 이유

한로로 – 시간을 달리네 (Goodbye, My Summer)

가사는 포용력이 최대한 있는 표현들로 작성되어 있다. ‘우리’, ‘서로’, ‘사랑해’, ‘기억해’와 같은 표현들은 일차적으로 청자들에게 이 소설이 목표한 것과 마찬가지의 위문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동원된 상징계다. 하지만 촘촘하게 덮인 위로의 말들이 가려버린 것들을 기억하는 이상 가사에 생기는 균열은 불가피하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 서 있는 ‘너’, ‘아무도 모를 추억 틈에’ 있는 ‘너’, 내가 시간을 달려 ‘다가가 사랑해 외치’는 ‘너’, ‘손을 뻗어봐도 울음만 터뜨리고’, ‘돌아가야 할 때 벌써 내일을 아파하’는 ‘너’란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것은 소하인가? 태수인가? 유민인가? 보현인가? ‘이 세상의 모든 소하, 태수, 유민, 보현’인가? 소설은 이 곡과 더할 나위 없이 닮았다. 너무나도 파아랗게 덮여버린 캔버스. 나는 여름 뒤에 숨은 모든 것들을 보고 싶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 서 있는 그것들을, 아무도 모를 추억 틈에 서 있는 그것들을, 기나긴 여름을 지나서 우리 모두가 안길 수 있는 바로 그런 그것들 말이다.

II.3.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 직접 읽어야만 느낄 수 있을 법한 장면

다음 장면은 모든 독자들이 다시금 곱씹어봐야 할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왜 소하가 아버지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의 진정한 파괴력은 독자 스스로가 생각할 때에 발휘되는 법이니까. 물론, 실제와는 동떨어진 몇 가지 말이 안 되는 자잘한 오류들도 포함해서.

II.4-1. 책 마지막 장의 ‘나는 살구 싶다’는 결국 무슨 뜻인가

  • 작가의 의도: 비명이자, 간절한 소원이다. 자몽살구클럽의 부원들이 매일 음악실에 모여서 외치던 ‘살구 싶다’와 정확히 같은 욕망이다. 스스로가 살아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누군가이기를,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기를, 누군가의 사랑이나 애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외침이다.
  • 실질적 결과: 특정 인물들이 배제되었기에 공허해진 외침이다. 1인칭 시점으로 쓰인 소설의 특성상 소하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 독자가 일차적으로 그 외침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도록 구조는 잘 짜여져 있지만, 여기서의 ‘살구 싶다’가 ‘나’, ‘보현’, ‘태수’, ‘유민’을 돌아 다시 ‘나’로 돌아오는데 그쳤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에 충실한 의미를 획득했을지언정 문학에 충실하지는 못한 비명이 되고 말았다.

II.4-2. 책 마지막에서 소하가 ‘살구 싶다’고 말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 책 마지막에서 소하는 보현이나 유민에 가까운 의미에서 ‘살구 싶다’고 말했다기보다는 태수에 가까운 의미에서 ‘살구 싶다’고 말하고 있다. 즉 보현과 유민의 경우 자살을 고려하는 원인 내지는 부조리에 대한 의미 부여 또는 합리화가 성공했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이 선택지에서 사라져 ‘살구 싶다’고 말하는데 이른 반면, 소하는 그렇지 못하고 있다. 책 마지막에서 소하가 말하는 ‘살구 싶다’는 본질적으로 자몽살구클럽에서 매번 외쳤던 것에서부터 전혀 나아가지 못했다.
  • 마지막 장에서 소하의 ‘살구 싶다’는 독백은 말미의 가사처럼 ‘살구 싶나’를 거쳐 ‘살아도 되나’, ‘살고 싶어요’, ‘제가 감히 살구 싶다를 외쳐도 되나요’에 이르고 마침내는 ‘저를 살려주세요’로 맺어진다는 점을 우리는 다시 고려해야 한다. 소설의 결말은 마지막 장 제목에 대한 배반이다. 즉 책 마지막에서 소하는 ‘살구 싶다’고 말할 수 있게 되지 못했다. 소하는 여전히 ‘나는 살구 싶나’라는 첫 장의 제목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II.5. 자몽살구클럽 부원들에게 하태수의 죽음은 어떤 의미였으며,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그리고 하태수는 꼭 소설에서 사망해야 했는가

