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34.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직소』 III
2026-02-25“죄, 죄의 반의어는 뭘까. 이건 어렵다.” 《인간실격》의 독자는 이 질문을 따라가며 죄의 반의어들을 만나게 된다. 법도 아니고, 선도 아니며, 신도 아니고 꿀과 콩과 공복도 아니다. 그렇다면 죄의 반의어란 무엇이란 말인가? 요조가 말하지 않는 대답이야말로 그와 오사무의 병리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핵심이다.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커피와 사유(思惟)가 있는 공간.
“죄, 죄의 반의어는 뭘까. 이건 어렵다.” 《인간실격》의 독자는 이 질문을 따라가며 죄의 반의어들을 만나게 된다. 법도 아니고, 선도 아니며, 신도 아니고 꿀과 콩과 공복도 아니다. 그렇다면 죄의 반의어란 무엇이란 말인가? 요조가 말하지 않는 대답이야말로 그와 오사무의 병리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핵심이다.
카뮈가 시사하듯 우리의 존재 조건은 ‘바위를 계속해서 밀어올리는 것’에 있다. 인간은 자신의 모든 순간을 다하여 말하고, 채색하며, 의미를 변형하고 부과하는 존재다. 우리는 현상의 원인을 단일하게라도, 모든 존재자를 포함하지 않더라도 계속 지목해본다. 우리가 ‘바위를 밀어올리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바위를 밀어올리지 않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인간실격》의 화자 오바 요조의 면모는 병리적이다.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라는 존재를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라 진술한다. 그러나 단언은 두 세계의 분리를, 분리는 두 가지의 결과를 낳는다. 우리가 발견하는 인물의 초상이란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죄하면서도 그 단죄 행위 자체를 자신의 상승을 기도하는데 역이용하는 자다.
허무한 인식의 상태, 세계와 나 자신의 화해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의식의 상태가 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관점이 있다. 한때 매끈하고 아름다웠던 구조물이 지금 여기에 없기 때문에, 오히려 여기에 나는 무엇이든지 세워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 스스로의 가슴이 뛰는 순간이란 이 생각이 의욕이 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죄, 죄의 반의어는 뭘까. ―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는데는 언제나 이 질문이 ‘나침반’이 된다. 나는 죄의 반의어를 찾아 떠나는 배에 올라타 돛을 올린다. 기도, 회개, 그리고 고백. 이 모든 것이 반의어가 아닌 유의어로서 가라앉아버리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가라앉지 않는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우리에게 첫 번째로 어울리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Bon Voyage!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 셰익스피어의 저 유명한 문장은 양귀자의 소설에서도 예외없이 변형되어 반복된다. 모든 문학의 중심이 되는 저 문장에 대해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어떻게 대답하는가? 독자에게 요구되는 미덕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거예요? 어차피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뉴스는 온통 거짓말투성이인데요.” 기록국에서 저지르는 뻔뻔스러운 날조 행위에 대해서도 말했지만 그녀는 놀라지도 않았다. 거짓이 진실이 된다고 해서 자기 발밑에 무서운 함정이 생긴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다. 존스와 아론슨과 러더퍼드, 그리고 언젠가 잠깐 쥐었던 종이쪽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
글을 쓴다는 것이 점점 실존과 재회의 문제라는 점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문장과 사유 사이에서 나는 붉은 술패랭이의 마지막 꽃말을 나 자신에게 바치고자 한다. “고통으로 과거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우리는 끝없는 시련을 이겨내도록 된 존재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아니까.
“오직 관념적인 봄만이, 오직 관점적인 ‘인식’만이 존재한다.” 음악도 이 명제의 예외일 수 없다. 즉 음악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문제는 언제나 음악이 ‘자신에게’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문제로 환원된다. 그 문제에 대한 응답을 나는 짧게 소명해본다.