  • 태수의 죽음은 나머지 자몽살구클럽 부원들에게 있어 부채라는 의미와 영향을 획득했다. 유민은 두말할 것도 없고, 보현의 경우도, 그리고 주인공인 소하에 이르기까지 태수를 영원히 상실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수없이 자살을 생각했음에도 끝까지 밝은 모습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에게 삶의 의미를 불어넣어주려고 했다는 사실의 인지와 더불어 상환이 불가한 빚으로 자리매김하고 말았다. 태수가 편지 마지막에 남긴 추신은 결정타였고,7「p.s. 너희 수호신은 내가 할게. 그러니까 반드시 살아남아.」 ― p. 135. … 이 문장은 시각에 따라서는 숭고함을 획득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남겨진 부원들이 현실에 묶여 있어야 할 무거운 이유를 하나 명확하게 제공해주는 데 성공했다.
  • 연출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태수의 사망은 서사에서 적절한 중간 반전을 꾀한다는 점 때문에 선택된 것일 수도 있다. 자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겠다고 소설의 서두가 선언한 이상 여학생들의 기묘한 동아리 활동의 묘사로 인해 가벼워지기 시작한 분위기를 다시 한 번 끌어내리는 기능까지 맡기려고 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상술한 것처럼 남겨진 부원들이 살아남을 이유를, 간접적으로는 독자들에게 자신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위해 살아남을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제공하기 위해 사망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내 관점에서 태수의 사망은 지나치게 파아랗게 색칠된 캔버스에도 불안함을 느낀 작가가 그녀에게 동종의 고통에 시달리면서 그것을 모두 떠안고 떠나갔다는 흔한 예수적 상징의 역할을 맡기기 위해 그녀를 데포르메화한 결과로 탄생한 상상적 살인이다. 작가의 관점에서는 소설에서 태수를 살해할 필요가 있었지만, 나로서는 그녀의 죽음 없이도 삶과 죽음 사이에 선 사람의 초상을 충분히 그려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여기서 ‘초상’은 제1차 독서모임의 독서노트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다.
  • 2
    여기에 대한 설명은 장용순, 《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세계관》 (이학사, 2023)에 훌륭한 도식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다.
  • 3
    한로로, 《자몽살구클럽》, 어센틱, 2025, p. 196.
  • 4
    나는 몸보다도 마음이 아팠다. 피 섞인 딸보다 한 병의 술을 더 소중히 여기는 아빠가 혐오스러웠다. 그런 아빠의 행동이 새삼스럽지 않다는 점은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어린 내가 잠든 척했던 이 좁은 방 밖에서 엄마는 똑같이 처맞았을 것이고, 똑같이 잠 못 들었을 것이고, 똑같이 아빠를 증오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엄마가 떠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오로지 아빠 잘못이다. 나는 아빠 때문에 엄마를 잃었다. 아빠만 아니었어도 엄마와 떨어질 일 없었다.」 ― p. 186.
  • 5
    「누워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벽을 더듬어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실 바닥에 퍼질러 자고 있는 아빠가 욱신거리는 시야에 들어섰다. 몸의 방향을 부엌으로 틀었다. 도착한 싱크대 아래 서랍을 열어 식칼을 꺼냈다.」 ― p. 187.
  • 6
    「맨발로 뛰쳐나간 거리도 어제와 다를 것 하나 없었다. 잔인한 세상은 또 한 바퀴 돌아 오늘을 무사히 찾아와 있었다. 기어오르는 아침 햇살의 따스한 기운을 받아낸 눈물이 들꿇었다.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여름 하늘에 제물로 바쳐 기도했다.」 ― pp. 192-193.
  • 7
    「p.s. 너희 수호신은 내가 할게. 그러니까 반드시 살아남아.」 ― p. 135. … 이 문장은 시각에 따라서는 숭고함을 획득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